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9화. 용이 되어 올 줄 알았더니. (4)
부서진 새하얀 청석과 황톳빛의 흙이 뒤섞인 바닥.
그 위로 세 줄기의 은빛 선이 가로지른다.
서로 다른 속도와 힘을 지닌 세 자루의 추혼비가 아름답다는 말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길 없는 선을 그려 내며 청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나는 정면으로, 다른 둘은 좌우로 크게 회전하며.
직선으로 날아드는 비도보다 선회하는 것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리하여 그 세 자루의 비도가 청명의 지척에 도달할 때쯤에는 거의 동시에…….
‘아니!’
파아아아앗!
청명이 암매검을 벼락처럼 휘둘러 좌우에서 날아드는 추혼비를 쳐 냈다.
콰앙!
콰아아아앙!
검과 비도가 맞부딪히는 순간 커다란 충격이 사방을 휩쓸었다.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리고 흙이 거꾸로 솟구쳤다.
파아아앗!
하지만 청명은 그 커다란 충격 속에서도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검을 앞으로 뻗었다. 검끝이 섬전처럼 정면에서 날아드는 추혼비를 향해 쇄도했다.
하나 그 순간.
쇄액!
직선으로 날아들던 비도가 청명의 검과 맞닿기 직전, 순간적으로 방향을 꺾어 내며 위로 솟구쳤다. 마치 바닥을 기던 독사가 먹이를 향해 그 머리를 치켜들고 솟아오르는 것처럼.
“헉!”
“저……!”
손에 땀을 쥐고 둘의 격전을 지켜보던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절로 헛숨 삼키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뒤섞여 나왔다.
횡으로 휘둘러진 검을 타 넘고 솟구친 비도는 금방이라도 청명의 얼굴을 꿰뚫어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청명이다.
누구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지만, 청명의 반응은 놀라울 만큼 빨랐다. 비도가 방향을 바꿈과 거의 동시에 그의 고개가 뒤로 격하게 젖혀졌다.
쇄애애액!
비도가 청명의 얼굴 바로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 피했…….’
그리고 그 순간 백천은 보았다.
빙글.
청명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비도가 허공에서 다시금 직각으로 방향을 꺾는 모습을 말이다.
“뭐……!”
이번만은 천하의 백천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청명마저도 당황했는지 두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파아아아아앗!
심지어 얼굴 근처에서 방향을 바꾸고 곧장 날아드니 피할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
카각!
하지만 청명에게는 몸보다 빠른 것이 있었다. 그의 검이 어느새 회수되어 날아드는 비도의 앞을 막아섰다.
카가가가각! 카가가각!
비도는 검면에 가로막히고도 힘을 잃지 않았다. 마치 검을 뚫어 내겠다는 것처럼 회전하며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카가가가각!
이내 옆으로 비틀린 비도가 청명의 얼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비도가 박히는 순간, 마치 포탄이 떨어진 것처럼 땅거죽이 뒤집히며 솟구쳤다.
“…….”
청명은 완전히 박살이 나 버린 바닥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뺨에 희미한 붉은 선이 새겨진다 싶더니, 이내 점점 선명하게 변해 갔다.
주르륵.
확연한 상처가 새겨진 뺨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 아저씨가?”
청명이 이를 으득 갈며 당군악을 노려보았다.
“……진짜 죽이려는 것 아닙니까?”
조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애초에 비도라는 건 한번 손끝에서 발출되면 쉽게 회수할 수 없는 무기다. 다시 말하자면 검과는 다르게 비도가 상대의 심장에 파고들 지경이 되어도 멈출 수가 없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비도술을 쓰는 이나 암기를 쓰는 이들은 비무를 할 때, 최대한 상대의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비무가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생사결로 화하기 전에.
하지만 지금 당군악이 발출한 비도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목숨을 반드시 빼앗고 말겠다는 필사의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상대가 청명이가 아니었다면 분명 죽었을 겁니다.”
한번 피해 낸 비도가 얼굴 앞에서 방향을 꺾으며 다시 날아든다? 조걸이 같은 경우를 당했다면 제대로 대처해 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알고 있다면 대처할 수 있지만, 모르고 있다면 당할 수밖에 없는 수. 세상은 그런 공격을 ‘살수(殺手)’라 부르지 않는가?
그 말인즉, 지금 당군악이 비무 시작과 동시에 살수를 난발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사숙.”
“그냥 지켜봐라.”
하지만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백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살수를 쓴다 해서 꼭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 가지 보장만 있으면 아무리 써도 상관없지.”
“보장이요?”
“그래.”
백천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상대가 반드시 피해 없이 막아 낼 수 있으리란 확신.”
“…….”
그 말에 조걸이 입을 다문다.
백천은 한숨을 쉬며 당군악과 청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신뢰로군.’
그는 그들을 단련시키는 청명이 오히려 그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강해지는 불가해한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그렇기에 청명의 강함에 한 점 의심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당군악은 어떻게 확신하는 것일까?
청명이 생각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강해져 돌아왔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단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이 날아갈 만한 살수를 시작부터 뿌려 대지는 못했을 텐데.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네요.”
“응?”
백천이 슬쩍 유이설을 돌아보았다.
항상 무표정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힘든 그의 사매가 시선을 앞의 두 사람에게 고정한 채 가볍게 중얼거렸다.
“실망시킬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백천의 입가가 슬그머니 말려 올라갔다.
“그건 분명하지.”
그는 뺨에 흐른 피를 가볍게 훔치는 청명을 바라보았다.
“장담하건대, 이 정도로는 저 미친놈을 막을 수 없어.”
목소리에 확신과 신뢰가 그득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귓가에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독?”
“…….”
“도오오옥? 아니, 이 양반이 비무에 독을 써? 억! 핑 돈다! 어억!”
“…….”
청명이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백천의 얼굴빛이 살짝 바랬다. 조걸과 윤종이 뚱한 얼굴로 그런 그를 돌아보았다.
“……장담이요?”
“…….”
“거 장담하다가 피 보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신데 아직도 그렇게 경솔하게…….”
“…….”
백천은 그저 말없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치이이익.
손끝을 타고 떨어진 피가 단단한 청석을 녹이자 새하얀 증기가 올라왔다. 피에 섞여 나온 독이 말도 안 되는 극독이라는 의미다.
청명이 황당함을 한껏 싣고 당군악을 노려보았다.
“도오오오옥?”
“뭘 새삼스럽게.”
당군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억!”
청명은 뻣뻣해져 오는 뒷목을 움켜잡았다.
“아니, 후기지수랑 비무 하면서 독을 쓴다고? 독을? 그것도 이런 극독을?”
“내 굳이 이런 말 안 하려 했네만…….”
“뭘요?”
“자네가 자네 입으로 후기지수라는 말을 하는 건 좀 민망하지 않은가? 양심이 있어야지.”
“…….”
청명이 입을 쩌억 벌렸다.
지금 비무에서 극독을 쓴 사람이 그에게 양심을 논한 건가?
이건 아무리 선도에 전념해 신선 같은 마음씨를 가진 청명이라고 해도 묵과할 수…….
- 아, 개소리 작작 하라고!
아, 댁이나 좀 조용히 하라고, 좀! 위패에 아교 발라 놓은 거 다 뜯어 버릴까 보다.
치이이이익.
바닥이 여전히 타들어 가는 모습을 본 청명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그렇게까지 이기시겠다?”
“꼭 그런 마음은 아닐세. 다만…….”
당군악이 빙그레 웃는다.
“자네의 실력을 모두 끌어내기에는 내 실력이 일천하니 별수 있는가? 사용할 수 있는 수는 모두 쓰는 수밖에.”
“……독은 이제 안 쓰는 것 아니었어요? 고수들 싸움에는 별 소용이 없다니까?”
“그 말은 틀린 소리일세.”
“네?”
당군악이 차가운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았다.
“물론 독으로 자네 정도 되는 이를 쓰러뜨리는 건 힘든 일이지. 하지만 적어도 독을 억제하는 데 내력을 낭비하게 할 수 있고, 부상이 깊어지면 독이 발작하게 만들 수도 있지.”
“…….”
“단 일 할. 아니, 단 일 푼이라도 유리해질 수 있다면 사용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어?”
“내력을 펑펑 써서 독기를 몰아내야 하는 자네와, 그냥 싸우기 전에 적당히 암기에 독을 발라 두면 그만인 나 중에 누가 더 유리할지는 뻔하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그럼 당보 그 새끼는 왜 전쟁 중에 독을 안 썼지? 등신인가?
그때 청명의 머릿속에 과거 당보와 나누었던 대화가 스쳤다.
- 근데 너는 왜 독을 안 쓰냐?
- 아니, 이 답답한 양반아! 독이 있어야 쓰지!
- 가문에서 내놓은 놈이라고 독도 안 주는 모양이지?
- 참나, 독이 무슨 땅 파면 나오는 줄 아시나? 당문에 쌓아 놓은 독이 다 떨어진 지가 언젠데요! 그 독 다시 만들 시간이 어딨습니까! 독 만들려고 뒤로 빠지면 다 뒈질 텐데.
- 무능한 새끼.
- 말조심하쇼. 내 비도에 바를 독만 있으면 도사 형님도 한 방이요, 한 방……. 하하하. 거…… 말로 합시다. 검은 뽑지 마시고. 사람이 화산에서 풀만 먹고 살아서 그런가. 도통 농담을 모르시……. 히이이익!
아……. 등신은 나였고요.
“어억!”
순간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낀 청명이 재빨리 내력을 돌려 독기를 억제했다.
맑디맑은 청명 특유의 선기(仙氣)가 독기를 순식간에 중화했다.
그제야 숨을 돌린 청명은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검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나오시면 나도 가만 못 있어요.”
“아니.”
당군악이 고개를 저었다.
“겨우 이 정도가 아니지.”
당군악의 두 손이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우수에는 추혼비, 좌수에는 얇디얇은 세침이 빽빽하게 들려 나온다.
비도의 날이 햇살을 받아 옅은 녹색으로 빛났다.
새삼 당군악이 진심으로 해볼 생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은 청명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물론 나는 자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할 생각이네. 하지만 자네 역시 한 가지를 알아 둬야겠지.”
“……한 가지?”
“내가 누구인지.”
당군악의 위압감 서린 목소리가 청명을 짓눌렀다.
“자네와 함께 싸울 이가 누구인지. 독왕 당군악이 누구인지 말일세.”
당군악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녹빛 장포가 크게 부풀며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가 뿜어내는 투기가 청명의 신경을 있는 대로 긁어 댔다.
청명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얼굴이 마치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진짜…….”
꾸우우욱!
암매검을 움켜잡은 청명의 몸에서도 이내 폭풍과 같은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자꾸 마음에 드는 소리만 하시는군!”
쾅!
그 순간 당군악이 진각을 밟으며 다섯 자루의 비도를 발출했다. 선연한 색을 담고 발출된 다섯 자루의 비도는 마치 서로 얽혀 들듯 회전하며 청명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하핫!”
청명은 경쾌한 목소리를 터뜨리며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비도를 향해 되레 달려들었다.
파아아아앗!
노을처럼 붉은 검기를 뿜어낸 청명의 검이 날아오는 다섯 자루의 비도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 뻗어진 검이 사방으로 분열하며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는 비도들을 모조리 쳐 냈다.
콰콰쾅!
터져 나오는 폭음! 비산하는 비도!
하지만 곧이어 청명을 반긴 것은 그 짧은 순간 머리 위를 뿌옇게 뒤덮은 모래 먼지였다.
‘단혼사(斷魂沙).’
극독을 머금은 모래가 흩뿌려지고, 전방에선 수백 개의 세침들이 쏟아진다. 심지어 단혼사의 사이사이엔 거무튀튀한 표창들이 뒤섞여 있었다.
‘귀왕령(鬼王令)!’
오로지 당가의 적에게만 사용된다는 악독한 암기들이 청명의 전신을 뒤덮어 왔다.
그 순간, 청명의 검이 파르르 떨리며 온당히 화산에 있어야 할 것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붉디붉은 매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