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화. 이제 곧 다시 뵐 수 있을 겁니다. (5)
숨이 막혀 왔다. 아니, 정확히는 이 거대한 대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힘겨워졌다.
황세악(黃世鄂)은 결코 담이 작은 사람이 아니다. 만일 그가 담이 작았다면 결코 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횡행하는 강북에서 단주회(丹柱會)라는 커다란 문파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철석(鐵石)과도 같은 간담(肝膽)은 이 대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한없이 연약해졌다.
마른침을 삼킨 그는 고개를 고정한 채 눈알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화려하다는 표현은 이런 곳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말이 분명하다.
천장과 벽은 붉고 흰 비단으로 치장되어 눈길을 사로잡았고, 곳곳에는 척 봐도 값비싼 장식품과 우아한 자기들이 빽빽하게 놓여 있다. 심지어 대전 중앙에 솟은 기둥들마저 아름다운 문양이 금으로 새겨져 있었다.
황제가 거하는 황궁도 이토록이나 화려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세악을 주눅 들게 한 것은 이 화려한 대전이 아니었다.
한 발 한 발, 긴장을 가득 싣고 조심조심 나아간 황세악은 바닥에 깔린 붉은 비단의 끝에 도달한 순간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눈앞에 놓인 높은 계단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계단 위의 옥좌에 앉은 한 사내의 발치에 닿았다.
자꾸만 떨려오는 목소리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단주회의 회주 황세악이 련주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크게 숙였다 드니 옥좌에 앉은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금색 자수가 놓인 화려하기 그지없는 장포와 전신에 주렁주렁 달린 형형색색의 보석, 창백하기까지 한 흰 피부에 자세와 표정에서 느껴지는 묘한 나른함까지.
저 모습을 보고도 눈앞에 있는 자가 누군지를 모른다면 현재의 강호에 발을 붙이고 살 자격이 없다.
사패련의 련주.
만사의 제왕.
‘패군 장일소.’
황세악의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장일소의 이름을 들었던 게 언제던가. 십오 년 전? 아니면 이십 년 전?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그쯤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광서에서 악명을 떨친 한 무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곧 강남 전체에 이름을 떨치더니, 이내 만인방을 만들고 스스로 방주 자리에 올랐다.
그 만인방의 이름 앞에 신주오패라는 과한 찬사가 붙은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거늘…….
‘사패련의 련주라니.’
단언컨대 천하에서 이리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위상을 드높여 온 이는 오로지 장일소뿐일 것이다.
“흐으음.”
장일소의 입에서 옅은 비음이 흘러나오는 순간 황세악이 움찔하며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차마 장일소를 마주 볼 엄두조차 나질 않았다.
삼 년 전, 만인방의 방주였던 장일소도 감히 그가 마주 볼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의 장일소는 그때와는 비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불과 삼 년.
그 삼 년이라는 시간 만에 장일소는 강남의 모든 사파를 자신의 아래로 복속시켰다. 저항하는 자는 모조리 죽이고, 달아나는 자의 등에 칼을 박아 넣으며.
결코 가능할 리 없다 여겼던 사파일통을, 그 말도 안 되는 위업을 기어이 이루고 만 것이다.
삼 년 전의 장일소는 그저 신주오패의 수장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 신주오패의 수장들마저 수하로 부리는 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邪)의 지배자다.
“황세악이라…….”
자신의 이름이 그 입에서 나온 순간 황세악이 고개를 더욱 깊게 숙였다. 그리고 슬쩍 시선만 위로 올려 장일소를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드높은 계단은 곁눈질로 그의 안색을 살피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펄럭.
그런 황세악의 귀에 장일소의 장포가 크게 휘날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탁. 탁.
이어, 장일소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황세악의 등을 타고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좀 더 빨리 왔어야 했어.’
사패련이 정말로 강남을 완전히 손에 넣을 줄 알았더라면, 진즉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세악은 사패련을 온전히 믿지 못했고, 결단을 망설였다.
그 대가가 지금 이 상황이다.
그는 지금 모든 것을 고스란히 내어 준 채 온전히 장일소의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 충성의 맹세가 늦었다는 이유로 장일소가 목을 잘라 낸다고 해도 황세악은 감히 반항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지닌 모든 것이 장일소의 손끝에 달린 셈이었다.
저벅. 저벅.
계단에서 내려온 장일소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황세악의 앞으로 다가왔다. 치렁치렁 매달린 보석이 짤랑이는 소리와, 커다란 장포가 스치는 소리, 그리고 비단신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마치 지옥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같았다.
“일어나서 고개를 들어 보렴.”
“…….”
조아린 머리 바로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황세악의 전신에 소름이 내달렸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뱀이 등을 타고 오르는 느낌. 아니, 날카롭게 벼려진 면도칼이 목을 아주 얕게 긁어 대는 느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어서.”
황세악은 천천히 다리를 펴고 일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파르르 떨리는 눈이 그의 바로 앞에 선 장일소의 눈과 마주쳤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 냈다.
장일소의 눈은 색이 옅으면서도 아득하게 깊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황세악은 실감했다.
이자는 감히 그가 읽어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가 보일 것이 호의인지 아니면 적의인지……. 그 어떤 것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명백히 격이 다른 존재를 앞에 둔 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제,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련주님. 어, 어리석은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그저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장일소의 붉은 입술 끝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조금?”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 서늘한 음성에, 황세악은 전신의 피가 식는 걸 느꼈다.
“조금이라기에는 꽤 많이 늦었지. 그렇지 않니?”
황세악의 손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뇌리에 지금껏 들었던 장일소에 대한 악명이 모조리 떠올랐다. 그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그가 얼마나 무자비할 수 있는지. 그가 얼마나…… 악마 같은 존재인지.
“려, 련주…….”
장일소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괜찮네. 괜찮아. 사람이란 다 그렇지. 멍청하게 생각 없이 몸을 의탁하는 건 미련한 거니까. 천천히 두들겨 볼 거 다 두들겨 보고 마음을 결정하는 게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야.”
“가, 감사…….”
“그런데 말이야.”
그때, 장일소의 두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이윽고 그가 손을 뻗어 황세악의 얼굴을 가볍게 움켜잡았다.
“내가 원하는 건 사람이 아니야.”
딱히 힘을 가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뻗은 손가락이 얼굴을 뒤덮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 황세악은 마치 얼굴을 거대한 짐승에게 물어뜯기는 것만 같은 공포에 시달렸다.
“흐…….”
얼굴을 덮은 손가락 사이로 장일소의 눈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그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던 그의 두 눈이 형용할 수 없이 들끓고 있었다.
“그 얄팍한 머리로 나를 따르는 것이 이득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해 왔겠지? 나는 너 같은 놈을 좋아하지 않아. 내가 조금만 궁지에 몰리면 가장 먼저 등에 칼을 꽂으려 들 놈이 바로 너 같은 놈들이거든.”
황세악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환영받지 못할 것은 알았지만, 설마 정말로 이렇게 대놓고 핍박해 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장일소의 명백한 적의를 느끼는 순간 전신이 얼어붙고 오금이 저렸다.
“어떨까? 내 등에 칼을 꽂을지를 고민하는 놈을 받아들여 주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여 없애고 후환을 제거하는 게 나을까? 어느 게 더 나은 선택일까? 어떻게 생각해?”
황세악의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입가를 튀틀며 웃는 장일소의 얼굴은 공포 그 자체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머리를 터트리거나 목을 꺾어 버릴 것만 같았다.
“추, 충성을!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련주! 개가 되라시면 개가 될 것이고! 발을 핥으라시면 발을 핥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황세악은 결코 담이 작거나 비굴한 자가 아니었다. 상대가 장일소가 아니었다면 그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이런 말은 내뱉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리는 표현하기 어려운 공포로 질려 버린 지 오래였다.
“기회! 그저 련주께 충성할 수 있는 기회만 주신다면, 반드시 제 충심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흐응.”
얼굴이 붙들린 채 절박하게 외치니, 장일소가 황세악의 얼굴을 쥐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이번엔 목젖께를 가볍게 움켜잡았다.
“틀렸어.”
“…….”
황세악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목을 잡은 장일소의 손에 살짝살짝 힘이 들어갔다. 마치 당장에라도 이 목을 꺾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내고 있다는 듯.
그 어떤 말도 이보다 더 확실한 경고를 전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황세악의 의복이 흘러내린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갔다.
그때 장일소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사람을 원하지도 않지만, 개도 원하지 않아. 개는 충성스럽지만 멍청하지.”
“그, 그럼…….”
“묻겠다, 황세악.”
“…….”
“네가 나의 등을 지킬 수 있을까?”
황세악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지켜 내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반드시 제가 련주를 지키는 방패가 되겠습니다.”
장일소가 말없이 황세악을 빤히 바라본다. 황세악에게 있어서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장일소의 붉은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좋아.”
“…….”
“기억해라, 황세악.”
“예! 예, 련주!”
“네가 사패련에 들어오기 이전에 무엇을 했든, 이 순간부터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
“기억해야 할 것은 단 하나. 너는 나를 위해 죽는다. 오직 나를 위해. 이해했느냐?”
“며,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이 잘못되었잖니.”
길게 자라난 장일소의 손톱이 황세악의 뺨을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할 수 있겠느냐?”
황세악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에는 단호함이 서렸다.
“그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일소의 입가에 사이한 미소가 어렸다.
“나 역시 너를 위해 죽어 주마.”
황세악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드는지 장일소가 황세악의 목을 잡은 손을 놓고는 소리쳤다.
“술!”
“예, 련주님!”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빠른 걸음으로 술과 잔이 놓인 쟁반을 가져왔다.
“흐음.”
장일소는 미소를 머금은 채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쪼로록.
두 잔에 술을 넘칠 정도로 채운 그는 다시금 황세악의 목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길게 자란 손톱이 목을 천천히 긁었다.
목으로 손톱이 파고드는 감각이 소름 끼치게 밀려왔지만, 황세악은 감히 움찔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저 얼음장처럼 서서 장일소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었다.
주르륵.
그의 목을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장일소는 피가 흠뻑 묻은 손가락을 잔 위로 가져갔다.
또옥!
한 방울의 피가 잔 위로 떨어지고, 또 한 방울의 피가 다른 잔 위로 떨어진다.
촤락!
손을 휘둘러 황세악의 피를 털어 버린 그는 이제 손톱으로 제 손가락을 그었다. 이번에는 장일소의 핏방울이 잔으로 떨어졌다.
또옥.
그렇게 두 잔 모두에 피를 섞은 장일소가 미소 지으며 하나를 황세악에게 내밀었다.
“마셔라.”
“제, 제가 감히…….”
“이건.”
장일소가 잠시 뜸을 들였다.
이어 나올 말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듯.
“언젠가 네가 나를 위해 흘릴 피와 언젠가 내가 너를 위해 흘릴 피다.”
“…….”
“어찌하겠느냐?”
입술을 살짝 깨문 황세악이 장일소가 내민 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일말의 주저도 없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켰다.
“좋군.”
장일소 역시 흡족한 기색으로 남은 한 잔의 술을 제 입에 털어 넣었다.
“지금 이 시간부로 단주회라는 이름은 없다. 오직 사패련의 황세악이 있을 뿐.”
황세악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그리고 땅에 파고들 기세로 머리를 깊게 숙였다.
“이 목숨을 련주님께 드리겠습니다.”
“가히 훌륭한 선물이야.”
황세악의 어깨를 두드린 장일소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의 모습이 모두 착각이었던 것처럼.
“가자. 한 잔의 술로는 부족하지. 우리 오늘 밤새도록 마셔 보자꾸나.”
“예!”
“좋아. 아주 기분이 좋아. 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대전에 쩌렁쩌렁 퍼져 나갔다.
강북의 사파 단주회가 사패련……. 아니, 장일소에게 완벽한 복속을 맹세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