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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94화 (890/1,567)

894화. 얻지 못할 바에는 죽는 게 낫지. (4)

스읏.

달조차 구름 뒤로 숨어들어 짙은 어둠이 내린 밤. 한 검은 그림자가 은하상단의 창고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주변을 살피던 그는 지나가는 사람의 눈을 피해 은밀히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무공이 꽤 고강한 모양으로, 어지간히 단련했을 상단의 무사조차 그의 기척을 잡아 내지 못하고 태연스레 그의 앞을 지나쳤다.

“…….”

어둠 속에서 무사가 완전히 지나가기를 기다린 그는 조심스레 창고로 접근했다. 문에 걸린 커다란 자물쇠를 보는 눈이 스산하게 번쩍였다.

끼릭.

사내는 손가락을 가만히 자물쇠의 열쇠구멍에 가져다 댔다. 잠시간 그 자세를 가만 유지하더니 손을 떼고 품 안에서 얇은 철사를 꺼내어 이리저리 구부렸다.

모양내어 접힌 철사가 열쇠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딸깍.

자물쇠가 문제없이 자연스레 열렸다.

조심스레 열린 자물쇠를 걷어 낸 그는 주변을 다시 한번 살피고 복면의 매무새를 고친 후 살금살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락. 사락.

상품이 상하지 않도록 바닥에 깔아 둔 천이 밟히는 소리가 조용히 퍼져 나갔다.

문을 조용히 닫는 것까지 성공한 사내는 예리한 눈으로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온갖 갚진 물건들로 그득그득 들어차 있지만, 섣불리 이곳저곳을 뒤지지 않는 모양새가, 따로 노리는 물건이 있어 보였다.

이윽고 그는 창고 가운데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찾으려는 물건은 눈으로 판별할 수 없다는 듯.

그리고…….

번쩍.

이내 눈을 뜬 사내의 눈에서 눈부신 광망이 뿜어져 나왔다.

‘저기.’

그는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가, 가장 안쪽 서늘한 곳에 보관되어 있는 상자를 손등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퉁. 퉁.

복면 안에 감춰진 사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거로군.’

상자를 감싼 천을 풀어내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상자가 완전히 드러나자 그는 단단히 못질된 뚜껑을 잡고 힘을 주었다.

우득. 우득.

그렇게 마침내 상자의 뚜껑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벌컥!

닫아 두었던 창고 문이 격하게 열리더니 안으로 한 무리의 무인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동작 그만!”

그러자 뚜껑을 열던 이가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문제가 생긴 것을 확인하자마자 사내는 상자 안에 든 것을 품 안에 찔러 넣고는 바닥을 박찼다.

“잡아!”

검을 뽑아 든 몇몇이 섬전처럼 달려들었지만, 사내는 따라붙는 이들보다 더 빠르게 위로 솟구쳤다. 천장을 뚫고 도주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황금빛 불광이 날아오르는 복면인의 머리 위로 빠르게 치솟았다.

“오오오오!”

몸을 날린 혜연이 원한 가득 실린 주먹을 복면인에게 날렸다. 잠시 움찔한 복면인이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방향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백천이 곧장 검을 뽑아 복면인을 향해 검기를 날려 대었다.

“큭!”

복면인의 눈이 더욱 일그러진다.

싸우려면 못 싸울 것도 없지만, 시간을 끌면 더 많은 이들이 몰려온다. 이들을 일일이 상대할 게 아니라 몸을 빼내야…….

그 순간이었다.

촤라라락!

아래에서 뭔가 쇠끼리 서로 얽혀드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커다란 쇠 그물이 날아들어 사내를 덮쳤다.

“아악!”

그물에 짓눌린 복면인이 그대로 추락했다.

“꽉 잡아!”

“놓치지 마!”

“잡았다, 요놈!”

윤종과 조걸이 그물 끝을 단단히 잡아 그를 바닥에 고정했다. 잠시 발버둥을 치던 사내는 두 눈에 원독을 가득 담고 그를 제압한 이들을 노려보았다.

“이…….”

빠드득 이 가는 소리가 사내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런 그의 앞에 천천히 다가온 백천이 차디찬 눈으로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새끼 복면부터 벗겨라.”

“예, 사숙.”

조걸이 그물 안으로 손을 넣어 복면을 벗겨 내자 매우 익숙한 얼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카아아악!”

얼굴을 확인한 이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복면인, 아니 청명이 원독에 찬 눈으로 혜연을 노려보았다.

“저 땡중 새끼! 진심으로 쳤어?”

“……아미타불. 오해외다, 시주.”

“오해? 오해애애애? 아, 그렇지? 오해지? 오해 두 번 했다가는 사람 죽이겠네? 오해?”

“크흠.”

혜연이 살짝 민망한지 슬쩍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를 민망함에서 구해 준 것은 백천이었다.

“아무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채였다.

“아무리 술이 먹고 싶다고 해도 상단 창고를 털 일이냐? 응? 이 미친놈아!”

마침 청명의 품 안에서 새하얀 술병이 굴러떨어졌다.

윤종이 재빨리 병을 낚아채자 청명이 눈을 부릅뜨며 황급히 외쳤다.

“그거 맛도 못 봤는데!”

백천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당소소를 칭찬했다.

“……네 말대로 그물이 효과가 있구나.”

“짐승 잡는 데는 그물을 써야죠. 검 들고 있으면 아무 소용도 없기는 하겠지만.”

“저게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도 사형제지간에 칼 뽑아 휘두르지는 않겠지.”

“휘두르던데?”

“……제정신이 좀 많이 아닌 걸로 해 두자.”

백천은 남사스럽다는 듯 뒤쪽의 눈치를 살피며 청명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제발 사람답게 좀 굴어라, 응? 여기가 어디라고…….”

“아니, 그럼 돈을 주든가!”

“…….”

“땡전 한 푼 없는데! 밖에도 못 나가고! 술도 못 먹게 하고! 내가 뭐 도 닦아?”

“……너 도사다, 청명아.”

그리고 도사는 원래 도를 닦는 사람이고!

이제 더는 뭐라 할 힘도 없다는 듯 백천의 고개가 축 처지는 그 순간이었다.

뽕!

그때 청량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윤종이 생각 없이 술병의 뚜껑을 따 버린 것이다.

그 순간 청아하고 향긋한 주향이 창고 안에 퍼져 나갔다.

꿀꺽.

순간 백천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놀라서 고개를 획 돌리니 청명은 아예 눈이 뻘게진 채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

심지어 다른 이들도 술병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신이 뭔가 큰 실수를 했음을 직감한 윤종이 서둘러 술병 마개를 다시 닫았다.

“…….”

“…….”

묘한 침묵이 오갔다.

그 침묵을 깨고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역시나 화산에서 가장 용감한 조걸이었다.

“그…… 사실 뭐, 청명이도 나름 활약을 했는데, 그…… 술 한 병 정도야 괜찮지 않겠습니까?”

물론 청명은 이번 전투에서 뒷짐지고 지켜본 게 다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마, 맞아요. 사실 사형 성격에 이만큼 참았으면 오래 참은 거죠. 호랑이 묶어 둔 채로 고기는 안 주고 풀만 주는데 안 미치는 게 이상하잖아요. 그죠?”

당소소가 재빨리 조걸을 거들고 나섰다.

“흐음. 하지만 아직 희생자의 넋을 다 기리지도 못했는데…….”

“장례식장에서 원래 술 먹는 거 아닙니까?”

점잖게 반대하려던 윤종이 툭 끼어든 조걸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 역시 이 논리에 순간 말이 막힌 얼굴이었다.

“물론 과음하면 안 되겠죠, 과음하면. 하지만 한 병 정도야…… 저희가 감시하면 되지 않을까요?”

조걸의 말에 백천이 말도 안 된다며 딱 자르려던 그때였다.

“……감시하다 한잔 먹을 수도 있고.”

“사, 사매?”

백천이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얼굴로 유이설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녀는 시선을 돌리며 백천의 시선을 아주 깔끔하게 외면했다.

“사숙!”

“응?”

조걸이 다시없는 생사대적을 앞에 둔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결정을!”

“영민하신 결단을!”

“…….”

떨리는 백천의 눈이 윤종이 든 술병에 꽂혔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진짜 술이 고픈 사람은 청명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었다. 청명이 놈은 분명히 수련하는 중간중간 황종의가 챙겨 준 술을 찾아 먹었을 테니까.

화산을 떠나 산으로 들어간 뒤로야 청명도 그러긴 힘들었겠으나, 어쨌든 가장 오래 술을 끊은 건 그들이었다.

‘아, 아니 그래도…….’

백천이 고개를 저으며 차기 장문인으로서의 초인적인 인내력과 이성을 발휘하려는데, 오검의 눈빛이 일제히 백천에게 불화살처럼 매섭게 꽂혔다.

‘개새끼들.’

결단은 얼어 뒈질. 지들은 벌써 마음속으로 다 정해 뒀구만.

“크흠.”

백천은 고뇌 어린 얼굴로 헛기침하며 입가를 슬쩍 훔쳤다. 소매에 옅은 물기가 나오긴 했다.

“그럼 딱 한 병만…….”

그때 앞쪽에서 들린 작은 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스님?”

청명이 뜯어 놓은 상자를, 어느새 혜연이 통째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하, 한 병…….”

“예?”

혜연이 커다란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걸과 윤종이 백천에게 다가서며 작게 속삭였다.

“일단 은밀하게 빠져나갑시다.”

“이왕이면 상단 밖에서 먹고 오죠. 오다 들킬 수도 있으니까.”

“흔적 지워야 해. 확실하게.”

“크흠.”

논의하는 조걸과 윤종, 슬쩍 거들어 대는 유이설, 자신은 죄가 없다는 듯 헛기침하는 백천까지.

그 양을 멍하니 보고 있던 청명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잘들 논다.”

그물이나 치워, 이 새끼들아!

* * *

백천, 유이설, 윤종, 조걸, 청명, 당소소, 그리고 혜연까지.

이 인물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은 모습을 강호인들이 본다면 다들 감탄을 터뜨릴 것이다.

후기지수를 넘어 저 장일소의 인정을 받은 화산제일검 청명과, 화산의 차기 장문인감으로 천하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화산정검 백천. 그리고 타 문파의 후기지수들과는 비교 자체를 불허한다는 화산오검과 소림 최고의 기재인 혜연까지.

그야말로 훗날의 강호를 이끌어 나갈 재목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들. 그런 이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았으니 분명 인상적이리라.

분명 인상적이다. 인상적인데…….

“카아아아!”

“와! 이거 쫙쫙 달라붙네!”

“비싼 술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술을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한 잔 더.”

“사저! 제가 따라 드릴게요! 제가!”

잔뜩 신이 나서 유이설의 잔에 술을 채우는 당소소를 보며, 백천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진짜 이래도 되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남의 창고에서 술을 훔쳐…….

꿀꺽! 꿀꺽! 꿀꺽! 꿀꺽!

“…….”

하지만 그는 이내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저기서 힘차게 병으로 나발을 불어 젖히는 인간이 청명이 아니라 혜연인 걸 안 순간부터 이런 고민은 의미가 없었다.

‘생각하지 말자.’

그런데…….

“크으!”

아오. 술 좋네. 진짜 입에 짝짝 달라붙네.

생각하는 것을 놓아 버린 백천이 술 한 잔을 시원하게 넘기고는 느슨하게 풀린 얼굴로 청명을 돌아보았다.

꼴꼴꼴꼴.

자알 먹는다.

청명은 마치 사막에서 헤매다가 겨우 인가를 발견한 사람이 물을 얻어 마신 듯 술을 넘겨 대고 있었다.

“크으으으으으으으으!”

마침내 입에서 빈 술병을 뽁 소리 나게 뽑아낸 청명의 표정을 보니……. 뭐랄까, 인생에 행복이라는 게 뭐 별게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오.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술 안 먹어서 죽은 사람은 없다.”

“처음으로 하나 생길 뻔했어.”

“……안 생긴다지 않느냐.”

그냥 말을 말아야지.

“그보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백천이 청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이제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음? 갑자기 뭔 소리야? 술 잘 먹다가.”

“사패련 말이다.”

그들을 떠올리니 백천의 얼굴에 자연히 그림자가 드리웠다.

“듣자 하니, 그쪽 상황도 녹록지 않은 것 같던데. 그들이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고 보느냐?”

청명이 술이 한 줄기 흘렀던 턱을 쓸어내렸다.

“흐음.”

그리고 술병을 옆에 가만 내려놓았다. 고개를 드는 그의 눈이 살짝 가느스름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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