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3화. 잘 돌아왔네, 화산검협. (3)
쪼르륵.
술잔에 술이 차올랐다.
말없이 술병을 기울이던 청명은 건너편에 앉은 이를 흘끗 넘겨다보았다. 새하얀 삼베로 짧은 비도를 꼼꼼하게도 닦고 있는 이를.
“……칼 치워라. 술맛 떨어진다.”
“참나, 이런 전쟁통에 어디 술맛을 따지십니까? 먹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지.”
비도에 묻은 기름을 남김없이 닦아 낸 당보가 눈썹을 실룩였다. 누가 당가 아니랄까 봐 제 병기는 정말 완벽하게 관리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다고 날이 잘 드냐?”
“거, 모르면 말씀을 마십쇼. 도사 형님 같은 인간 백정이야 땅에 떨어진 검이고 뭐고 아무거나 주워서 슥슥 썰어 대지만, 저 같은 인종은 손에 딱 맞는 무기가 있어야 한다 이겁니다. 이게 얼마나 명품인데.”
“명품은 지랄.”
그러거나 말거나 당보는 열두 자루의 비도를 모조리 꼼꼼하게 손질했다. 깨끗하게 닦아 내고 흠집이 난 부분을 갈아 낸 후 새로 기름칠까지 마친 뒤에야 깨끗해진 비도를 제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술병을 들어 빈 청명의 잔을 채웠다.
“우리 도사 형님이 왜 또 기분이 나쁘실까.”
“…….”
“아니. 아니지. 항상 나쁘지. 음, 그렇지. 자연의 법칙 같은 거지.”
“이 새끼가?”
“자자, 한잔? 한잔?”
당보가 씨익 웃으며 잔을 들자 청명이 피식 웃고는 마주 잔을 들었다. 두 개의 잔이 허공에서 짧게 맞부딪혔다.
느릿하게 잔을 비운 청명은 건너편에 앉은 당보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제는 몇이나 죽었어?”
“한 스물?”
“……죽였냐가 아니라 죽었냐고.”
“다섯이요. 빌어처먹을 새끼들 나대지 말라니까…….”
당보가 짜증이 난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이끌고 나간 당가에서도 희생자가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조심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죽는 이가 어쩔 수 없이 생긴다.
“저 개자식들 요즘 따라 아주 미쳐 날뛰더라고요. 까딱했으면 제 모가지도 날아갔습니다.”
당보가 손날로 제 목을 슥슥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미친놈.”
청명은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아닌 농담이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도 저런 농담을 하지 않는다.
어제 같은 곳에 앉아 밥을 먹던 이의 자리가 오늘은 비어 있는 것을 눈짓만으로 넘기는 곳에서 죽음에 대한 농담은 가볍게 담기에 너무도 무겁고, 무겁게 논하기엔 깃털처럼 가벼우니까.
“정말 뒈질 뻔했다잖습니까. 주교 새끼랑 마주쳤거든요.”
“음.”
주교라는 말이 나오자 청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미 몇몇 주교가 그의 검에 목이 달아났지만, 주교라는 이름은 여전히 청명에게도 위협적이었다.
“제대로 붙은 건 아니라서 적당히 넘어가긴 했는데…….”
당보가 제 턱을 꾹꾹 눌러 댔다.
“제대로 붙었으면 제 목이 위험했겠죠. 빌어먹을, 내가 왜 당가에 태어나선.”
“네가 약한 거지, 왜 당가 핑계냐?”
“아이고오. 우리 도사 형님이 또 산에만 틀어박혀 사셔서 뭘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제가 약한 게 아니라 비도의 특성이 그런 겁니다. 이게 적당한 급까지는 어떻게 해보겠는데, 그 이상이 되면 비도로는 한계가 있다니까요?”
“네가 약한 거지.”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네가 약한 거야.”
“…….”
당보가 핏대 선 얼굴로 생글생글 웃었다.
“집에 갈 때 조심하십쇼. 눈먼 비도가 등짝에 박힐지도 모르니까.”
“그럼 눈먼 비도가 아니라, 눈먼 놈이 던진 비도가 되겠지.”
“에이. 빌어먹을.”
당보가 구시렁대며 앞에 놓인 추혼비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봐도 지금 저걸 청명의 이마에 냅다 꽂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여튼 그래서…… 뭔가 좀 쓸 만한 초식 같은 걸 하나 개발해 볼까 고민 중인데.”
“초식?”
“예. 저 엿 같은 주교 새끼들이나, 개 같은 천마 새끼 같은 놈들 조질 수 있는 초식 말이죠. 시커먼 옷, 시커어먼 옷 입고 다니는 새끼들. 아, 검 들고 다니는 새끼면 더 좋고.”
청명은 말없이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음, 시커멓네. 아주 시커메.
청명이 피식 웃었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하던 거나 잘해. 지금부터 초식 만들어서 언제 실전에서 써먹어? 저승에서는 한번 써 보겠네.”
“뭐 당장 쓸 건 아니니까요.”
“응?”
당보가 피식 웃는다.
“대충 실마리만 잡아 놓으면, 전쟁이 끝난 뒤에 느긋하게 만들어도 되고.”
“그때까지 살아 있을 자신은 있고?”
“아, 저 당보입니다. 저승사자 새끼들이 잡으러 오면 이마에 추혼비 꽂아 버리면 그만이죠.”
“미친놈.”
당보가 피식 웃었다.
살짝 묘한 얼굴로 제 손에 든 빈 잔을 가만 바라보던 당보가 술병을 잡아 제 잔에 술을 채웠다.
“만에 하나 제가 다 만들 수 없다고 해도…….”
가라앉은 목소리에 청명이 고개를 들어 당보를 보았다.
술잔을 들어 손에서 천천히 돌리던 당보가 잔에 든 술을 단숨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누군가는 이어 가겠죠. 당가의 피를 잇고, 십이비도를 익히는 누군가는.”
“…….”
“그렇게 되면 언젠가 나랑 같은 처지에 처하는 놈이 있다 해도, 저 같은 걱정은 안 할 것 아닙니까?”
“흐음…….”
답지 않게 생각이라는 걸 좀 했구나, 하고 말하려던 청명의 귓가에 살짝 짜증 섞인 당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적어도 내 후손들은 어디 풀도 없는 돌산에서 내려온 시커먼 도사 놈한테 맞고 다니지는 않겠지. 등짝에 추혼비를 그냥 콱…….”
스르릉.
“아! 거, 거! 술 먹는데 칼은 왜 뽑습니까, 칼은! 진짜 농담이 안 통하시는 양반이시네. 어디 산에서 도 닦다 오셨냐?”
“미친놈…….”
피식 웃은 청명이 검을 다시 밀어 넣고 술잔을 들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술이 유난히 썼다.
“그게 뭔 의미가 있다고.”
“예?”
“후손이니 뭐니…….”
음울하게 가라앉은 청명의 눈이 창밖으로 향했다. 해를 가린 먹구름이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 낼 것 같았다.
“살아남은 놈들 따위야 알 게 뭐냐. 당장 내가 내일까지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흐음. 뭐 그것도 맞는 말씀이죠.”
청명의 어둑한 시선이 당보에게로 돌아갔다.
“당가에서 내놓은 놈 취급받는 주제에 후손 생각까지 하는군.”
“누가 내놓은 놈입니까? 그놈들이 절 감당 못 하는 거지!”
“……감당 못 할 만도 하지.”
“그거 욕이죠?”
“칭찬이지.”
“욕이구만!”
당보가 이를 갈아 댔다. 그런 그를 보며 결국 청명이 피식 웃었다.
웃겨서 웃는다기보다는 웃을거리가 있으면 자꾸만 어떻게든 웃으려 했다.
이 지옥 같은 전장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사형제가 아닌 당보를 자꾸만 보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모를 놈이지.’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할 이유를 잃어 가는 이런 전장에서도 저리 소리 지르고 화내고 농을 하며 웃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그래도 그냥 그런 겁니다.”
“응?”
당보가 제 손에 들린 추혼비의 날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누군가는…….”
비도 날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는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짙은 음영이 진 얼굴엔 표정이랄 것이 금세 씻기고 없었다.
“이어 갈 누군가는 멍청한 앞 놈들이 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할 테니까요. 적어도 그놈들은 우리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하지만 그게 언제냐는 듯, 당보는 금세 얼굴에 드리웠던 수심을 지워 버리고 환히 웃었다.
“그놈들 옆에는 그래도 칼 하나는 귀신같이 쓰는, 재미없는 도사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지랄.”
“뭐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핏줄이라고, 예전에는 저 멍청한 놈들이 꼴도 보기 싫었는데, 한 살 한 살 나이 먹다 보니 걱정이 되긴 합니다.”
당보가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청명 역시 실없이 웃어 버리곤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았다.
‘이어 갈 누군가라…….’
멍청한 소리.
뭘 이어 간다는 말인가. 얼굴도 못 볼 사인데.
죽고 나서 벌어질 일 따위 알게 뭔가. 당장 얼굴을 맞대고 살던 이들의 목숨도 구하지 못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잃어 가기만 하는데.
“그런 걸 생각할 시간 있으면 한 놈이라도 더 죽여.”
“예?”
“실수할 일이 없으면 그만이지. 천마 새끼 모가지를 잘라 버리면, 적어도 네 후손들은 그놈과 싸울 일이 없겠지.”
“뭐……. 그도 맞는 말이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건 또 뭔 소립니까?”
청명이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그 개새끼의 목은 내가 따 줄 테니까.”
“그거 내 거라니까 자꾸만 그러시네.”
당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좋수다. 도사 형님이 천마 모가지를 따시면, 내가 선물 하나 드리지.”
“선물?”
“흠! 이 당보가 새로 만들 초식을 가장 먼저 견식 하게 해 드리지! 그날이 형님 등짝에 추혼비 꽂히는 날이고, 그날부로 내가 천하제일……. 아, 아니! 농담에 검 좀 뽑지 말라니까!”
“죽어, 이 새끼야!”
“으아아악! 도사가 사람 잡는다!”
호들갑에 엄살을 동시에 떨며 요란하게 굴던 당보가 어느 순간 청명이 날린 검기를 단번에 해소해 버리곤 웃었다.
“그날이 오면 소원이 없겠네.”
“……처마시기나 해.”
“받으쇼. 잔 채워 드릴 테니까.”
병 끝에서 흘러내린 술이 흰 잔을 천천히 채워 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 경쟁하듯 술을 넘겨 댔다. 메말라 버린 어딘가를 적시고 싶은 듯이.
밤과 함께 찾아온 비가 밤새도록 어제의 피비린내를 지워 낼 때까지, 두 사람은 그저 술을 마셨다.
* * *
눈을 뜬 청명이 멍한 얼굴로 천장을 보았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창을 뚫고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인가?’
새벽이 되면 절로 눈을 번쩍 뜨고 수련을 나가던 게 일상이건만……. 간만에 화산에 돌아왔더니 몇 년간 몸을 지배하고 있던 긴장이 풀려 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꿈을 꾼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른다.
“……그런 일이 있었지.”
그래. 잊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나눈 대화를 일일이 기억할 만큼 중요히 여기지 않았으니까. 아니, 중요한 줄 몰랐으니까.
“가장 먼저 견식이라…….”
청명이 피식 웃었다. 과거의 매화검존이 보이던 얼굴이다.
“멍청한 놈.”
그래. 그는 천마의 목을 베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한심한 형태로 그 목을 잘라 냈다.
그리고 당보 역시 그 약속을 지켰다.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형태로.
둘 다 실로 멍청하고 바보 같다.
그래서…….
청명은 시선을 다시 위로 올렸다. 그때 술자리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천장이다.
“……겪게 하지 않을 거라고 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애를 썼는데 또다시 그런 일이 반복될 거라면……. 대체 그때의 죽음들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대체 어떤…….
쾅!
그때 문이 격하게 열리며 익숙한 얼굴들이 방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왔다. 아니, 들어왔다기보단 엎질러졌다.
“으악! 뭐야, 씨바!”
천하의 청명도 그 순간만큼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악! 밀지 말랬잖습니까!”
“아니! 네가 안 비켜서 그런 거잖아!”
“좀 쉬게 해 주자고 했잖느냐! 비무가 그게 쉬운 게 아니었다니까!”
“왜 자는 사람을 깨우고 그래요!”
얽혀 엎어진 채로 옥신각신하는 오검을 보며 청명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는 이내 제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런 것들을 위해서…….’
당보야. 아무래도 개죽음 같지 않니? 응?
“……왜?”
청명이 힘없이 묻자 가장 밑에 깔려 있던 백천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했다. 그래 봐야 사질들에게 깔린 몰골이라 체통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지만.
“아니, 그…… 어제 비무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
“…….”
“아무리 생각해도 초식 운용이 이해가 안 가거든?”
“설명 좀 해 봐.”
“…….”
순간 말문이 막힌 청명이 멍하니 그들을 보다 물었다.
“겨우 그것 때문에 아침 댓바람부터 이리 몰려왔다고?”
“아침 댓바람이라니! 해 뜬 지가 언젠데!”
“또 미뤄 뒀다가 까먹으면 어떻게 하냐? 이런 건 바로바로 풀어야지.”
청명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두 눈을 반짝이고……. 아니, 희번덕대고 있는 저놈들을 보고 있자니 뭔가 잠깐이라도 우울해졌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운용?”
“응.”
“말해 주면 이해는 할 수 있고?”
“…….”
“아는 만큼 보이는 거지. 아는 만큼. 약해서 안 보이는 걸 어떻게 설명하리오. 원숭이에게 문자를 가르치는 꼴이로다.”
“개새끼…….”
“거보십쇼. 어차피 좋은 소리 못 듣는다고 했잖습니까!”
“카악! 퉤!”
요란한 반응이 쏟아져 나오니 청명은 고개를 내저으며 침상에서 빠져나왔다.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수련이나 해. 화산에 돌아왔다고 빠져서는.”
“너 말고는 다 했거든?”
“응?”
“네가 제일 빠졌어, 이 새끼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가려는 청명의 앞을 백천이 슬쩍 막아섰다. 청명이 뚱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왜?”
“확실히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 갈 것 같긴 해.”
“응?”
“하지만…….”
백천이 입가를 비틀었다.
“몸으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어때? 몸풀기로?”
청명은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가 도로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맞은 데는 이제 멀쩡한가 보지?”
“벌써 다 아물었다, 이 새끼야.”
백천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콧김이라도 뿜어낼 기세에, 청명은 웃어 버렸다.
“그래, 연무장에서 보자. 부러졌던 데 다시 예쁘게 부러뜨려 줄 테니까.”
“오냐.”
오검이 가타부타 말없이 밖으로 향했다. 가장 뒤에 있던 조걸이 백천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앞으로 짓쳐 달려 나갔다.
“내가 먼저!”
“아니, 이 새끼가? 야, 인마! 넌 위아래도 없냐!”
“화산에 그런 게 어딨습니까!”
“빈틈.”
“사매! 야! 유이설!”
청명은 그 자리에 선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들끼리 복닥대며 달려 나가는 오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꿈에서 들었던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이어 갈 누군가는 멍청한 앞 놈들이 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할 테니까요. 적어도 그놈들은 우리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명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을 보았다. 그때와는 달리 날이 참 맑았다.
“그래. 우리보단 낫네.”
너나 나 같은 멍청이들보다는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