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6화. 용이 되어 올 줄 알았더니. (1)
은하상단 내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화산파가 돌아간다는 말을 들은 서안 문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배웅하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직접 오시었소?”
“크흠.”
태평문주 단병립의 물음에 서월문주 남자명이 크게 헛기침했다.
짐짓 안색을 정제하고는 근엄한 어투로 말했다.
“소속이 다르다고는 하나, 사람이라면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는 법 아니겠소? 화산에 은혜를 입었으니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그런 것치고는 손에 든 것이 많구려?”
“……그냥 성의 표시요.”
“성의 표시 두 번 하셨다가는 기둥뿌리까지 뽑아 오시겠는데? 서월문이 그렇게 돈이 많은 줄 내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그려.”
“그, 그런데 이 사람이!”
남자명이 눈을 부라리자 단병립이 고소를 머금으며 슬쩍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살짝 놀리기는 했지만, 사실 그 역시 남자명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
서안의 문파들뿐만 아니라 서안의 사람들까지 모두 화산의 은혜를 입었다.
그 사파 놈들이 서안으로 오는 길에 죄 없는 양민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서안의 모두가 안다. 화산이 오지 않았으면 서안 역시 그와 똑같은 일을 당했으리란 걸 모두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화산에 대한 서안 사람들의 호감은 끝을 모를 만큼 치솟았다. 삼 년 전, 장강에서 섬서의 자존심을 지켰던 화산이 이번에는 그들의 목숨을 구했으니 기꺼워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이 말인즉슨…….
‘이제 서안에서 장사를 해 먹으려면 화산의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거지.’
지금 있는 제자들이야 지킬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는 아니다. 굳이 화영문과 화산의 다른 속가들을 두고, 종남의 속가에 들려는 이가 있겠는가?
민심은 때로 가혹할 만큼 냉정하다.
이제 저자의 아이들은 막대기를 휘두르며 천하삼십육검을 논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입에서 매화검법이라는 말이 나와 버린 이상, 서안의 민심은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
종남이 봉문을 풀고 나온다고 해도 이 흐름을 뒤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종남 속가의 대표격인 남자명도 당연히 속이 복잡할 터였다.
‘깔끔하게 화산으로 갈아타자니 종남과의 인연이 걸릴 것이고, 그렇다고 종남의 속가로 남자니 문파가 망할 판이고.’
제자가 들지 않는 무관이란 손님이 찾지 않는 상점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반면에…….
“안녕하십니까!”
“오오. 소문주시구려!”
“허허. 겨우 며칠 못 뵈었을 뿐인데, 그새 더 헌앙해지신 것 같소이다.”
저쪽은 말 그대로 대박이 터졌다.
화영문을 이끌고 온 위소행에게 다들 말을 못 건네서 안달이었다. 문주도 아닌 소문주에게 저리 저자세로 나온다는 것이 지금 화영문이 서안에서 가진 입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당연하겠지. 그 화영문이니까.’
화영문은 단순한 화산의 속가가 아니다. 강호의 모두가 화산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때에도 그 곁을 꿋꿋하게 지킨 진정한 친구다.
원래 어려울 때 곁을 지킨 친구는 좋을 때 만난 친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융숭한 대접을 받는 법.
화산이 화영문을 얼마나 각별하게 여길지 아는 이들은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서안이 참 많이도 바뀌었구나.’
아니. 바뀐 것은 서안만이 아닐 것이다.
이제 화산이 돌아왔으니 강호도 당연히 긴장해야 할 것이다.
화산이 삼 년의 봉문에 들어가기 전에도 그 행보 하나하나가 강호에 돌풍을 불러왔었다. 그런데 삼 년의 봉문으로 그 실력이 말도 안 되게 일취월장한 이들이 얼마나 큰 폭풍이 될지야 안 봐도 뻔한 것 아니겠는가?
그때였다.
“나온다!”
“화산 분들이 나오십니다!”
누군가가 외치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과연, 화산의 검수들이 열을 맞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 양을 보던 이들의 눈에 순간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일전에 이곳에서 전투를 치렀을 때, 그들은 화산의 검수들이 내뿜던 살기와 칼날 같은 예기에 전율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적당한 여유로움과 부드러움.
‘종남 같구나.’
‘아니, 종남보다 훨씬 더 여유가 엿보이는 것 같은데?’
‘이제 정말 화산이 대문파의 품격을 갖추었구나.’
사람을 우러르게 하는 것은 실력만이 아니다. 새삼 화산에 감탄한 이들이 저마다 입을 열어 선두에 선 현종에게 인사를 건넸다.
“장문인! 화산으로 돌아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장문인과 화산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도 화산에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니 서안에도 종종 들러 주십시오.”
빽빽하게 모인 이들을 보고 살짝 놀랐던 현종이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거늘, 이리 환송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서월문주 남자명이 앞으로 나와 현종에게 고개를 숙였다.
“서안을 구원해 주신 점, 감히 서안의 문파들과 양민들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진즉에 찾아와 감사를 드렸어야 하는 일인데.”
“이러지 마십시오, 문주님.”
현종이 남자명의 손을 꽉 잡았다.
“서로 남이 아니거늘, 이리 과한 예를 표하시면 제가 민망해집니다.”
“장문인…….”
남이 아니라는 말에 남자명이 멍한 얼굴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서월문도 화산과 친구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꼭 화산의 속가여야 친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종남의 속가도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현종이 빙긋 웃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아. 그럼 종남도…….”
“…….”
그 말엔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남자명의 눈치가 위험신호를 보냈다.
게다가 현종의 뒤쪽에 선 화산파의 제자들도 일제히 ‘종남은 아니지, 종남은! 이 양반아!’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제가 생각이 짧아 말이 헛나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장문인.”
“별말씀을.”
그때 옆에 있던 단병립이 재빨리 남자명을 밀어 내며 물었다.
“친우라 하셨지요, 장문인?”
“예, 그렇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단병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화산이 서안을 지켰다고 하시지만, 그건 틀린 말입니다.”
“……예?”
“여러분들께서 먼저 목숨을 걸고 사파를 막지 않았더라면 화산이 도착해서도 그 피해를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처했을 것입니다.”
“…….”
“정말로 훌륭하셨습니다.”
단병립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별말씀을.”
현종이 가볍게 포권 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나, 저희 역시 본문을 너무 오래 방치해 둔 터라.”
“예, 예! 공사가 다망하신데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한마디씩 하고 싶어 애달았던 문주들이 이내 체념하고는 길을 터 주었다.
한 사람을 빼놓고 말이다.
“도장님!”
위소행이 뒤쪽에 있는 청명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하지만 청명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돌리지 않았다.
“청명 도장님?”
그리고 의아해하는 위소행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턱짓으로 멀어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을 본 위소행이 알 만하다는 투로 말했다.
“……또 사고 치셨어요?”
“…….”
“거…… 며칠이나 되셨다고.”
그때 현종이 획 뒤를 돌아보자 청명이 크게 움찔했다.
“소문주가 묻지 않느냐. 신경 쓰지 말고 대답하거라.”
“그래도 돼요?”
“……에잉.”
더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현종이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그제야 청명이 시시덕거리며 위소행을 보았다.
“왜?”
“도장님! 시간 날 때 화산으로 찾아가도 될까요?”
“별 상관은 없는데…… 글쎄, 모르겠다. 우리가 화산에 얼마나 있을지.”
“예?”
“이제 좀 바빠질 거거든.”
청명이 씨익 웃었다.
“뭐 빠지게 수련했으니, 이게 칼 좀 휘둘러야지. 안 그러면 억울하잖아?”
청명의 얼굴에 떠오른 자신감을 본 위소행은 홀린 듯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장님. 그럼 방해 안 할게요.”
“방해는 아니고.”
청명이 위소행의 머리에 손을 턱하고 올렸다.
“속가 역시 화산이야.”
“…….”
“화산이 노력해서 강해진 만큼, 당연히 화영문도 강해져야지. 화산으로 돌아가면 최대한 빨리 방법을 정립해서 화영문도 수련을 할 수 있도록 할 거야.”
“그럼 제가 도장께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넌 이미 잘하고 있어.”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뒤에 있는 사형들에 비하면 너는 어른이지, 어른.”
“근데 저 새끼가?”
“야. 내가 그 말을 부정하는 건 아닌데,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원성이 빗발쳤지만 청명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위소행에게 말했다.
“곧 화영문도 피할 수 없을 만큼 큰 전쟁이 다가올 거다. 그 전쟁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실력이야. 그러니 수련을 게을리하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청명이 피식 웃고는 위소행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문주님께 안부 전해 드리고.”
“예.”
청명이 위소행을 다독이는 모습을 보던 조걸이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새끼 왜 저렇게 자상합니까?”
그러자 백천이 태연하게 대답한다.
“잘 모르는 모양인데, 애들한테는 은근 착하다.”
“예?”
“나이 어린 애들에게는 잘해 준다고. 예전에 북해에서도 그랬잖아.”
“그럼 저희는요?”
“응? 뭐가?”
“저 새끼랑 우리랑 처음 만났을 때, 저희도 애였는데, 저 새끼는 저를 보자마자 턱주가리 올려 쳐서 천장에 박아 버렸는데요?”
백천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걸아.”
“예?”
“일단 그땐 저놈도 애였다. 심지어 너보다 어린.”
하나하나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 목소리가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다 떠나서 말이다.”
“…….”
“너한테는 그래도 된다.”
“…….”
“저놈은 정확하게는 사람 같은 애들한테는 약한 거지.”
“그럼 저는 뭐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 하냐?”
무어라 항변하려던 조걸은 순간 조용히 입을 닫았다. 옆에서 윤종이 ‘제발 한마디만 더 해서 내가 말 좀 할 수 있게 해 다오.’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도장님. 살펴 가십시오!”
“그래.”
위소행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화영문도들이 그를 중심으로 도열했다.
“화산파의 강녕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일제히 포권 하여 화산을 배웅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문파들 역시 일사불란하게 도열하여 화산에 예를 표했다.
현종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일일이 마주 포권 하며 그 인사를 받았다.
“모두 강녕하십시오.”
화산이 대문 밖으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양민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그 환호 속으로 걸어가는 화산파를 보며 서안 문파의 문도들은 어쩐지 감회가 새로운 느낌에 전율했다.
“단 문주.”
“예, 남 문주님.”
“아까 장문인께서 말씀하신 친구라는 게 어떤 의미요? 단 문주는 짐작 가는 바가 있는 것 같았는데.”
남자명의 물음에 단병립이 미소를 지었다.
“장문인께서는 천우맹을 말씀하신 겁니다.”
“천우맹? 아……. 친우라. 그래. 그렇구려.”
종남의 속가이든 어디든, 천우맹에 드는 이들은 모두가 화산의 친구라는 의미다.
“……그럼 바로 움직여야겠군.”
“가입하실 겁니까?”
“먹고살려면 별도리가 있겠냐고 대답하고 싶지만…….”
남자명이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나도 한번 저 화산의 친구라는 것이 되어 보고 싶소이다.”
“종남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을 말 같습니다.”
“자식의 모든 친우를 부모가 달가워할 순 없는 법이니, 이해하실 거요.”
남자명은 ‘이해 못 해도 별수 없고.’라는 말을 슬쩍 삼켰다. 그 둘의 대화를 들은 서안 문파의 문주들이 저마다 결심을 굳힌 얼굴로 멀어지는 화산파를 보았다.
그리고 뒤쪽에서 이 모든 상황을 보던 황종의는 빙그레 웃었다.
“이제 할 일이 많아지겠구나.”
하지만 더는 해야 할 일이 힘겹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환대 속에서 성문을 빠져나온 화산의 제자들이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진이 다 빠지네.”
“뭔 사람이 저렇게 많지?”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을 때는 짐짓 침착한 검수의 모습을 위장하던 이들이, 타인의 눈이 사라지자마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깨에 힘준다고 담 올 뻔했어.”
“눈을 너무 뜨고 있었더니 뻑뻑하다 못해 따갑습니다.”
“그래도 뭘 어쩝니까. 저렇게 좋아해 주시는데.”
힘들다며 툴툴대고는 있지만 정작 기분이 나쁜 기색은 아니다. 오히려 이 상황 자체가 즐거운지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현종이 넌지시 물었다.
“그리 고되면 좀 쉬었다 가겠느냐?”
“아닙니다!”
“빨리 가시지요, 장문인!”
“시간을 너무 지체했습니다! 해 떨어지기 전에는 도착해야지요!”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소리쳤다.
“녀석들.”
다들 마음은 같을 것이다.
아직 긴 수련에서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먼 길을 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모두가 한달음에 화음으로 달려갈 듯 발을 구르고 있다.
‘그리도 그리울까.’
화산 제자들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척박하게 솟아오른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 곳.
그들이 떠나온 화산으로.
“그럼 가 보자꾸나!”
“예!”
화산의 제자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작은 흥분과 깊은 그리움을 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