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3화. 얻지 못할 바에는 죽는 게 낫지. (3)
피로라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다.
지금 당군악의 상태가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무학을 익힌 이는 격무에도 쉽사리 지치지 않고, 늘 활력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집무실에 앉은 당군악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군.’
당군악은 결국 손에 든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벌써 세 번을 연달아 읽었지만,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질 않는다. 딱히 안 좋은 내용이 적힌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는 가만히 눈두덩을 문질렀다.
‘피곤하군.’
지난 삼 년간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장강의 혼란을 관리하는 동시에 먼 사천의 본가에서 벌어지는 일도 해결해야 하니, 시간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잠잘 시간마저 줄여 가며 수련은 최대한 빼먹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이제는 그것도 한계에 달한 느낌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당잔의 물음에 당군악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피곤한 것뿐이다.”
“……가주님.”
당잔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럴 만도 했다. 지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지난 삼 년 동안 당군악이 당한 혹사를 생각하면 말이다.
“좀 쉬셔야 합니다.”
“아직은 괜찮다.”
“물론 괜찮으실 겁니다. 가주님께서는 언제나 괜찮으시지요. 항상 여력이 남아 계실 겁니다.”
“음?”
당군악이 고개를 들어 당잔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끝까지 쉬지 못하실 겁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쉬었어야 했다고 후회하시겠지요.”
가만 듣고 있던 당군악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거 뼈 아픈 말이구나.”
“아버님.”
가주님이 아니라 아버님이다. 당잔은 진지한 얼굴로 나지막이 한숨 쉬며 말을 이었다.
“제발 좀 쉬셔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 누님이 없기에 망정이지, 누님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아버님도 무사하시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좀 무서운 말이구나.”
말과는 달리 당군악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당소소를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버님이 곤욕을 치르시기 전에 제가 먼저 맞아 죽겠죠.”
“…….”
당군악은 딱히 당잔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당소소가 당잔을 쥐잡듯 잡아 댔다는 건 당군악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물론 소소가 당가에 있을 당시에는 당잔의 무위가 더 높았지만, 어디 관계라는 게 힘으로만 되는 일이던가?
만일 당잔이 당소소에게 대드는 걸 보았다면 당장 당군악부터 먼저 달려가 당잔의 미간에 대침을 꽂아 버렸을 것이다.
“그 나이가 되어서도 아직 누이가 무서운 것이더냐?”
“이 나이가 되니까 더 무서운 거지요. 어릴 때야 두들겨 맞아도 그러려니 하지만, 제 나이에 누이에게 얻어맞으면 큰일 아닙니까.”
“……그렇구나.”
“예전에야 마음만 먹으면 도망이라도 칠 수 있었지. 이제는 그것도 안 될 텐데.”
“안 된다고?”
당잔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누님 성격에 수련을 게을리했을 리도 없잖습니까. 보나 마나 지난 삼 년 동안 이 악물고 수련을 했을 텐데. 그 화산신룡이 시키는 수련을 해 온 누님을 제가 어떻게 이깁니까?”
“내 아들이라는 놈이…….”
“누님도 아버님의 딸이잖습니까. 똑같지요, 뭐.”
당군악이 그렇구나, 하며 나지막이 소리 내어 웃었다.
시답잖은 잡담에 불과하지만, 덕분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아마 당잔도 그런 생각으로 부러 꺼낸 말이었을 것이다.
“쉬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이 일만 끝내 놓고 쉬자꾸나.”
“그 말만 벌써 열 번은 더 들었습니다.”
무어라 더 말을 하려던 당잔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았다.
뭘 어쩌겠는가?
쉰다고 해서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 일을 미룬다면 내일 해야 할 일이 늘어날 뿐이다. 조삼모사가 따로 없다.
그렇다고 당군악이 일을 대충 하기를 바랄 수도 없다. 당가의 가주에게 그런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떻게든 수를 내야…….’
당잔의 마음에 원망이 다시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 바로 그때였다.
“아버님! 아니, 가주님!”
벌컥!
당패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사색이 된 그의 얼굴에, 당군악은 뭔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편안함이 잠시간 깃들었던 눈이 순식간에 냉철해졌다.
“무슨 일이냐?”
당군악의 반응을 본 당패가 그게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지 몇 번이고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천천히 말해 보거라. 무슨 일이더냐?”
그 와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당군악은 과연 한 가문을 이끌어나가는 가주의 귀감이라 할 수 있었다.
다음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화산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뭐?”
삽시간에 책상을 뛰어넘은 당군악이 당패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어디라고?”
당잔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물론 당군악이 당패의 멱살을 움켜잡은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더 충격적인 건 그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채, 책상을 뛰어넘어?’
저 당군악이?
항상 명문의 자제다운 몸가짐을 지켜야 한다고 그리 신신당부를 하던 사람이?
“켁! 케엑! 가, 가주님! 이것 좀 놓…….”
“아! 미안하구나.”
당군악이 화들짝 놀라 당패의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았다.
“어디라고 했느냐?”
“화, 화산입니다. 개방을 통해 화산이 연통을 보내왔습니다. 여기 바로 여기 서찰이…….”
당패가 품에서 서찰을 빼내기가 무섭게 당군악이 토끼를 사냥하는 매처럼 낚아채 갔다.
촥촥!
그리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봉투를 찢어 안에 든 종이를 꺼내 들었다.
“…….”
말없이 서찰의 내용을 확인한 당군악의 얼굴에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이 떠올랐다.
황당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놀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묘한 표정은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화했다.
“뭐,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직접 보거라.”
당잔은 당군악이 내민 서찰을 받아 들었다. 커다란 종이에 적혀 있는 글자는 겨우 한 줄이나 될까 말까였다.
왜 쓸데없이 고생하고 있어요. 다 때려치우고 일단 화산으로 오세요.
“허…….”
당잔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허허…….”
순간 자신이 잘못 보았나 하고 눈을 의심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잘못되었을 리가 없다.
세상 그 누가 사천당가의 가주에게 이런 서찰을 보낼 수 있겠는가? 소림의 방장이라 해도 감히 사천당가의 가주에게 고작 글귀 하나를 보내서 오라 가라 할 수 없었다.
오직 천하에 단 한 명, 청명만이 가능한 일이다.
“……어쩌시겠습니까?”
“음.”
당군악의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자, 당잔은 저도 모르게 마주 웃고 말았다. 당군악의 이런 표정을 보는 건 몇 년 내에 처음인 것 같았다.
화산이 돌아왔으니 이 갑갑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보이는 미소가 아니다. 당군악은 제 일을 내던질 수 있게 되었다고 이렇게 환히 웃을 사람이 아니니까.
지금 이 미소는 오래 연락이 끊겼던 친우의 건재함을 확인한 이의 미소다.
“여하튼 못 말리겠구나.”
당군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였다.
“가주 계십니까!”
바깥에서 또 다른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능히 짐작한 당군악이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시오.”
지체없이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서찰 받으셨습니까?”
녹림왕 임소병이 인사도 제쳐 놓고 다짜고짜 물어 왔다. 당군악은 말없이 자신이 받은 서찰을 그에게 내밀었다.
“보시다시피.”
“……끄응.”
내용을 확인한 임소병이 앓는 소리를 냈다.
“받으시었소?”
“직접 보십시오.”
임소병 역시 제 손에 쥔 서찰을 당군악에게 내밀었다.
장부 다 챙겨서 화산으로 와요.
“……허허.”
당군악이 받은 서찰보다도 더 간결했다.
“화산이 마침내 봉문을 풀었구나.”
당군악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감회가 새로운 양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고 시선을 교환했다.
“끄응.”
하지만 임소병만은 여전히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녹림왕께서는 달갑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달갑지 않은 게 아니라…….”
당군악이 넌지시 물으니 임소병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대체 삼 년 동안 쌓인 장부가 얼마라고 생각하고 그걸 다 들고 오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될까 봐 사본을 은하상단에 계속 보내 놓은 건데!”
“…….”
“수레가 다섯 수레는 나올 텐데! 다섯 수레는!”
“……진정하시오.”
“아이고. 뭔…….”
임소병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돌아오자마자 사람을 이리 고생시키니, 앞으로 뭔 일이 벌어질지 걱정입니다. 보나 마나 얼굴 마주하자마자 소리를 꽥꽥 질러 댈 텐데.”
임소병이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당군악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걱정이라는 사람치고는 즐거워 보이시는군.”
그 말에 임소병이 제 얼굴을 매만졌다. 손끝에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살짝 머쓱해진 임소병이 괜히 당군악을 물고 늘어졌다.
“……그래도 뭐 가주만 하겠습니까?”
당군악도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자신이 평소답지 않게 들떴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하지만 일이 잘 풀려도 삼 년 내내 뭔가 갑갑한 심정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청명의 서찰을 받는 순간 이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히던 갑갑함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어쩌시겠습니까?”
“도리가 있겠소?”
당군악이 빙그레 웃었다.
“오라면 가야지요.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화산검협의 말을 거절하겠습니까?”
“……가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는 꼼짝없이 끌려가야겠네요. 끄응.”
당군악이 고개를 돌려 당패를 바라보았다.
“화산에 다녀와야겠다.”
“예, 가주님. 한데…… 가주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당가는 어찌합니까?”
“흐음.”
당군악은 서찰에 적혀 있던 ‘다 때려치우고’라는 말을 떠올렸다.
“가솔들을 뒤로 물리고 정말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나서지 말라고 하거라.”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안다.”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화산검협은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말을 서찰에 적어 보내는 귀찮음을 감수할 이가 아니다.”
“……그렇지요.”
임소병이 그 말에 완벽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는 바가 있어 보이니, 시키는 대로 하거라.”
“예, 가주님. 그리하겠습니다.”
“가야겠다.”
“버, 벌써요? 아무리 그래도 이리 급박하게 말씀이십니까?”
당군악은 표정 없는 얼굴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지.”
“……확인이라시면?”
당군악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임소병이 들어오며 활짝 열어 놓은 문을 통해 푸른 하늘이 훤히 보였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삼 년의 시간 동안 저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떠올랐다.
“그 성격 나쁜 이무기가 정말 용이 되어 돌아왔는지 말이다.”
그 말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임소병만이 부채로 제 머리를 툭툭 때리며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용이 되었어도 그건 악룡일 텐데…….”
“그건 어쩔 수 없지.”
당군악이 당패를 보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마.”
“예? 아버님? 예?”
당패는 여전히 당황스런 낯이었지만 당군악은 대답도 듣지 않고 빠르게 방을 나섰다. 그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당패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임소병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고생이 많으시겠소.”
“저런 분이 아니신데…….”
당가의 소가주가 녹림왕에게 위로를 받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는 곳.
이곳은 장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