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5화. 얻지 못할 바에는 죽는 게 낫지. (5)
“흐음.”
숨을 길게 내쉰 청명이 뺨을 가볍게 긁적였다.
“……일단은 놀고먹을 생각이었는데.”
“장난치지 말고.”
“진짠데.”
“…….”
백천이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경멸을 담아 바라보자 청명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뭘 또 그렇게 봐. 그건 내가 정하는 게 아니잖아.”
“응?”
“저 새끼들이 정하는 거지.”
청명이 말하는 ‘저 새끼들’이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모를 이는 없었다.
“……사패련.”
“그래.”
백천이 앓듯 말하자 청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하다만…….”
윤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홍 분타주님의 말대로라면 사패련 역시 내환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잖느냐.”
“그럴 일은 없어.”
“응?”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분명 내분이 벌어질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것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런 걸로 발목을 잡힐 놈이 아니니까.”
모두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신주오패의 수장들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 역시 알고 있다. 이미 장강에서 그들이 가진 힘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천하를 호령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았던 이들이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압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장일소가 그들에게 발목을 잡힐까?’
설령 발목이 잡힌다 해도, 거기서 시간을 지체할 인간이 아니다. 장일소는 제 발목을 잘라 내고 가던 길을 갈 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백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주오패의 수장들을 쉽게 보아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이상으로 장일소의 존재감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나온 결론이다.
“확실히 장일소라면…….”
고개를 끄덕인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리고, 생각해 봐. 우리도 알고 개방도 알고 정파라면 다 아는 사실을, 그 장일소가 모를까?”
“……당연히 알겠지.”
“그래. 알고 있겠지. 안다면 대비할 거야. 내가 할 생각을 그놈이 안 할 리가 없지.”
백천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청명이 강호에 존재하는 어떤 이들보다 장일소를 증오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듣다 보면, 어쩌면 청명이 세상에서 가장 인정하는 이 역시 장일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금 짜증 날 정도군.’
누가 저 망할 놈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이미 움직이기도 했고.”
“응? 그건 무슨 소리냐?”
조걸의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이번에 저 사파 놈들이 섬서로 쳐들어온 게 과연 우연일까?”
“……그것도 장일소가 의도했단 거냐?”
윤종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나간 생각인 것 같다. 그 강서칠살인가 하는 놈들을 신문해 보았지만, 갈천립은 사패련과 관계가 없었어. 그리고 애초에 그놈은 장일소의 말을 들을 놈도 아니야.”
청명이 그런 윤종을 가만 뚫어져라 보다 고개를 저었다.
“사형.”
“응?”
“사형은 다 좋은데 너무 착한 게 문제야.”
“……그거 욕이지?”
저 인간이 누군지를 감안하면 절대 칭찬은 아닐 거다. 절대.
“직접 손을 써서 움직이게 만드는 건 하수지. 진짜 고수는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일이 벌어지도록 상황을 조성하는 법이야.”
새 술병을 끌어다 한 모금 들이켠 청명이 말을 이었다.
“강남이 아무리 넓다지만, 장일소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런 놈들 따위야 강북으로 올라오기도 전에 목을 쳐 버릴 수 있었지. 장강까지 점령해 놓은 상황인데 놓치는 게 더 이상해.”
“……그럼 장일소가 그놈들을 일부러 섬서로 보냈다고?”
“그래.”
“왜?”
백천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청명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나도 모르지.”
“…….”
그러자 모두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미묘한 경멸이 어려 있었다. 반응을 확인한 청명이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아니, 내가 무슨 독심술사야? 그 미친 새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알 게 뭐냐고!”
“알 줄 알았지.”
“원래 미친놈끼리는 통하는 법이라잖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몰라도 너는 알아야 해.”
“……망할 것들이.”
청명은 목이 타는 듯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사실 농담인 양 넘어갔지만, 그의 눈빛은 처음보다 어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하지 않은 말이 눈 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장일소…….’
술병을 내려놓은 그는 입가를 훔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한 것만 알면 돼.”
“확실한 것?”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움직인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이야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 힘겨운 수련을 버텨 낸 것 역시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대비를 마쳐야겠구나. 그 장일소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더라도 상대할 수 있도록 말이다.”
“뭐…….”
백천의 말에 청명이 흘긋 시선을 던지며 웃었다.
“대비는 신물이 날 정도로 했잖아. 아냐?”
“맞지.”
“……신물이 아니라 쓴물이 나도록 했지.”
“아, 사형 그때 토하신 것 말씀이십니까?”
“너도 토했잖아, 이 새끼야!”
윤종이 발을 날려 조걸을 걷어찼다. 하지만 조걸은 지난 삼 년간 확실히 성장했는지, 이제는 얻어맞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패기를 보여 주었다.
“저야 그냥 좀 흘린 거고, 사형은 아침 먹은 것까지 다 게워 냈잖습니까!”
“내가 언제 인마!”
윤종이 벌게진 얼굴로 항변했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로 윤종을 놀리려 하는 이는 없었다. 사실 그 혹독한 수련 와중에는 그런 일 정도야 웃고 넘어갈 작은 사건에 불과했으니까.
“대비라기보다는 정리를 해야지.”
“정리?”
“응. 정리.”
청명이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개판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좀 정리해 놔야 장일소 그 새끼가 눈 까뒤집고 달려들 때 상대하기가 좀 편할 테니까. 무엇보다…… 저 망할 구파 새끼들부터 어떻게 좀 해야지.”
구파 이야기를 나오며 청명의 얼굴에 다시 부글부글 끓는단 기색이 떠오르니 혜연이 움찔하여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벌써부터 이리저리 머리 굴릴 것 없어.”
청명의 목소리에 확신이 어렸다.
“이제 곧, 지겹도록 싸울 시간이 올 테니까.”
모두가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죽어 버리자, 청명이 손에 든 술병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일단 마시자고.”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쟤도 가끔은 맞는 말을 한다니까.”
분위기가 금세 다시 달아올랐다. 모두가 서로 경쟁하듯 술병을 비워 나가는 모습을 보며 벽에 등을 기댄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럴 자격이 있지.’
예전 같았으면 햇병아리 놈들이 벌써부터 노는 것만 밝힌다고 욕을 해 댔을 청명이지만, 지금 이들에게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난 삼 년간 혹독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수련을 불평 한 번 않고 버틴 사람들이니까.
과거의 청명이어도 이들의 나이에는 그 수련을 버티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하기는 했겠지만…….
- 누가? 네가? 네가아아아?
“아이, 저 양반 진짜.”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청명이 조용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쨌든.
그만큼 가혹하게 자신을 몰아붙인 이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휴식도 필요하다. 꼭 청명이 술을 먹고 싶어서 창고의 술을 훔친 게 아니라는…….
- 녀석, 지랄을 하는구나.
“아니, 이 양반이 진짜!”
“너 왜 자꾸 그러냐?”
“……아니.”
어디다 하소연하지도 못하고, 청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보다…….’
그러다 불현듯 눈에 스산한 기운이 어렸다.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는데.’
그 장일소가 뻔하게 장강을 넘어 전쟁을 시작할 것 같지는 않다. 어떻게든 제게 유리한 전장을 만들어 내고, 그 전장을 제 의지대로 휘두르려는 이가 장일소니까.
최근 사패련이 잠잠해졌다는 말은 분명 그가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다. 저 사패련의 내분을 정리하고, 저 구파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결정적인 한 수를.
“……뭐, 그래 봤자지.”
조용히 중얼거린 청명이 입꼬리를 뒤틀었다.
어떤 신묘한 책략이라 해도 실력이 부족하다면 의미가 없다. 그건 청명이 장강에서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이제는 거꾸로 청명이……. 아니, 화산이 장일소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줄 것이다.
“……사숙. 저 새끼 기분 나쁘게 웃는데요?”
“그냥 두라니까. 또 광증이 도진 모양이지. 요즘 부쩍 심해진 것 같긴 하다만.”
“더 미치면 사람이라 보기가 힘들 텐데.”
아니, 그냥…… 청명이 알려 주는 걸로 하자.
응.
* * *
“보상은 모두 끝냈습니다.”
“음.”
“사파 놈들이 쓸고 간 마을의 시신들은 모두 수습해 장례를 치러 주었고, 생존자들은 옆 마을로 인계했습니다. 화산과 은하상단의 이름으로 후원을 약속했으니 박하게 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구려.”
“남양으로 간 위립산 문주도 시신을 인계하고 돌아오는 중이라 합니다.”
보고를 듣던 현종이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서안에서 화산이 할 일은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예상한 것보다 시일이 조금 더 지체되긴 했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더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상단주님.”
현종이 그를 상단주라 부르자 황종의가 살짝 긴장한 낯으로 몸을 곧추세웠다. 공적인 말이 나올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예, 장문인.”
현종이 황종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황종의가 당황하여 손을 내젓자 현종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단 이번 일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화산이 봉문을 한 동안 상단주님께서 얼마나 큰 고초를 겪으셨는지 알고 나니 제가 고개를 들기가 어렵습니다.”
“자, 장문인.”
현종이 황종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화산을 위해 주셔서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황종의는 기겁하며 현종을 만류했다.
“왜 이러십니까, 장문인! 화산이 부족하다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화산은 결코 부족한 곳이 아닙니다.”
그 말에 현종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부족하지 않다고 하셨습니까?”
“그, 그럼요.”
현종은 어느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을 뚫어져라 보며 다시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황종의는 순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현종의 시선 끝에는 단체로 머리를 바닥에 박고 있는 화산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끄응…….”
“머리…….”
“조걸 이 새끼가…… 누가 내공 쓰래? 뒈지고 싶냐?”
“……그걸 또 꼰지르시는…….”
현종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똑바로 안 박느냐, 이 망할 놈들아!”
이곳에 있는 이들은 새벽에 얌전히 은하상단으로 돌아왔다가 걸린 화산 제자들이 아니었다. 술을 있는 대로 처먹고 죄다 뻗어 버리는 바람에 아침이 되어서야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돌아온 천하의 망종들이지…….
‘등신들이!’
‘어떻게 한 놈도 못 일어나냐.’
‘이런 것들을 사형제라고 믿었으니.’
서로 칼날 같은 눈빛을 보내는 오검의 등을 향해 진노한 현종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우환이 채 다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술? 수울? 그것도 남의 창고에서 술을 빼다 처먹어? 그러고도 네놈들이 도사냐? 그러고도 도사야!”
그 순간 청명이 머리를 박은 그대로 손을 뒤로 번쩍 들었다.
“뭐냐?”
“그으…… 헤헤. 잘못한 건 맞는데, 따지고 보면 은하상단이랑 저희가 남은 아니지 않…….”
“뭐, 인마?”
순간 뚜껑이 열린 현종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려 하자 현영과 현상이 황급히 양쪽에서 잡고 늘어졌다.
“장문인, 진정하십시오!”
“남들이 봅니다, 장문인!”
“그게 문제다!”
현종이 벼락같이 소리를 치며 장로들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남들이 보니까 이러는 거 아니냐, 남들이 보니까! 내가 남사스러워서 살 수가 없구나!”
“크흠.”
“예전에는 저놈 혼자서 사고를 치더니, 이제는…….”
그 말에 백천을 비롯한 모두가 움찔하여 눈을 감았다.
“……삼 년이나 그 고생을 했으면 철이 좀 들 줄 알았더니, 예전보다 더하구나! 더해! 화산이 대체 어찌 되려고!”
화를 내다 못해 진이 빠져 버린 현종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황종의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이런 못난 화산과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서글픔과 억울함이 범벅된 얼굴을 보며, 황종의는 차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리는 수밖에는.
술을 훔쳐 처먹은 것에 대한 사과와, 못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사과를 적당히 얼버무려 함께 건넨 현종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현상, 현영.”
“예, 장문인.”
“바로 준비해라.”
“예?”
“화산으로 돌아갈 것이다.”
현상이 반가운 얼굴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이제 일을 다 마쳤으니 화산으로 돌아가는 것…….”
“내가 낯이 팔려서 여기에 더 못 있겠다! 당장 짐 싸라! 당장!”
“…….”
“어서!”
“……예.”
그렇게 화산파의 복귀가 갑작스레 결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