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5화. 잘 돌아왔네, 화산검협. (5)
“제발…….”
악다구니를 쓰며 싸워 대는 청명과 임소병, 그리고 들러붙어 말리는 척하면서 슬슬 바람을 불어넣는 오검까지.
그 지옥과도 같은 광경은 엄격한 사천당가의 가법에 익숙해진 당군악에게 혼란을 넘어 고통까지 가져다주었다.
‘왜 화산은 항상…….’
응? 소소야?
너는 왜 거기서 그러고 있니?
청명의 어깨 뒤에 붙어 임소병에게 삿대질해 대고 있는 당소소를 보니 위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이 망할 화산 놈들이 내 딸내미를…….
쿵!
“여하튼 그러니까.”
청명이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발은 빼야 돼요.”
“뭐 그건 맞는 말이죠.”
“……아니, 녹림왕은 갑자기 왜 동의하는 거요?”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틀린 말은 아니죠.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왜?”
“이유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촤악!
부채를 활짝 펼쳐 든 임소병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저 장일소가 언제까지 강북 땅을 보며 군침만 흘리고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
“곧 움직일 겁니다, 어떤 식으로건.”
“그거야 다 아는 바가 아닌가?”
“그렇지요. 그러니 당연히 발을 빼야지요.”
듣고 있던 청명이 임소병을 거들고 나섰다.
“그 미친놈이 무슨 수작질을 할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잖아요. 강북을 제 손에 넣기 위해서는 장강을 넘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장강을 지키고 있던 당가가 제일 먼저 방패막이가 될걸요?”
“……으음.”
당군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바보가 아니다. 사패련이 장강을 넘는다면 사천당가의 주전력이 가장 먼저 그들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사실쯤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패막이라…….”
당군악이 청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구파의 방패막이가 된다면 당연히 거부해야겠지.”
“네.”
“하지만 양민의 방패막이라면?”
“…….”
당군악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당가가 장강을 지킨 이유는 구파를 돕기 위해서가 아닐세. 그저 양민들 때문이었지.”
솔직히 말해 처음에야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그저 구파의 이름이 추락하는 상황에서 천우맹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명분을 쌓을 기회라 여겼다.
하지만 스스로 장강을 종횡무진 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당군악 역시 느낀 것이 많았다. 지금껏 지켜 온 그 터전과 양민들이 사패련의 손아귀에 떨어져 고통받게 둘 수는 없다.
“그들에게 사패련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이상, 그런 이유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청명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사천당가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가문의 이익 아니었어요?”
“그건 맞는 말이네. 다만…….”
당군악의 시선이 올곧게 청명에게로 꽂혔다.
“그건 강호에서의 이야기일세. 사천당가는 양민들과 그 이득을 다투지 않네. 적어도 내가 당가의 가주인 이상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어투였다.
청명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이상 마음에 드는 대답일지도 모른다.
‘삼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당군악 역시 사천을 떠나 느낀 게 많은 모양이었다.
“뭐, 그건 가주님의 말이 맞죠. 그런데…….”
“그런데?”
“문제는 양민을 도우려고 하다가 구파 놈들의 방패막이가 된다는 거죠.”
“그건 감수해야 할 일이 아닌가?”
청명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당가가 모두 전멸할 때까지 구파가 도우러 오지 않는다고 해도요?”
“…….”
이 말엔 당군악도 입을 다물었다.
여러 생각이 오가는 듯 침음성을 흘리던 당군악이 청명을 보며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네.”
“……사패련을 막지 못한다면 멸망하는 것은 천우맹만이 아닐세. 그런데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사패련의 손에 사천당가가 무너지는 걸 좌시할 수도 있다 보는가?”
“네.”
너무도 태연한 청명의 단답에 당군악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건 구파일방을 바라보는 당군악과 청명의 시선에 차이가 있다는 의미였다.
청명은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오해하시는 게 하나 있는 것 같은데요.”
“……뭐가 말인가?”
“사천당가는 더 이상 구파일방의 동료가 아니에요. 적이죠.”
“……적?”
“네.”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구파의 입장에서 보면 사천당가와 같이 싸우나, 사천당가가 먼저 방패막이로써 사패련의 전력을 소진시킨 뒤에 싸우나 별다를 게 없다는 거죠. 외적이 쳐들어오는 경로에 다른 외적이 있다고, 누가 국경을 넘어서 함께 싸워요? 한쪽이 박살 날 때까지 손가락이나 빨고 구경하는 거지.”
“…….”
당군악의 표정이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변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 비유는 맞지 않네. 국경 밖에는 나라의 백성이 없으니까. 하지만 장강 이북에는 보호해야 할 양민들이 살지 않는가?”
당가가 아니라 양민들을 위해서라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움직일 거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청명은 비뚜름하게 웃었다.
마치 당군악이 그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섬서 이야기는 들으셨죠?”
“…….”
“그 새끼들이 정말 그 사파 놈들을 막을 여력이 없어서 좌시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당군악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인 끝에야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겠지.”
화산이 때맞춰 봉문을 풀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니, 화산에 그 소식이 들어가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섬서에 지옥도가 펼쳐졌을 것이다.
‘아니지.’
당군악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서안이 불타지 않았을 뿐, 지옥도는 펼쳐졌다. 그 사파 놈들의 마수에 두 개의 마을이 겁화에 휩쓸리지 않았는가? 그 상황을 좌시한 것은 명백히 소림. 정확히는 구파다.
이미 저들은 한차례 양민들을 사파인들의 마수 아래 밀어 넣었다. 한 번 했던 일을 두 번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당군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청명이 쐐기를 박았다.
“사패련이 북상하면 구파가 어떻게 나올 것 같아요? 아마 지원을 기다려야 한다, 좀 더 좋은 위치에서 맞서 싸워야 한다, 어쩌고 해 가면서 개소리로 시간이나 끌어 댈걸요?”
“사천당가가 사패련의 손에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아니요.”
청명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다시 맺혔다.
“당가가 혼자 싸우다 무너지는 것을 좌시하지 못한, 화산을 비롯한 천우맹이 모조리 장강으로 달려가 전화에 휘말릴 때까지.”
“…….”
“그럼 구파 입장에서는 얼마나 편하겠어요. 눈엣가시 같던 화산, 당가, 녹림이 사이좋게 손 붙잡고, 목에 걸린 가시 같던 사패련과 양패구상 해 주는데. 느긋하게 사패련이 천우맹을 털어먹길 기다렸다가 힘 빠진 사패련을 정리하려 들겠죠. 고귀한 희생 운운하며.”
청명의 입가에 조소가 어린다.
어떻게 아느냐고?
‘이미 겪었으니까.’
청명이라고 해서, 청문이라고 해서 몰라서 당한 것이 아니다. 알아도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그들이 물러서면 모두가 무너졌을 테니까.
그래. 그때를 후회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두 번은 안 당하지. 개 같은 새끼들아.’
청명은 이를 빠득 갈고는 말했다.
“법정은 나쁜 놈은 아니에요.”
법정과 놈이라는 말이 동시에 나오자 구석에 있던 혜연이 움찔하고는 청명을 바라본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심지어 허도진인도 나쁜 사람은 아니죠. 다만 머릿속에 한 가지가 확실한 것뿐이에요.”
“……그게 뭔가?”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문의 이익이라는 거죠.”
청명의 말에 당군악이 눈을 감아 버렸다.
그건 얼마 전까지 당군악이 하던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청명의 말이 고스란히 이뤄질 확률이 높다는 것을.
청명이 고소를 머금는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그들의 사고는 변하지 않는다. 과거 화산이 십만대산에 올랐을 때도, 그 후 화산이 마교의 습격을 받았을 때도, 그 뒤 화산이 처참히 몰락해 갔을 때도.
심지어 장강참변에서 봤던 허도진인과 법계의 행동도 딱히 다를 것이 없다. 그 모든 것은 그저 자파의 이익과 안위를 최우선으로 둔, 합리적인 결정일 뿐이다.
“그게 딱히 틀렸다고 할 생각은 없어요. 사람 다 그렇죠, 뭐.”
“…….”
“하지만…….”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쪽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이쪽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맞는 말이지.”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는 그도 청명의 말에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 역시 당가를 다른 문파의 방패막이로 희생시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했네. 이 상황에서 장강을 더 지키고 있는 것이 천우맹의 몰락을 부른다는 것도.”
“이해가 빨라서 좋네요.”
“하지만 한 가지는 마음에 걸리는군.”
당군악이 눈을 찌푸린다.
“아무리 그게 옳은 방향이라 해도, 이대로 그냥 발을 빼 버린다면 장강의 민심이 천우맹에게서 돌아설 걸세. 사람이란 본디 그리 냉철한 존재가 아니잖은가? 기껏 지난 삼 년간 공을 들인 일을 허사로 돌리게 될까 걱정이로군.”
그 순간 청명이 입꼬리가 사악하게 말려 올라갔다.
“허사요?”
“그렇네, 허사.”
청명이 가만히 당군악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아세요?”
당군악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종남.”
“…….”
순간 청명의 뇌가 정지했다. 청산유수처럼 말을 내뱉던 입이 쩍 벌어진 채 움직이질 않았다.
“아닌가?”
“그…… 어…….”
청명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여기서는 당연히 ‘아니다!’라는 대답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가 하려던 말을 이어서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내 입으로 종남이 싫지 않다는 말을 할 수가 있지?’
응? 싫지 않은 게 아니라 덜 싫은 거라고?
그게 그거지, 이 양반들아!
세상에서 종남보다 더 싫은 건 마교밖에 없다고!
청명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이 뒤룩뒤룩 좌우로 구르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백천이 청명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가주님. 지금 이놈은 누가 제일 싫은지를 묻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이 제일 싫은지를 묻는 것 같습니다.”
“그, 그렇지!”
청명이 잽싸게 동의하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동룡이도 밥 먹여 놓으니 도움이 될 때가 있네!
“상황?”
“예! 상황!”
“……종남에 지는 것?”
“…….”
그 순간 당군악은 청명의 얼굴이 말라붙은 석고처럼 쩍쩍 갈라지는 걸 본 것만 같았다.
충격을 받은 건 청명뿐만이 아닌지,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오검마저 몸서리를 쳤다.
“와, 그건 나도 빡친다.”
“상상도 하기 싫은데.”
“혀 깨물고 죽는 게 낫지.”
마지막으로 말을 보탠 백천은 심지어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고 종남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심지어는 장로들과 장문인마저도 그리하는 게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끄으……으……. 확실…히 그게 제일 빡치기는 하는데…….”
청명이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여하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러나.”
“저는 원래 누가 내 밥그릇에 손대는 걸 가장 싫어해요. 들인 공을 남이 홀랑 먹어 치우는 거? 절대 못 참죠.”
“자네 말대로라면 더더욱 장강을 지켜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거보다 더 싫은 게 딱 하나 있어요.”
“……그게 뭔가?”
청명이 말없이 당군악을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득이니 명분이니 하는 허상에 집착하다가 잃지 않아야 할 이들을 잃는 것.”
“…….”
“그걸 피하기 위해서라면 뭘 잃어도 상관없어요.”
당군악이 입을 닫았다.
청명의 얼굴에는 웃음기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전의 말이 더없는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잃지 말아야 할 이들이라…….’
그 말을 듣고도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알겠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당군악은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네. 다만…….”
한 점 꾸미지 않은 그의 본심이 담담히 흘러나왔다.
“그저 믿을 뿐이네, 자네를.”
당군악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