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9화. 이제 곧 다시 뵐 수 있을 겁니다. (4)
회의실 상석에 앉은 현종이 멍한 눈으로 입구 쪽을 보았다.
온갖 상자와 보따리가 천장에 닿을 만큼 쌓여 있었다.
눈을 끔뻑이며 그 광경을 보던 현종은 옆쪽에 앉은 황종의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저게 다…….”
“선물입니다.”
“선물?”
현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화산이 이름을 날린 뒤, 시시때때로 유지들의 선물이 날아들고는 했다. 살림이 곤궁한데, 주는 선물을 왜 마다하냐고 악을 써 대는 늙은 놈 하나와 어린 놈 하나 때문에 받기는 했지만 늘 내심 탐탁잖게 여기던 현종이었다.
그런데 화산도 아닌 이 은하상단에까지 선물이 날아든다고 하니 뭔가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걸 굳이 저리 쌓아 둘 필요가 있겠소?”
돌려보내라는 말을 억지로 집어삼키는 현종을 보며 황종의가 기분 좋게 웃었다.
“짐작하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저 선물들은 서안의 양민들이 화산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보내온 것들입니다.”
“……서안 분들이?”
“예. 농사지어 수확한 것들과 가게에서 팔던 물건 같은 것들이지요. 재화의 가치로 따지면 그리 대단치 않은 것들이나, 장문인께서 이런 선물들은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아서 굳이 안으로 들였습니다.”
“흐흠. 그러셨구려.”
황종의의 눈에 현종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모습이 똑똑히 들어왔다. 돈 많고 힘 있는 이들이 선물을 보냈을 거라 짐작했을 때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더니, 힘없는 양민들이 감사를 표한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뿌듯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보통은 반대일 터인데.’
이래서 화산이라는 문파가 재미있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구려.”
“다행히 저희가 많이 늦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현상의 말에 현종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때 구석에서 슬슬 눈치를 보고 있던 홍대광이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러자 벼락같이 타박이 쏟아졌다.
“아니.”
아니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지금 입을 연 게 누구인지 즉각적으로 알아챘다.
“여기가 시장바닥도 아니고, 뭔 동네 거지도 들어와 있어?”
“도, 동네 거지라니! 내가 그래도 개방 분타주인데!”
“그러니까 개방 분타주씩이나 되시는 양반이 여기에 왜 들어와 있냐고요. 아저씨 천우맹이세요? 내가 모르는 새에 개방이 구파일방 탈퇴하고 천우맹에 가입이라도 했나?”
홍대광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동네 황구도 삼 년이나 나이를 먹으면 좀 진중해지겠다, 이 새끼야.’
저건 어떻게 시간이 삼 년이나 흘렀는데, 저렇게 변한 게 없을까? 이 정도면 초지일관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기도 민망하다.
“그,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와, 이젠 중요한 것도 지 마음대로 정하시네. 동네 거지들 모아 놓고 대대적으로 쪽박이라도 좀 깨든가 해야지.”
홍대광은 필사적으로 청명을 외면하며 현종에게 물었다.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제가 화산에 올랐습니다만, 화산에는 아무도 없던데…….”
“아아.”
현종이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봉문은 했지만, 도무지 그 안에서만 수련하기가 어려워 거처를 옮겼었다네.”
“아니, 왜…….”
현종 대신 현영이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하루가 다르게 뭐가 부서지고 박살이 나는데, 거기서 무슨 수련을 하는가?”
“…….”
어……. 그렇긴 했지.
홍대광이 들여다봤을 때도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한 줄 알았을 정도로 여기저기가 박살 나 있었으니까.
“그때라도 옮겼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있었으면 서안이고 나발이고 화산 건물부터 새로 지었어야 할 걸세. 담벼락이라도 남아나야 봉문이지. 뭔 놈의 수련을 그리 과격하게 하는지! 에잉!”
현영이 다시 생각해도 화가 치민다는 듯 혀를 차 대자 현종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문제도 있었지만, 봉문을 했음에도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서 수련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네. 하여 어쩔 수 없이 문파를 비우고 사람이 찾지 않는 심산으로 가 수련을 했다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풀뿌리 뜯으면서.”
“멧돼지 잡고.”
“왜? 나무 베서 전각 올리는 게 더 좋으냐?”
현영이 눈을 부라리자 화산의 제자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홍대광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 물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아시고 제때 도착하신 겁니까? 봉문을 깨고 나오시다가 피난 가는 서안 양민들을 보기라도 하셨습니까?”
“으음?”
현종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홍대광을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예?”
“자네가 화산에 올라와 우리를 찾지 않았던가?”
“그, 그걸 어떻게? 화산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홍대광이 눈을 휘둥그레 뜨는 순간, 청명의 가슴이 울룩불룩해지더니 그 안에서 하얀 무언가가 잽싸게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탁자 위에 두 발로 서서 배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저, 저거.”
홍대광의 얼굴이 멍해졌다.
탁자 위로 올라온 백아가 뿌듯한……. 짐승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만큼 확연하게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지금 분명히 ‘엣헴’이라고 했을 것이다.
“저거 저거, 으이구. 겨우 밥값 한 번 했다고 잘난 체하는 것 보소. 진작에 털을 벗겨 버렸어야 하는 건데, 저거.”
청명이 혀를 차 대자 배를 내밀던 백아가 시무룩해져선 까맣고 커다란 눈으로 청명을 보다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백천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밥값은 충분히 하고 남았지. 양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 있다면 저 녀석 먹이쯤이야 평생 대 줄 수 있다.”
“저 새끼 아주 소만큼 퍼먹는데! 그 돈은 사숙이 벌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청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다 시선을 흘긋 돌렸다.
“하기야…… 밥값 못하는 인간도 있는데.”
움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개방 분타주쯤 되는 양반이 짐승 기척 하나를 못 느껴서야……. 뭐요? 아무도 없어? 아무도?”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 홍대광은 멍하니 백아를 바라보았다. 눈에 너무나 잘 띄는 새하얀 털을 보고 있자니 변명할 말도 떠오르질 않았다.
다행히 현종이 그런 홍대광을 구해 주었다.
“화산을 아주 비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저 녀석에게 화산을 지키게 했네. 개들은 밥을 챙겨 줘야 하니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지만, 저 녀석이야 때 되면 찾아와서 밥 먹고 갈 능력은 되니까.”
“그러니까…… 저는 저놈을 못 봤는데, 저놈은 저를 보고 뭔가 변고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채고, 화산에 그 사실을 알렸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홍대광이 허탈하게 의자에 늘어졌다.
“아니……. 뭔 내가 짐승만도…….”
차마 그 뒷말은 할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저 작은 영물 놈 덕에 피바람을 면할 수 있었으니 고마워해야 할 일인데…….
“키이!”
앞발로 바닥을 탕탕 쳐 대는 모양이 왜 이토록 얄미운 것일까? 왜?
“어쨌거나…… 다행입니다.”
서안의 운명을 족제비가 구했다니. 이건 알아도 도무지 말하고 다닐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제 봉문은 푸신 겁니까?”
“그렇다네.”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아가 소식을 전해 오지 않았다고 해도 이제 슬슬 준비가 끝났다고 여기던 차였네. 생각보다 봉문이 길어졌으니 더 끌 상황도 아니었지.”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신 겁니까?”
그 말에 현종의 얼굴이 눈에 보이게 떨떠름해졌다.
“……쌀이 익어야 밥이 된다는 놈이 있어서 그랬는데, 그놈의 쌀은 무슨 모래로 만들었는지, 삼 년 내내 끓여도 익지를 않더이다. 그러니 내가 뭘 어쩌겠는가?”
“아, 그게 제 탓이에요? 사형들 탓이지? 뭐 실력이 늘어야 늘었다고 해 주지!”
많이 는 것 같은데?
아니, 좀 과하게 는 것 같은데?
사파를 말 그대로 씹어 먹던 화산 검수들의 모습을 떠올린 홍대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면 장문인.”
그때 황종의가 넌지시 현종에게 물었다.
“봉문의 목적은 달성하신 겁니까?”
현종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머금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종의 입에서 단호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적어도 이젠 천하의 누구도 감히 화산의 실력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은 가지고 돌아왔소이다.”
확연한 자부심이 어린 말이었다.
현종은 결코 쉽게 자만하는 이가 아니다. 남들이 어깨에 힘을 줄 만한 상황에서도 늘 겸손한 이가 아닌가. 그런 그가 저리 말하는 것만으로도 지난 시간 화산이 겪어 온 고난과 노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이미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이니, 짐작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게다가 평소 같았으면 바로 치고 들어왔을 악귀 같은 놈도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게 이 사실을 더없이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물론 표정으로는 ‘쥐꼬리만큼 실력 늘었다고 어깨에 힘 들어갔다가는 어디 가서 처맞고 어깨 내려앉을 텐데?’라는 말을 쉴 새 없이 해 대고 있지만, 저놈이 그걸 말로 안 하고 표정으로 해 댄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 아니던가?
“감축드립니다, 장문인!”
“감축드립니다!”
황종의와 남양으로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회의에 참석한 위립산이 포권을 하며 축하를 전했다.
현종 역시 겸양을 떨지 않고 웃는 낯으로 그 축하를 받았다.
“모두 제자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해 준 결과외다.”
훈훈한 광경이었다.
화산 제자들이 중얼대는 말이 들리지만 않았어도.
“안 하면 뒈지는데 별수 있나.”
“나는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됐다. 그냥 그걸로 됐어.”
“다시 할 바에야 그냥 환속해서 집에 가고 말지.”
“어제 자는데 꿈에서 수련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우물로 뛰어들고 싶더라.”
“저는 한 번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홍대광은 필사적으로 귓구멍을 닫고 그 무시무시한 말들을 무시했다.
‘그래, 얘들 원래 이랬었지?’
삼 년이란 시간이 많이 긴 시간이 아닐 텐데, 왜 이리 적응 안 되게 새로울까?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어지자, 현영이 본론을 꺼냈다.
“일단 당장은 서안을 조금 더 안정시켜야겠지만, 화산이 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연스레 회의에 녹아 든 홍대광이 넌지시 현종을 향해 물었다.
“그럼 그 뒤에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흐음.”
현종이 빙긋 미소를 짓고는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거야 저 망둥이 녀석이 가장 잘 알지 않겠소?”
홍대광의 시선이 현종을 따라 옆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심술보 덕지덕지 붙은 청명을 보자니 왠지 그가 다 불안해졌다.
“……그런데 너는 아까부터 왜 자꾸 그렇게 심통 난 얼굴이냐?”
“내가 뭘요?”
백천이 피식 웃으며 옆에 있는 청명의 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분타주님. 겨우 봉문을 풀고 나왔는데, 앞에 적들을 두고도 검 한 번 못 휘둘러 봐서 배알이 뒤틀린 것뿐이니까요.”
“그 새끼들 껍데기를 벗겨 버렸어야 하는 건데!”
“…….”
확실히 이 새끼는 변한 게 없다.
“그보다.”
청명이 살짝 턱을 들고 홍대광을 향해 말했다.
“이제 막 산에서 내려온 참이라 돌아가는 상황을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요. 마침 여기 상단주님이랑 거지 아저씨가 있으니까 물어보면 되겠네요. 말 좀 해 줘 봐요.”
“무엇부터?”
“일단.”
청명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장일소 그 새끼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부터.”
그의 두 눈에 칼날 같은 빛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