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4화. 잘 돌아왔네, 화산검협. (4)
화산의 장문인 처소에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화산 사람들뿐 아니라, 어제 찾아온 당군악과 임소병까지 장문인의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먼저…….”
현종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화산이 자리를 비운 동안 노고가 많으셨을 두 분께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천우맹의 맹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저도 두 분께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맹주님.”
당군악이 고개를 저었다.
“화산이 자리를 비웠다 해서 편히 생활한 게 아니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저 서로 해야 할 일이 달랐을 뿐입니다.”
“가주님…….”
훈훈한 덕담이 오가는 와중에 살짝 삐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뭐 물론 좀 힘들긴 했죠.”
“…….”
임소병이 티 한 점 없이 환하게 웃으며 현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야 뭐 건너편에서 언제 넘어올지 모르는 사패련에 덜덜 떨고, 한 번씩 장강 주변에 쓸데없이 찾아와서 괜히 눈을 부라리고 가는 구파 놈들의 눈치를 보고, 그리고 통행세가 비싸네, 어쩌네 지껄여 대는 상인 놈들 비위 맞추고, 그리 힘들게 모은 돈을 양민에게 가져다 풀기까지 하며 힘들게 살았지만……!”
“…….”
“당연히 뒤에서 수련만 한 화산도 힘드셨겠지요. 예! 뭐가 더 힘들고 말고 할 게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아니. 근데 저 인간이!”
청명이 눈을 부라리며 벌떡 일어나려 하자 백천이 그의 어깨를 꾹꾹 눌렀다.
“참아라, 청명아. 이제 시작인데 벌써 네가 그러면 오늘 아무것도 못 한다.”
그러자 앓는 소리를 낸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려 현영에게 물었다.
“장부는 이상 없어요, 장부? 혹시 빼먹은 게 있다거나? 꽁쳐 먹은 게 있다거나? 있을 수도 있는데? 있을 건데? 있어야 하는데?”
과연 횡령이 있는 게 좋은 것인지, 아니면 없는 게 좋은 것인지 순간적으로 혼란을 가져오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현영의 대답은 청명이 원하는 것과는 달랐다.
“깨끗하더구나.”
“깨끗?”
“그래, 깨끗.”
현영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강조했다.
“동전 한 문 틀림이 없다.”
“정말요?”
“다 대조해 봤다. 이토록 완벽한 장부는 내 살다 살다 처음 봤지 뭐냐.”
현영이 감탄한 얼굴로 돌아보자 임소병이 부채를 쫙 펼쳐 들고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하핫. 장로님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니, 저도 기쁩니다.”
하지만 그때.
“그럴 줄 알았지! 저 산적 새끼!”
청명이 다짜고짜 임소병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덥석 움켜잡았다.
“케엑!”
뜬금없이 멱살을 잡힌 임소병이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홉떴다.
“아, 아니! 몇 년 새 귀가 먹으셨습니까? 깨끗하고 완벽하다잖습니까! 완벽! 완벽 몰라요?”
“그래. 알지, 완벽! 그러니까 이러는 거 아냐!”
“예?”
임소병이 이게 뭔 소리냐는 얼굴로 보니 청명이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산적 새끼가 장부를 썼는데, 그게 틀린 게 없다는 게 말이 돼? 이게 누굴 호구로 보나?”
“…….”
임소병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뱉어, 이 새끼야! 얼마나 해 처먹었어! 보나 마나 싹싹 긁어서 아주 야무지게 빼돌렸겠지! 뱉어! 당장 안 뱉어?”
청명이 임소병의 머리를 짤짤 털어 댔다. 단정하게 빗은 임소병의 머리가 뒤로 획획 젖혀지며 금세 산발이 되었다.
“처, 청명아. 그분은…….”
“저도 알아요! 이놈 도둑놈 새끼인 거! 걱정 마십쇼, 장문인! 내가 이 새끼가 속곳에 감춰 놓은 동전 한 문까지 모조리 털어서 회수할 테니까!”
“아, 아니. 녹림왕…….”
“이 새끼, 이래도 실토 안 하지? 뒈질래? 어?”
임소병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도적놈이 장사한다고 의심할 게 빤하니 실수로라도 누락된 내용이 없게 하려고 수많은 이들이 숱한 밤을 지새웠건만, 그 모든 시간은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가?
“잡아!”
“옙!”
현종의 명이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오검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청명을 임소병에게서 떼어 냈다. 청명은 질질 끌려가면서도 허공을 뻥뻥 찼다.
“아니! 놔 봐! 지금 다들 속고 있는 거라니까!”
“장부가 정확하다잖아!”
“이 도적놈의 새끼가 어디 장문인한테!”
“…….”
아, 그거 때문이었구나.
그럼 말을 하지.
슬그머니 청명을 잡은 손을 놓아 버릴 뻔했던 백천은 마지막 순간에 움찔하며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청명을 꽉 움켜잡아 뒤로 질질 끌고 갔다.
“……미안합니다, 녹림왕.”
“…….”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듯 보였지만, 현종도 당군악도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여하튼…….”
촤악.
임소병이 부채를 쫙 펼쳐 들었다. 평소에는 자신감의 상징과도 같던 그 부채가 지금은 얼굴을 가리는 데 쓰이고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
“장부를 보면 아시겠지만, 매화도에서는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매화도가 안전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상인들이 하나같이 매화도를 통해 장강을 넘으려 하다 보니 배가 부족할 지경입니다.”
“오호라! 이놈들이 배 살 돈을 빼먹……. 읍읍! 읍!”
“…….”
임소병이 세상 허무한 눈으로 청명을 돌아보았다. 그때 현종이 말했다.
“녹림왕.”
“예, 장문인…….”
“그냥 신경 쓰지 마십시다.”
“……예.”
헛기침을 한 임소병이 말을 이었다.
“화산검협의 말대로 배를 더 늘리면 해결이 될 만한 문제지만, 사실 결국은 장강의 봉쇄로 얻어 내는 이득이다 보니 장강의 상황에 따라 매화도의 상황 역시 언제든 급변할 수 있습니다.”
“으음. 맞는 말씀이오. 사실 저 수로채가 장강을 여태 봉쇄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예, 장문인. 그렇기에 생각 없이 배를 더 늘렸다가는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노고가 정말로 많으셨소.”
“별말씀을요.”
임소병이 빙긋 웃었다.
“저희 녹림도 천우맹의 당당한 일원으로 제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핫.”
“근데 저 사파 놈이 또 어디에다 숟가락을 내밀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그 꼴을 볼 것 같……. 으읍! 으으으읍!”
이번에는 심지어 당군악마저 나서서 청명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좀 해라, 조용히!”
“입 좀 다물라고.”
“한 번만 더 입 떼면 이마에 강침 박아 버릴 거예요, 사형!”
현종이 얼굴을 감싸 쥔 채 다시 한번 임소병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개만도 못한 것이 산적의 생이라더니.”
“노비 아니오?”
“……노비나 산적이나.”
다르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현종은 신분의 굴레(?)에 신음하는 임소병을 위로했다.
임소병의 말대로 지난 삼 년간 녹림이 정말 정직하게 살아왔다면 그들을 보는 세인들의 시선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설사 그 시선이 많이 바뀌지 않았다고 해도 화산이 녹림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니 임소병의 말대로 비공식적으로 천우맹과 동맹을 맺고 있는 녹림의 위치를 확실하게 하는 작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패련과 제대로 문제가 벌어지기 전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현종의 시선이 이번에는 당군악에게로 향했다.
“가주께서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고생이랄 것도 없습니다.”
당군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장강에서 벌어지는 소요 중 정말 대단한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가 있었다면 너무 넓은 곳을 안 그래도 인원이 적은 당가가 조율해야 한다는 점이겠지요.”
제 입에서 백천의 손을 떼어 낸 청명이 구시렁거렸다.
“그럼 저 놀고먹는 산적 새끼들을 써먹었으면 됐잖아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네. 사파 놈들을 잡으러 산적이 내려온다는데 누가 반기겠는가?”
“여하튼 저 산적 새끼들은 도움이 안 된다니까.”
임소병이 무엇을 위해서 그 장강에서부터 이 먼 거리를 왔는가를 고뇌할 때 당군악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장강 지역의 민심은 확연히 천우맹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현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청명이 나타나기 전 화산이 그 힘겨운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역시 화산을 기꺼이 여기는 이들이 적게나마 있었기 때문 아니던가?
“다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맹주님.”
“으음.”
“지금은 사패련이 잠자코 있으니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사패련의 발호가 가까워지면 분명 문제가 커질 겁니다. 천우맹 차원에서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천우맹이라고는 하지만 중원의 천우맹은 화산과 당가뿐이다.
이건 당군악이 공식적으로 화산에 지원을 요청한 것과 다름없었다.
“확실히…… 지난 삼 년간 장강에 머물렀다면 사천에 있는 본가가 말이 아니겠구려.”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저희 화산이 최대한 빨리…….”
“뭐 하러요.”
“응?”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쏠렸다.
청명을 잡고 있던 백천이 슬그머니 손을 뗐다. 이놈이 헛소리할 때와 제대로 된 말을 할 때를 이제는 어느 정도 미리 구분할 수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두고 발 빼죠?”
백천의 손이 슬그머니 청명의 어깨를 다시 잡았다.
제압해야 하나?
“……발을 빼자고 했는가?”
“네.”
“장강에서?”
“네.”
태연하게 말하는 청명을 보며 당군악이 눈살을 찌푸린다.
“자네가 생각 없이 말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네만, 그 말은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군.”
백천이 충격에 두 눈을 부릅떴다.
저기요, 가주님……? 뭔가 잘못 알고 계신 모양인데, 이 새끼보다 생각 없이 말하는 놈은 중원 천지를 찾아봐도 없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당가가 양민들을 지켜 온 것은 물론 그게 당연한 의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우맹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네. 그런데 여기서 발을 빼 버린다면 그게 다 무용지물이 되지 않는가?”
“아니, 지금까지 해 준 게 있는데 이제 좀 쉰다고 욕하면 그게 사람이에요? 짐승이지?”
“…….”
“사람이 도와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 틀린 말은 아니네만, 세상일이 그렇게 원론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잖은가?”
“말은 바른 말이지, 거길 왜 우리가 지켜요. 원래는 무당 새끼들이랑 남궁 새끼들이 지켜야 하는 곳인데.”
“그들이 봉문 하지 않았는가…….”
“뭐 봉문이 벼슬인가? 봉문 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화산이 할 말은 아니지.”
백천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우리가 할 말은 아니잖니? 응?
하지만 청명은 신랄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럼 계속 하시든가.”
“응?”
“지금 화산에 지원을 해 달라는 거죠?”
“그렇……지?”
당군악의 얼굴에 불안이 어렸다.
그리고 과연…… 청명은 청명이었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무당 새끼들 대신에 장강 가서 싸울 일은 없으니까 당가도 발 빼시든가, 아니면 거기서 계속 그러고 계시든가!”
“…….”
“애초에 저 썩을 구파 새끼들이 해야 할 일을 왜 우리가 하는데요!”
“그래도 구파와 천우맹은 공식적이지는 않아도 나름 동맹 같은…….”
“동매애애애애앵?”
급기야 청명이 눈을 까뒤집었다.
그 희번덕대는 눈빛에 당군악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구파 새끼들이랑 동맹 맺느니 차라리 사파랑 붙어 먹지! 소림이고 무당이고 엿이나 처드시라 그래!”
“하하. 그럼 말이 나온 김에 녹림과…….”
“댁은 먹은 돈이나 뱉고!”
“아니! 안 먹었다고!”
발악하는 청명과 항변하는 임소병, 그리고 고뇌하는 당군악까지.
혼란이 지옥처럼 들끓는 광경 앞에, 현종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이 기분이었지.’
아……. 그냥 다시 첩첩산중으로 돌아가고 싶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