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8화. 용이 되어 올 줄 알았더니. (3)
“다짜고짜?”
“와, 이거…….”
화산의 제자들이 뒤로 우르르 물러났다.
저 청명과 당군악이 맞붙는다면, 목숨을 건 생사결이 아닌 비무일지라도 그 여파를 감당하기 어려울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휩쓸리는 것에 대한 우려와 동시에 그들의 눈엔 분명한 기대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당군악.
이제 화산에는 너무도 친숙해졌기에 오히려 그 위엄을 실감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는 저 오대세가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사천당가의 가주다.
강호에서 가진 입지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사천당가의 가주라는 직위보다 오히려 더 강력한 것이 당군악이라는 이름 석 자가 가지는 무게감이다.
독왕 당군악.
그 이름은 결코 장강에서 신위를 보이던 구파일방의 수좌들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평가받는 면도 있다.
그런 이가 지금 저 청명의 앞에서 기세를 숨기지 않고 내뿜는 것이다.
아무리 청명이 화산검협이라 불리며 강호의 후대를 이끌어 갈 재목으로 평가받는다고는 하지만 아직 감히 당군악에 비견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 기묘한 대치를 지켜보는 화산의 제자들 중 누구도 청명을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그저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 승부의 결과를 기대할 뿐.
그들의 눈에 어려 있는 것은 그저 청명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었다.
‘감회가 새롭군.’
꽉 다문 백천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마주 선 청명과 당군악의 모습이 과거 그가 보았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조걸의 집에서 마주했던 두 사람. 그리고 이루어졌던 십 초의 비무.
그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다만 백천은 안다. 당시의 비무는 제대로 된 비무라 부를 수 없었다는 것을. 당패가 비무 중간에 끼어들어 승부를 망쳐 놓기도 했지만, 애초에 십 초를 막아 내기만 하면 승리로 인정해 준다는 규칙을 정해 두고 시작한 비무였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그때와는 달리 어떤 조건도 없이 서로 마주 섰다.
“……너무 급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장문인도 계시는데.”
윤종이 조금 떨떠름한 어투로 말하자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장문인께서도 이해하실 거다.”
“하지만…… 친한 사이일수록 오히려 더 예의를 지켜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다짜고짜 비무라니.”
“네 말도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백천이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또렷하게 말했다.
“때로는 있는 법이지. 굳이 예의 같은 게 필요하지 않은 사이가 말이다.”
흐르는 공기가 손끝에 와 닿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 감각을 통해 자신의 집중도가 최고조에 올랐음을 확신한 당군악은 건너편에 선 청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절로 말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진정시켰다.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로군.’
사천에서 청명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어린 검수와 이리 거창한 비무를 벌이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의 기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내는 청명을 보고 있으니, 뿌듯함과 동시에 호승심이 치솟았다.
강해졌을 것이다.
거기엔 의심의 여지도 없다.
저 어린 검수는 언제나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을 해 왔으니까. 그러니 지난 삼 년간 당연히 그의 예상을 깨부술 정도로 강해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알고 싶었다.
그의 어린 친우가 대체 얼마나 강해졌는지. 그의 강함에 아직 당군악의 손이 닿을 수 있는지 말이다.
한없이 솟구친 집중력이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당기는 바로 그때였다.
“아, 무서워라.”
“…….”
잔뜩 기운을 끌어 올린 그와는 달리, 청명은 느슨하게 풀린 자세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무섭게 구실 것까지는 없잖아요. 그래 봐야 비무인데.”
“……그래 봐야?”
“네. 그래 봐야.”
여유를 잃지 않고 말하는 청명을 빤히 바라보던 당군악이 슬쩍 웃었다.
“하나 묻겠는데.”
“……네?”
“내 앞에서 그런 방자함을 보이고도 살아 있는 이가 있을 것 같은가?”
“…….”
청명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이내 그 커진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려 냈다.
청명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네.”
“……뭐라고?”
“있겠죠. 뭐 한 사람쯤 없겠어요?”
“…….”
“아니면 내가 처음이어도 되고.”
그 짧은 대화가 끝나는 순간 청명과 당군악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지금 그들이 나눈 대화는 과거 사해상회에서 청명과 당군악이 처음 마주했을 때 나눴던 대화다.
그래. 확실히 청명은 그 말대로 당군악에게 방자하게 굴고도 살아남았고, 심지어는 그의 친구가 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번에도 십 초만 하실래요?”
“……백 초로도 부족할 것 같은데.”
“거 당가주쯤 되시는 분이 엄살이 너무 심하신 것 같은데.”
“당가의 가주니까 자존심상 천 초라고는 말 못 한 거네.”
“……그새 많이 소탈해지셨네요.”
“누구 덕분에.”
당군악이 옅게 웃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천 초를 줘도 부족할 것 같았다. 아까부터 계속 기세를 끌어 올려 청명을 짓누르려 시도하고 있지만, 도무지 청명의 기운이 잡히질 않는다.
‘흐르는 물을 내리치는 기분이로군.’
알고 싶다.
지난 장강에서의 격전.
청명은 저 장일소와 맞서고도 살아남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강호를 뒤흔들 명성을 얻어 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청명도 알고 있는 것. 장일소에게 맞설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가 장일소와 동등한 수준의 강자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때의 청명이 아닌 지금의 청명은?
지금의 청명은 저 장일소와 사패련을 상대할 만한 힘을 손에 넣었는가?
‘확인해 보면 알겠지.’
당군악의 소매에서 한 자루의 비도가 뽑혀 나왔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비도를 끼운 당군악의 몸에서 예리하게 벼려진 명검과도 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스르르릉.
청명이 천천히 암향매화검을 뽑아 들었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검을 아래를 향해 쥔 채 자세를 잡았다.
힘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자세. 하지만 이 모습을 본 순간, 당군악은 이상하게도 숨이 막혀 왔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하단세일 뿐이다. 하지만 분명 지금껏 당군악이 봐 온 자세와는 달랐다. 대체 뭐가 다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다르다.
당군악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였다.
‘조심하게’라는 말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의 앞에 선 이는 굳이 그런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꾸우욱.
당군악의 손가락이 사이에 끼운 비도를 부러뜨릴 듯 움켜잡았다.
한때, 당보가 사용하던 애병 추혼비.
단전에서 솟구친 내력이 주입되는 순간 추혼비가 우웅 하고 커다란 검명(劒鳴)을 터뜨렸다.
당군악의 청명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팽그르르.
뜬금없이 당군악의 손에 들려 있던 추혼비가 허공에 나타났다.
파아아아아앙! 채애애애앵!
그와 동시에 두 종류의 굉음이 터지며 사방을 울렸다.
곽회가 두 눈을 부릅떴다.
‘뭐지?’
분명히 바로 앞에서 지켜보았음에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두 사람이 서로 대치하다가…… 갑자기 비도가 위에서 나타나더니 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처음과 달라진 것은 두 가지.
손을 앞으로 내민 당군악과 아래로 내렸던 검을 사선으로 들고 있는 청명의 모습뿐이었다.
“아, 아니…….”
도통 이해하지 못하여 혼란을 느낀 곽회의 귀에 구원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쳤네.”
“빨라.”
“살다 살다 이런 걸 다 보네.”
시선을 돌려 보니 백천과 유이설, 그리고 조걸이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그들은 뭔가를 이해한 것 같다는 생각에 곽회가 물었다.
“뭐, 뭔 일이 벌어진 겁니까?”
“그냥 뻔한 일.”
“예?”
백천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공격하는 쪽은 비도를 날렸고, 방어하는 쪽은 막아 낸 것뿐이야.”
“아, 아니…….”
“다만.”
백천이 살짝 입술을 짓씹더니 말했다.
“그 과정이 너무 빨라서 소리가 뒤늦게 따라온 거지.”
“…….”
“간단하지?”
‘더 모르겠는데요?’
곽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러니까…… 지금 그의 눈앞에서 당군악이 비도를 날렸고, 청명이 그걸 쳐서 위로 튕겨 냈는데 그 과정이 너무도 빨라서 그의 눈에는 비도가 허공에 떠 있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건가?
‘뭔 이런 대결이?’
곽회 역시 지옥과 같은 수련을 통해 커다란 자신감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진 이 일수는 그가 힘겹게 쌓아 올린 자신감을 단숨에 무너트렸다.
격이 다르다. 그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광경이 있을까?
“곽회.”
“예? 아……. 예! 사숙!”
“지금 대결을 한순간도 놓치지 마라.”
“…….”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야.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알겠습니다.”
황망함에 잠겨 있던 곽회와 화산의 제자들이 그 말에 다시 눈을 부릅떴다.
“흐음.”
청명이 검을 가볍게 털어 냈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통증이 미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독왕이라는 이름이 조금 무색해지는 것 같은데요?”
턱.
허공에서 회전하는 추혼비를 회수한 당군악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 덕분에.”
“쯧. 이거 너무 많이 퍼 줬는데.”
청명이 고소를 머금었다.
물론 그도 안다. 과거 당군악이 그와의 비무에서 전력을 다했을 리는 없다는 것을. 당군악처럼 자부심 넘치는 무인이 후기지수에게 전력을 다한 절초를 뿌린다는 건 치욕스러운 일이니까.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지금 이 비도에 실린 힘과 속도는 과거의 당군악을 아득하게 추월하고 있었다.
‘옛 생각이 날 정도로군.’
당보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게끔 만드는 일 수다.
그리고 이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과거 청명이 당가를 방문한 이후, 당군악이 독이 아닌 비도에만 파고들었다는 뜻. 그 몇 년 동안 조금의 안일함도 없이 자신을 끝없이 갈고닦아 왔다는 의미다.
독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해 내기 위해서.
“……쉽지 않았을 텐데.”
본디 근본을 바꾼다는 건 평범한 수련을 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당군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화산뿐만은 아닐세.”
“……네?”
의미 모를 말에 청명이 고개를 갸웃하자, 당군악이 담담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 모든 것을 추월해 달리는 화산의 입장에서야 다른 모든 것들이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
“…….”
“하지만 우리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화산의 발전을 지켜보고만 있는 건 아닐세. 느리지만 한 걸음씩 확실하게 나아가고 있지.”
당군악이 비도를 움켜잡았다.
“그러니 아직은 앞을 내어 줄 생각 같은 건 없네. 사패련을 무너뜨리는 건 자네가 아니라 내 역할이니까.”
청명의 입술이 실룩였다.
기꺼움과 반가움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누르느라 지은 표정이었다.
- 천마 새끼 모가지는 내가 딴다고 했잖습니까! 도사 형님은 그냥 뒤에서 구경이나 하시라니까요!
“하여튼…….”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걸까?
청명이 검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지금 당군악이 한 말은 한 사람의 무인이자, 동료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말이다.
그렇다면…….
입가를 뒤튼 청명이 검을 꽉 움켜잡았다. 검 끝에 매달린 녹색의 수실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도 무인이자 동료로서 증명해야 한다. 그가 보낸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파아아앗!
그 순간 당군악이 던진 비도가 세 줄기의 빛살이 되어 청명에게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