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1화. 얻지 못할 바에는 죽는 게 낫지. (1)
한 사내가 걸음을 재촉했다.
딱히 위세를 과시하는 걸음은 아니었다. 그저 바쁜 일이 있다는 듯 빠르게 걸을 뿐. 하지만 지나며 그를 본 이들은 하나같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바로 패군 장일소의 군사 호가명이기 때문이었다.
사패련의 공식적인 직위로 따지자면 호가명은 열 손가락 안에도 들지 못한다.
하지만 사패련에 몸 담고 있는 이들 중, 호가명의 실제 권력이 열 손가락 안에 들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호가명이 싸늘한 얼굴로 장일소의 처소에 도달하니 앞을 지키고 있던 위사들이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가온 이가 그 호가명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우뚝.
호가명은 바삐 걸어오던 것이 무색하게 우뚝 멈춘 채 움직이질 않았다.
“…….”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숙인 위사들을 바라보았다.
“이리로.”
“예!”
위사들이 빠르게 호가명의 앞으로 다가갔다.
“련주의 처소에 들어가는 이는 몸을 수색해야 한다. 그게 사패련의 법도가 아니던가?”
“마, 맞습니다.”
사색이 된 위사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희는 왜 내 몸을 수색하지 않느냐?”
“저, 저희가 어찌 감히…….”
“감히?”
짧게 되묻는 호가명의 목소리에 위사들의 얼굴이 점점 파랗게 질려 갔다.
“만일 내가 호가명을 죽이고, 그로 위장한 암살자라면 뒷일을 감당할 수 있느냐?”
“……구, 군사.”
“수색해라.”
“예!”
더 이상의 설명 대신 짧게 명하니 위사들은 질린 얼굴로 호가명의 몸을 수색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일일이 의복을 뒤지고 그 얼굴마저 매만져 혹여 역용을 하지 않았는지까지 모두 확인을 마쳤다.
“이상 없습니다.”
위사들이 물러나자 호가명이 감정 없는 얼굴로 그들을 응시했다.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은 위사들은 판관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긴장한 얼굴로 손끝을 떨어 대었다.
“이번은 넘어간다.”
“감사…….”
“하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있을 시에는.”
호가명의 날카로운 눈이 그들을 쏘아보았다.
“너희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너희가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오직 련주님뿐이다. 련주님의 호위인 너희에게는 사패련의 누구도, 심지어 나라고 해도 예의를 갖춰야 할 대상이 아니다.”
“…….”
“기억해라.”
“예!”
마침내 호가명이 시선을 돌리고 처소 안쪽으로 걸어갔다.
범의 아가리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위사들은 힘이 풀린 다리를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호가명은 날 선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호흡이 몇 차례나 이어질 동안 방 안의 모든 것을 두 눈에 담은 후에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 중앙의 침상을 향해 다가갔다.
내내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린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련주님.”
“…….”
“련주님. 그만 기침하십시오.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
“…….”
“련주님!”
“끄으응.”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장일소가 꿈틀댔다.
“기침하셔야 합니다!”
“조, 조용히 좀 말하거라……. 머리가 울리지 않니.”
장일소가 앓는 소리를 내며 비단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썼다.
감히 불경하게 한심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호가명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일각.”
“예?”
“일각 뒤에 다시 와라. 일각……. 딱 일각만 더 자자꾸나.”
“련주님!”
장일소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질 않으니 호가명은 결국 직접 이불을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일어나십시오!”
“끄응…….”
결국 이기지 못한 장일소가 느리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봉두난발이 된 머리와 힘없이 처진 어깨는 과연 이 장일소가 어제의 그 패군인지를 의심하게 했다.
“가명아……. 내가 머리가 아파 죽겠다지 않느냐?”
“그러게, 뭔 술을 그렇게 많이 드셨습니까?”
“……커다란 쥐새끼같이 생긴 놈이 술 한 말을 처먹고도 눈 하나 끔뻑하지 않는데 그럼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 그렇다고 내가 그놈 앞에서 더 못 마시겠다고 엉덩이를 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무공은 왜 익히셨습니까? 내력으로 주독을 녹이면 될 것 아닙니까!”
“아아……. 살살 말하라니까. 머리가 울린다니까.”
장일소가 또다시 앓는 소리를 내고는 말을 이었다.
“너는 평소에는 똑똑한 놈이 이럴 때는 또 멍청해. 내가 내력을 쓰며 술을 먹었다면 그놈은 내가 저보다 무학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말았을 거다.”
“……하면.”
“하지만.”
장일소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내가 술이 더 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 어쨌건 놈이 먼저 뻗었으니까 말이다! 큭큭큭. 너도 그놈이 뒤로 넘어가기 전에 지은 표정을 보았어야 하는 건데!”
호가명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아팠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머리가 아팠다. 혈압이 치솟는 모양이었다.
“……알았으니 운기라도 하십시오. 술도 더 세다는 걸 증명했으니 이젠 굳이 두통을 겪고 계실 필요가 없잖습니까.”
“아직은 안 돼.”
“예?”
장일소가 혀를 차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비가 바람처럼 달려와 꿀물을 내밀었다.
장일소가 받아 든 꿀물을 쭉 들이켜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황세악을 다시 봐야 하거든. 그때 골골대는 모습을 보여 줘야지.”
“……그 하찮은 자 때문에.”
“쯧쯧쯧. 가명아, 가명아. 요즘 너답지 않게 왜 이리 뻔한 소리를 해 대니.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 하찮은 자가 내 목숨을 결정할 순간이 올지도 모르지.”
“…….”
호가명은 퉁명스레 한마디를 하려다 순간 입을 다물었다. 장일소의 표정이 일변한 것이다.
“후회란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해서 겪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기에 겪는 거지.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진즉에 해야 하는 것이다.”
호가명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야말로 정론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 정론을 지켜 나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이제는 저리 사소한 이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아도 될 만한 위치에 올랐건만, 장일소는 만인방의 방주였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장일소의 일과는 거의 혹사에 가까웠다. 호가명의 입장에선 당연히 우려가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런 태도가 있었기에 장일소가 사패련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었단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옥체는 보존하셔야 합니다.”
“가명이 너는 어째 날이 갈수록 앞뒤가 꽉 막혀 가는구나.”
“련주님.”
“알았다. 알았어.”
장일소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누가 보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놈인 줄 알겠어. 끄응.”
그 가벼운 투덜거림을 들으며 호가명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한심?
사패련에 대한 악의로 똘똘 뭉친 이라고 해도 감히 장일소에게 그런 말을 가져다 댈 수는 없다.
고작 삼 년 만에 강남을 모조리 정리하고 사파일통을 이뤄 낸 이에게는 너무도 걸맞지 않은 말이니까.
황세악이 제 발로 찾아와 충성을 맹세한 것은 그 의미가 제법 크다. 그건 사패련의 영향력이 강남을 넘어 강북마저 뒤흔들기 시작했다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
장일소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을 길게 늘였다. 그의 얼굴에는 어떻게든 호가명을 빨리 내보내고 다시 드러눕겠다는 심산이 가득했다.
“화산이 봉문을…….”
하지만 호가명이 말을 꺼낸 순간, 나른함과 귀찮음으로 가득 차 있던 장일소의 얼굴이 변했다. 창백한 얼굴이 괴이하게 일그러지며 심장이 멈출 듯한 귀기가 쏟아져 나왔다.
“……봉문을 풀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순식간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치 호가명이 잠시 착각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결코 착각은 아니었다.
얼굴은 다시 몽롱해졌지만, 표정에 서려 있던 따분한 기색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흐릿하던 두 눈에서 작은 광기가 일렁였다.
“화산이?”
“예.”
“오래도 걸렸군. 오래도 걸렸어. 망할 놈 같으니.”
장일소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물론 호가명은 장일소가 지칭하는 저 ‘망할 놈’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화산검협.’
도무지 그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장일소에게서 저런 표정을 끌어낼 수 있는 이는 이 천하를 통틀어도 화산의 화산검협 하나뿐이니까.
“슬슬 짜증이 나서 직접 끌어낼까 고민까지 했거늘…….”
“멍청한 놈이 예상대로 움직여 준 것이 컸습니다.”
“그렇지. 그……. 그…….”
장일소가 머리를 벅벅 긁는다.
“뭐라고 했더라? 그, 이름이……?”
“……갈천립입니다. 귀도무정 갈천립.”
“아. 그랬지. 그 갈청립.”
“갈천립입니다.”
“사소한 건 넘어가자, 좀. 그래 봐야 조무래기인데.”
장일소가 그런 놈의 이름까지 기억해 줄 이유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여하튼 그 갈가 놈이 예상대로 섬서에서 뒈져 준 모양이구나. 제대로 된 피해도 못 입혔겠지?”
“일방적으로 당했답니다.”
“그렇겠지. 머저리들이니까.”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자, 드디어 모든 배역과 상황이 갖춰졌군. 이제 판만 무르익으면 된단 말이지?”
그 얼굴은 일견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화산의 복귀를 누구보다 기다렸던 이가 바로 장일소임을, 천하는 알고 있을까?
“좋아!”
장일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그의 몸이 흡사 끓는 물처럼 새하얀 증기를 뿜었다. 내력으로 단숨에 몸에 쌓인 주독을 날려 버린 것이다.
“옷!”
“예, 련주님!”
시비들이 다급하게 달려와 장일소의 전신에 의복을 입히기 시작했다. 시비들이 장신구를 채워 주기를 기다리던 장일소가 살짝 짜증이 났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자자, 비켜 보거라.”
시비들을 밀어 낸 그는 아예 제 손으로 직접 반지를 양손에 끼워 넣기 시작했다.
호가명은 마른침을 삼켰다.
화산이라는 이름이 장일소를 움직이게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그조차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호가명의 두 눈에 피어난 것은 묘한 기대감이었다.
삼 년.
약조했던 삼 년의 시간은 이제 거의 지났다.
그 말인즉, 이제 곧 세상이 다시 한번 폭풍에 휩싸일 것이라는 뜻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장일소의 손에 의해.
“모든 일정을 취소해라.”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쌀이 익었으면, 움직여야지. 너무 오래 기다리다 타 버리기 전에.”
장일소가 붉게 칠한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다녀올 곳이 있다.”
실로 사특해 보이는 그 미소를 본 호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장일소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그만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건 스스로 벌일 일을 즐거워하는 미소가 아니다.
제 한 목숨을 불구덩이로 집어 던질 때 짓는 미소였다.
“마지막 패를 손에 넣을 때다. 나도 궁금하군. 내가 과연 이 패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아니면 내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 말이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장일소가 처소 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 쏟아지는 햇살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중천에 뜬 태양을 노려보았다.
푸른 하늘 가운데에 떠 두 눈을 멀게 할 듯한 그 태양 빛을 오롯이 받으며 장일소는 이를 드러냈다.
“얻지 못할 바에는 죽는 게 낫지.”
그의 손이 뻗어져 태양을 가렸다. 단번에 움켜잡는 시늉을 해 보인 그는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며 큰 보폭으로 걸어 나갔다.
광기와 독기를 품은 검은 뱀이 마침내 긴긴 잠에서 깨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