906화. 어디 엿 한번 처먹어 봐라. (1)
결정이 난 듯하자 임소병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응?”
청명이 되물으니 임소병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란 본디 한 번을 도와주면 고마움을 가지지만, 열 번을 도와주면 당연하다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열한 번째 도움을 당당히 바라게 되지요.”
“…….”
“그리고 그 열한 번째를 주지 않으면 비난하고 욕을 퍼붓습니다.”
“……사람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한 겁니다, 당연한 것.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임소병이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가 맞닥뜨린 것은 싸늘한 힐난의 눈빛들뿐이었다.
“역시 출신은 속일 수 없나.”
“누가 산적 아니랄까 봐.”
“……사파는 사파네.”
임소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 나만 그래요? 나만? 진짜로 나만 쓰레긴가?”
“예.”
“어.”
“그런 듯.”
임소병의 고개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가 ‘빌어먹을 도사 놈들. 도무지 어울리지를 못하겠네. 하는 짓은 지들이 더 산적 같으면서 꼭 이럴 때만…….’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깔끔하게 무시했다.
“여하튼 그래서?”
“크흠.”
임소병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방법입니다, 방법! 그냥 물러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선언하고 물러나는 거죠.”
“……선언?”
“예. 열한 번째 도움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요?”
“욕먹는다며.”
“그렇습니다! 돕지 않으면 욕을 합니다. 하지만 방법을 바꿔서! 우리는 지금부터 너희를 도와주지 않겠다고 당당히 선언하고 물러나 버리면 어떨 것 같습니까?”
“……똑같이 욕하지 않을까?”
“후후후. 생각이 짧으시군요. 틀렸습니다!”
“그럼?”
임소병이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더 심하게 욕합니다. 아주 잡아 죽일 듯이…….”
“야, 이 새끼야!”
뻥!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간 청명이 임소병의 가슴을 그대로 걷어찼다. 임소병이 악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자 오검과 당군악이 기겁하여 황급히 청명을 제압하고 잡아끌었다.
눈이 돌아간 청명은 흡사 도둑을 발견한 경비견처럼 으르렁댔다.
“아니, 내가 승질이 뻗쳐서! 지금 뭐 사람 열받으라고 시위하냐? 시위해? 산적 대가리는 얼마나 단단한지 확인시켜 드려?”
“지, 진정해라, 청명아!”
“녹림왕이라니까! 발로 차면 안 된다고!”
“자자, 청명아. 사파 놈이지만 그래도 직위가 있는 사람이다. 대접해 드려야지.”
하지만 녹림왕은 녹림왕. 걷어차인 임소병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다시 일어섰다.
“오?”
그 광경에 화산의 제자들이 역시 녹림왕이다를 외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였다.
“사람 말을 끝까……. 쿨럭! 쿨럭! 끄윽……. 갑자기 왜 기침이……. 쿨럭!”
몸을 들썩이며 크게 기침을 하던 임소병의 입에서 별안간 붉은 피가 촤악 뿜어져 나왔다.
“엄마야!”
“히익?”
모두의 경악한 비명 이후로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임소병은 앞섶을 적신 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힘없이 청명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청명이 툴툴거렸다.
“뭔 개복치도 아니고 한 번 차였다고 피까지 뿜어?”
‘사람인가?’
‘악마.’
‘어쩌자고 저런 게 세상에 나서……. 차라리 장일소가 착하겠다, 장일소가!’
“……괜찮소, 녹림왕?”
당군악의 물음에 임소병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 마십쇼. 끄떡없……. 쿨럭! 쿨럭!”
“…….”
“그보다…… 사람 말을 끝까지……. 끝까지 좀…….”
청명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해 봐.”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 쿨럭. 하여튼 원망할 겁니다. 하지만, 쿨럭! 그 원망을 해야 할 대상이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면 됩니다.”
“……구파 쪽으로 화살을 돌리자?”
“어허.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게 왜……. 쿨럭! 쿨럭! 에헴! 화살을 돌리는 겁니까. 원래 그게 당연한 건데.”
임소병이 씨익 웃었다.
피를 줄줄이 흘리며 환하게 웃는 모양새가 의기양양해 보이기는커녕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차마 누구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못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섬서에서 화산이 봉문을 풀고 서안을 지킨 덕에 이쪽에 명분이 생겼습니다.”
“명분?”
“예.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돌아가는 것보다 더한 명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파가 호북과 하남을 떠나 섬서와 사천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으니, 원래 지켜야 할 곳을 지키기 위해서 본가로 돌아간다고 하면 됩니다.”
“…….”
청명이 ‘오?’ 하는 얼굴로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그리되면 원망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힘들고 귀찮아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까요. 그럼 남은 사람들이 누굴 보겠습니까?”
“누구라니?”
“쯧쯧. 또 다른 양민들을 지키기 위해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문을 걸어 잠그고 신선놀음하고 있는 도사 놈들을 보지 않겠습니까? 남들 다 생고생하고 있는데 뒤에서 봉문 하고 코빼기도 안 보이는, 팔자 좋은 도사 새끼들……. 아니, 주먹 내려놓으시고. 그 주먹 좀. 쿨럭! 쿨럭! 여기 피, 피!”
임소병이 재빨리 피로 물든 제 앞섶을 들이밀자, 청명이 살짝 쥐었던 주먹을 마지못해 내려놓았다. 하지만 눈빛엔 여전히 띠꺼운 기색이 가득이었다.
촤악!
임소병이 피에 젖은 부채를 펴 들었다.
“본디 강호는 제 구역을 제 문파가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세인들에게 상기시켜 주면 됩니다. 사천은 당가, 섬서는 화산, 그리고 호북은 무당이었다는 것을. 그리되면 자연히 당가가 제 지역을 떠나 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 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될 겁니다.”
현영이 임소병의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그런 방법이 있군. 그냥 빠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어.”
하지만 백천은 생각이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짜 사파인들이 사천을 노린 것도 아닐진대, 너무 눈 가리고 아웅 아닙니까?”
“허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천 도장. 사천에는 이미 사파가 들어와 있습니다.”
“예?”
백천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런 그보다 당군악이 더 놀라 임소병에게 급히 물었다.
“사실인가?”
“예. 저도 정체를 정확하게 알진 못하지만, 사파가 분명한 놈들이 사천의 산 곳곳에 숨어 지금도 오가는 이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중입니다.”
산 곳곳에 숨어 오가는 이들을 위협하는 사파라면…….
어…… 그러니까 그런 이들을 보통 뭐라고 하냐면…….
“……산적?”
“에헤이!”
임소병이 부채를 휘휘 저었다.
“정체불명의 사파입니다. 정체불명의 사파! 어쨌든 그 사파 놈들이 곧 시기적절하게 문제를 일으킬 겁니다. 인명은 살상하지 않는 정도에서, 공교롭게도 말이지요. 아주 공교롭게도!”
백천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니까, 당가가 빠질 명분을 주기 위해서 녹림이 직접 강남의 사파로 위장하고 사천에서 사고를 치겠다는 것 아닌가?
“아니, 그런다고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당연히 구분이…….”
“안 가겠지.”
“안 가겠네.”
“……예. 안 가겠네요. 그렇네요.”
사파가 산에 있으면 산적이고, 강에 있으면 수적이요, 들에 있으면 마적이다.
얼굴에 산적이라고 써 둔 것도 아닌데, 옷만 적당히 갈아입히면 그 사파 놈이 어디 출신인지 알 게 뭔가?
“확실히…….”
당군악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규모가 크건 작건 사천에서 사파가 소요를 일으켰다는 소문만 제대로 돈다면 누구도 당가가 사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망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사천당가 아닌가? 사천당가가 사천을 지키기 위해 간다는데, 사천을 내버려 두고 우리나 계속 지켜 달란 소리를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이해하고 멍하니 납득하니 임소병이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후후후. 알아들으신 모양이군요. 이런 걸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음모.”
“비열함.”
“더러움.”
“계, 계책입니다! 계책! 신기묘책! 더러운 게 아니고, 이 도사 놈들아!”
외로운 산적의 피맺힌 외침은 언제나 그랬듯 도사 놈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딱 하나 청명만은 감탄한 듯 임소병을 바라보았다.
“다 죽어 가는 놈 살려 놨더니, 별 쓸모도 없다고 욕 많이 했는데. 이렇게 쓸 데가 다 있네.”
“쓸모가 없다니요! 매화도에서 돈 버느라 허리가 부러질 뻔했는데!”
“빼먹느라 손모가지가 부러졌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그냥 빼먹을걸.”
“그랬으면 손모가지가 아니라 모가지가 부러졌지.”
“…….”
청명 역시 적당히 개방이나 녹림을 통해 소문을 퍼뜨려 책임소재를 완화해 볼 생각은 했지만, 사천에서 직접 사파로 위장하고 문제를 일으킨다는 발상은 하지 못했다.
“확실히 사파는 사파네. 음모를 짜는 수준이 달라. 해 먹던 일이 그래서 그런가?”
“……묘책이라니까요.”
“쯧쯧. 원래 같은 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는 것이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법이지. 같은 계책도 정파의 머리에서 나오면 묘책이고, 사파의 머리에서 나오면 음모가 되는 거야.”
“아, 아니 그게…….”
“억울하면 정파 하시든가. 누가 산적질 하래?”
“…….”
임소병은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걸 느끼며 입을 닫았다.
백천이 조용히 청명에게 속삭였다.
“근데…… 좀 심한 거 아니냐?”
“심하긴 뭘 심해. 얼어 뒈질 정파 한다고 뭐 동전 한 푼이라도 남는 거 있어? 이런 거라도 챙겨야지.”
“…….”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한데…….
그때, 이대로 뒀다가는 청명이 임소병을 말로 패서 지하까지 박아 버리겠다고 생각한 당군악이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만 된다면 장강에서 당가가 빠져나올 명분은 확보가 되겠군.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곳에서 고통받을 양민들이 마음에 걸리네.”
그 말에는 청명이 답했다.
“걱정 마세요. 그것도 방법은 있으니까.”
“응? 방법이라니?”
“무한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장강 유역에 사는 이들 중엔 적당히 지원해 주면 사천으로 옮길 사람도 있을 거예요.”
당군악이 놀란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사천으로?”
“예.”
청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는 줘야죠. 사천으로 옮긴다고 하면 당가는 물론이고 화산에서도 지원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지난 삼 년 동안 쌓아 놓은 돈이야 넘쳐나니까.”
이번엔 임소병이 감탄한 듯 부채로 손바닥을 탁 쳤다.
“확실히 돈은 넘쳐나지요. 그리고 설사 기회를 준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터전을 옮기려 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테니, 큰돈이 들지도 않을 겁니다. 후후후. 이걸 다 예상하시고 생색은 생색대로 내겠다는 발상. 과연 악마가 울고 갈…….”
“근데 저 새끼가 가면 갈수록!”
“참아라, 청명아!”
“또 때리면 죽는다!”
잠시 또 툭탁거린 끝에 청명이 겨우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리해야 마음이 편하실 테니까요.”
“으음.”
당군악이 허락을 구하는 듯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께서 양민들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그러할진대, 도가의 길을 걷는 이가 어찌 한낱 재물에 연연하겠습니까?”
“……연연하시던데.”
“연연하셔야 할 텐데.”
“우리 거지였는데요, 장문인.”
“조, 조용히 하거라, 이놈들아! 외인이 계시지 않느냐!”
붉어진 얼굴로 역정을 낸 현종이 크게 헛기침을 하고 다시 점잖게 말했다.
“그러니 뜻대로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맹주님.”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이자 임소병이 빙그레 웃는다.
“그럼 당가와 발맞춰서 저희도 매화도에서 철수하겠습니다.”
“응? 매화도는 왜?”
“……매화도가 당가보다 더 앞에 있잖습니까. 전쟁이 나면 저희부터 먼저 죽을 텐데?”
“아니, 뭐 그거야 그렇지만…….”
청명이 심드렁하게 귀를 후볐다.
“지금 빠지기에는 못 다 번 돈이 좀 아깝기도 한데……. 좀 더 있어 보지?”
“……사람 목숨이 제일 중요하다면서요.”
“그렇지. 그런데…….”
청명이 귀를 판 손가락을 훅 불었다.
“요즘엔 산적도 사람 취급받나?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임소병은 순간 말문이 막혀 ‘이게 정말 사람이냐?’라는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청명은 여전히 뚱했다.
“어차피 살아 봐야 세상에 별 도움도 안 될 텐데, 차라리 돈이라도 좀 더 버는 게 어떨까?”
“빠지겠습니다!”
“성급하게 결정 마시고.”
“돈도 돈이지만 일단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하여튼 요즘 것들은 돈 귀한 줄을 모른다니까? 쯧쯧.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너 때는 세상에 마귀들만 살았냐?
“크흠. 그리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녹림왕.”
“감사합니다, 맹주님.”
이제껏 임소병은 천우맹의 실질적 맹주가 청명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맹주의 자리에 청명이 아닌 현종이 앉아 있는 것을 하늘에 감사했다.
저 악귀가 천우맹주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세상이……. 아니, 세상은 몰라도 녹림은 확실하게 불탔을 것이다.
대충 정리가 되자 청명이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판은 깔아 줬으니 그 새끼도 슬슬 움직이겠지.”
“……판을 깔아?”
“아니,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낄낄낄낄.”
자세한 설명도 없이 세상에서 가장 신난 얼굴로 웃는 그를 보며 모두가 밀려드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감히 우리를 엿 먹이려 들었다 이거지? 법정 이 새끼!’
청명의 입가가 비틀리기 시작했다.
“삼 년 동안 자리를 비웠더니 내가 누군지를 잊었던 모양인데.”
“…….”
“어디 엿 한번 처먹어 봐라. 낄낄낄낄! 으헤헤! 으헤헤헤헤헷!”
“…….”
급기야는 혼자 자지러지기 시작한 청명을 보며 조걸이 백천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 새끼 또 왜 저러는 겁니까?”
“말해 뭐 하겠냐. 또 속으로 뭔 음모 꾸미는 모양이지.”
같은 물도 뭐? 소가 먹으면 우유고, 뱀이 먹으면 독이라고?
‘그럼 저 새끼는 뱀이지. 그것도 아주 악랄한.’
거대한 악룡의 사악한 눈빛이 남쪽으로 향했다.
멀리 저 멀리, 세상을 뒤흔들 혼란이 땅이 될 장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