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2화. 얻지 못할 바에는 죽는 게 낫지. (2)
장내에 둘러앉은 이들의 얼굴이 충격이라도 받은 듯 묘하게 굳어졌다.
그 표정을 본 홍대광은 살짝 당황하다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충격에 입을 벌렸다.
사실 일반적으로는 봉문을 한다고 해서 바깥소식에 완전히 귀를 닫아 버리지는 않는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닫을 수 없다는 게 맞다.
걸어 잠갔던 문을 언젠간 다시 열어야 하는데 어떻게 완전히 등을 돌리고 귀를 막겠는가? 그러니 수련하면서도 은근슬쩍 외부 소식을 모으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지금 화산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인간들은 진짜 뒤가 없구나.’
정말 산골짝에 처박혀서 바깥세상이 돌아가든 말든 죽자고 수련만 해 댄 모양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새삼 저 족제비 놈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저 족제비가 없었다면 서안이 박살이 나도 세상모르고 검이나 휘두르고 있었을 것 아닌가?
그리고 덩달아 화산이 얼마나 대책 없는 문파인지도 실감되었다.
“여하튼 그래서.”
홍대광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강남일통은 애초에 끝났고, 지금은 강북에 있던 사파들도 장강을 건너 사패련의 휘하로 집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종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집결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가 그를 침음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그리되었군.”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그 예상이 맞았단 걸 확인하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었다.
“그럼 사패련은 안정화가 되었다고 봐야 하는 겁니까?”
조걸의 물음에 홍대광이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그 말에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네? 그건 무슨 소립니까?”
홍대광이 잠깐 앓는 소리를 내며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이게 생각보다 조금 복잡한 문제인데, 외부적으로 볼 때 사패련은 완전한 일통을 이루었네. 강남에는 더 이상 사패련에 저항하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고, 심지어 강북의 사파들마저 사패련을 중원의 사파를 대표하는 세력으로 인정하여 그 휘하로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요.”
“문제는 그다음이지.”
“예?”
조걸이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하자 청명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사냥이 끝나면 뭘 하겠어?”
“토사구팽? 개를 삶는다?”
청명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조걸을 바라보았다.
“아니……. 사냥이 끝났으면 사냥한 걸 배분해야지. 멀쩡한 개를 왜 삶아? 미쳤어? 불쌍하지도 않아?”
“…….”
조걸이 멍하니 청명을 보다 주변 사형제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훈훈하기 그지없는 덕담이 쏟아졌다.
“나쁜 놈.”
“더러워.”
“인성파탄자.”
“…….”
한순간에 구제할 길 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린 조걸이 우울한 얼굴로 벽에 머리를 기댔다. 혼자 무어라 자꾸 중얼대는 조걸을 무시하고 청명이 말을 이었다.
“이제 몸집도 키울 만큼 키웠으니, 슬슬 갈라 먹고 싶겠지. 다른 놈들은 몰라도 신주오패의 수장들은 얌전히 장일소의 아래에 머리를 숙일 놈들이 아니니까.”
“개방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홍대광이 청명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도하게 조용했어. 이상할 정도로 말이야. 그리 고분고분한 인간들이 아닌데. 아무리 련주가 장일소라고 해도 이건 너무 과하다.”
그때, 백천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묻는다.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리 생각한다면 지금 문제가 벌어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음?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백천이 홍대광을 보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패련이 강남을 통일한 이상, 강북에 있는 구파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그런데 전쟁을 앞두고 자기들끼리 내분을 일으키는 건 어렵지 않겠습니까? 속셈이 있다고 해도 강북을 일통한 뒤에 문제를 일으키는 게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괜히 내분을 일으켰다가 패하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날아갈 텐데.”
홍대광이 옳은 말이라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꽤 식견이 있군.”
“……별말씀을.”
“맞는 말일세. 그게 합리적이지. 한 가지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한 가지라면?”
“패군일세.”
“…….”
장일소를 떠올린 백천의 얼굴이 자연히 굳어졌다.
“지난 삼 년간 패군은 사패련주로서 자신이 입지를 완벽하게 구축했네. 지금 사패련의 휘하에 몰려들고 있는 세력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장일소의 발아래 복속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네.”
“그가 다른 신주오패의 문파들을 굴복시킬 만큼 강해졌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내분이 일어날 수도 없겠지. 하지만 생각해 보게. 강북과 강남의 운명을 가르는 대전쟁이 벌어지고, 장일소가 사패련주로서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백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그렇게 되면 정말로 다시는 장일소의 위엄에 범접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벌어진다면 오히려…….”
“그래. 지금이라는 이야기지.”
홍대광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폭풍전야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당장 내일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고, 그 전쟁이 어디서 터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가만 듣고 있던 현종이 낮게 신음하고는 물었다.
“구파는 어쩌고 있는가? 구파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당연히 구파의 수뇌부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구파는 혼란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상황입니다. 특히 하남은 무당과 남궁의 공백을 메우는 것만으로도…….”
“하남?”
“…….”
홍대광이 입을 닫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에 불길함이 가득 어려 있다. 아니나 다를까, 청명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요?”
“……내가 뭔 말을 잘못했나?”
“아니. 지금 어디라고 했어요?”
“하남이라고 했네만.”
“아, 하남?”
청명이 환하게 웃는다.
“소림이 하남에 있다고?”
“소, 소림이야 당연히 하남에 있지. 숭산이 하남에…….”
“장강에 있는 게 아니라?”
“…….”
홍대광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언제 사패련이 밀고 들어올지 모르는 장강 어귀를 방비하는 역할은 구파의 것이다. 애초에 장강참변과 강남불침의 조약 자체가 무당의 헛짓거리로 벌어진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 구파는 여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장강에서 손을 떼 버렸고 애꿎은 당가가 생고생을 하며 장강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명이 그 부분을 찌르고 들어오니, 어쨌거나 같은 구파일방에 속해 있는 개방의 홍대광도 낯이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지. 지금 일단 하남에 있는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홍대광의 눈에 청명의 목이 옆으로 삐딱하게 꺾이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하남에 있는데.”
“……어. 그, 그렇지. 하남에…….”
“그런데 사파 새끼들이 여기로 쳐들어오는 걸 손가락 빨고 구경하고 있었다?”
“…….”
홍대광이 입을 다물었다.
달리던 수레가 갑자기 옆으로 방향을 틀어 그를 정면으로 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저 먼 장강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옆 동네에 있었으면서도 사파 놈들이 섬서를 불태우건, 뒤집어엎고 갈아서 농사를 짓건 신경도 안 쓰고 염불이나 처 외고 있었다?”
“그…… 소림도 워낙에 여력이 부족하다 보니…….”
“처 노는 거지새끼들도 호북에서 굴러다니며 구걸이나 하고 나자빠졌고?”
“…….”
“하…….”
“하하…….”
“하하하.”
청명이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청명의 이마에 새파란 핏대가 서는 게 훤히 보였다.
“이 땡중 새끼가 처돌았나?”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심상찮은 기미를 느끼고 있던 오검들이 벼락처럼 몸을 날려 그를 움켜잡았다.
“어, 어딜 가려고!”
“어딜 가긴 어딜 가! 소림에 가야지!”
“소림에 가서 뭐 하게!”
“몰라서 물어? 이 미친 땡중 새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 목숨을 가지고 수작질을 부려? 관세음보살도 이 짓거리 보셨으면 그 자리에서 들고 있던 연꽃으로 대가리 깨 버리시겠네! 관음보살이 직접 못 하시니까 나라도 깨 줘야지!”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소림 방장이신데 말이 너무…….”
“방장이 뭐? 소림 방장은 대가리에 철갑이라도 두르고 태어난대? 때리면 다 깨지게 돼 있어!”
“야, 이 새끼야! 진정하라고!”
백천이 악을 쓰며 청명을 부여잡던 그때였다.
“이…… 천인공노할!”
갑작스레 들려온 분노 어린 목소리에 오검의 고개가 모두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노기에 찬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떠는 한 사람이 보였다.
물론 충분히 분노하고 남을 상황이다. 홍대광의 설명대로라면, 소림이 섬서를 모른 척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아무리 여력이 없었다고 해도, 만일 소림이 움직였다면 갈천립이 섬서에 당도할 수 있었을 리 없다.
그러니 이건 당연히 분노해야 하는 일이고, 쌍욕을 퍼부어도 할 말이 없는 일이다.
입에서 욕지거리를 내뱉는 이의 머리가 눈 부시게 반짝이고 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럼 소림이 섬서에 구원을 보내지 않았다는 말이외까? 그게 대체 무슨 미친 짓거리요!”
“……그, 스님……? 미친 짓거리라니요. 그래도 방장이신데.”
그리고 댁은 그 소림 소속이시구요.
화산 도복을 너무 오래 입으시다 보니 좀 혼란과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하지만 혜연의 얼굴엔 노기가 넘실거렸다. 어지간한 일로는 화를 머금지 않는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중생을 구제해야 할 절이 어찌 고통받는 양민들을 외면할 수 있단 말이외까! 이건 단단히 잘못된 일이외다! 내 당장 방장께…….”
“에라, 이 새끼야!”
그 순간 청명이 냅다 오검을 뿌리치고 혜연에게 달려가 발차기를 날렸다.
공처럼 혜연을 뻥 걷어차 벽으로 굴려 버린 청명은 눈을 까뒤집고 발길질을 퍼부었다.
“이 새끼가 은근슬쩍 지는 책임 없는 척하네? 야, 이 새끼야! 너는 소림 아냐?”
“악! 아악! 시주! 저는 소림에 몇 년간 발도 들이지 않은……. 아악!”
혜연이 필사적으로 항변했지만, 애초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청명이 아니다.
“한번 소림이면 영원한 소림이지, 이 새끼야! 그리고 너 예전에 비무대회에서 헛소리 지껄이면서 우리한테 사특하다 그랬었지? 사특? 이 새끼야! 다시 씨불여 봐! 뭐? 사특?”
“아악! 그게 대체 언제적 일인데! 악!”
신나게 혜연을 까는 청명을 보며 모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지독한 새끼.’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네.’
‘집요해.’
“하여튼 이 땡중 새끼들은!”
혜연에게 분풀이를 하고도 한참을 씩씩대던 청명은 팔을 걷어붙이며 홍대광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홍대광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나도 맞는 거 아냐?’
소림 소속이라고는 하나 몇 년 동안 소림을 떠나 있었던 사람도 이렇게 패는데, 지금 당장 개방도인 그를 냅다 패지 않을 이유도 없잖은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청명은 홍대광까지는 팰 생각이 없는지 그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주 가지가지 지랄들을 하고 있네.”
이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사패련은 제멋대로 날뛰고 있고, 구파 새끼들은 그 와중에도 눈알을 굴려 대고 있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멍청한 새끼들.”
청명의 칼날 같은 눈빛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홍대광이 움찔했다.
“그래서 지금 당가가 어디에 있다고?”
“다, 당가는 지금 장강을 지키고…….”
“……장강?”
“…….”
홍대광이 할 말이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아주 개판이네. 개판이야.”
청명의 얼굴에 열이 더 오른다 싶은 순간 현종이 입을 열었다.
“우선은.”
“…….”
현종이 입을 여니 청명도 욕지거리를 삼키고 진정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당가주님을 한번 뵙자꾸나. 그리고 새외에 있는 천우맹의 문파들에게도 화산이 봉문을 풀고 나왔음을 알려야겠지.”
“예, 장문인.”
현종이 아주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으나, 또 한편으로는 이리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긴 시간 동안 고련을 한 것 아니더냐.”
“맞습니다.”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가자꾸나. 이제 화산에는 그럴 힘이 있으니까.”
“쯧.”
청명은 조금 불안 어린 얼굴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 잘못된 모든 것들을 바로잡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