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8화. 이제 곧 다시 뵐 수 있을 겁니다. (3)
“방장!”
황급히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법계를 보며 법정이 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법계는 어찌 보면 오히려 법정보다 더 진중한 사람이다. 소림의 방장을 보좌한다는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이기 때문이다.
그런 법계가 이리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대체로 정해져 있다.
“방장! 섬서의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법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
예측이 맞아떨어졌지만 기분 좋기는커녕 눈앞이 아찔했다.
“……화산이더냐?”
“예?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법정의 입에서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구나.”
법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개방에서 전해 온 소식입니다. 서안에 진입했던 사파인들이 은하상단을 공격, 서안의 중소 문파들이 합심해서 그들을 막아섰다 합니다.”
“……중소 문파들이? 그게 사실이냐?”
“예.”
“……화산의 속가와 종남의 속가들이 모두 말이냐?”
“그곳에 속하지 않는 이들마저 다 같이 맞서 싸웠다 합니다.”
법정의 안색이 좀 더 어두워진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당연히 그들만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때늦지 않게 달려온 화산이 모조리 분쇄했답니다.”
“……종남은 뭘 했다더냐?”
“종남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법정이 아무 말 없이 천장을 응시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무거운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라면…….”
입꼬리에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하필이면 그 서안에 큰 위기가 닥쳤고, 그 위기에 서안의 문파들이 똘똘 뭉쳐 대항했고, 그들이 패퇴하기 직전에 화산이 등장하여 악적들을 쓸어 버렸다?”
“그러합니다.”
법정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서안의 문파들은 화산에 더없는 고마움을 느낄 테고, 화산이 사파의 마두들을 제압하여 양민을 구했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천하에 퍼져 나가겠구나.”
“…….”
“지난 삼 년간 다른 문파들이 죽을 고생을 해 가며 혼란을 수습하고 사파들을 억제할 동안 봉문이랍시고 문을 걸어 잠그고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문파가, 봉문을 풀자마자 또 칭송을 받는구나.”
법정은 울화가 터진다는 듯 연신 불호를 외어 댔다.
“……일부러 계획을 세워도 이리 완벽하게 돌아가지는 않을 터, 대체 왜 항상 화산에만 이리 좋은 일들이 생긴다는 말인가…….”
그 나직한 한탄에 법계는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사실 이 모든 일은 반쯤은 소림이 자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숭산에서 거리가 있었다고 한들, 소식을 듣자마자 제자들을 차출하여 전력으로 서안으로 향하게 했다면 어쩌면 그들보다 먼저 서안에 당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 저들이 서안으로 가는 동안 양민들이 사는 마을을 불태우고 학살을 저지른 것을 감안하면 분명 그들보다 먼저 서안에 도착하여 중소 문파들과 합심해 사파인들을 주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안에 소림승들을 보내지 않기로 한 것은 다름 아닌 법정이었다.
그러니 냉정하게 보아 법정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하지만 법계는 차마 법정에게 그 사실을 지적할 수 없었다.
“……화산의 피해는 어떠하다더냐?”
“그게…….”
법계가 대답하기 곤란한 듯 머뭇대다 간신히 입을 뗐다.
“제가 정확하게 알아본 것은 아니나, 그…… 딱히 피해랄 것은 없는 모양입니다. 수월하게 무찔렀다는 말이…….”
“수월하게?”
법정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강서칠살을 필두로 그 쟁쟁한 사파들이 떼로 몰려갔는데, 그들을 피해 없이 제압했단 말인가? 그 화산파가?”
“예…….”
법정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화산검협인가?”
“예?”
“하긴, 그래. 그 아이라면 그럴 만하지. 삼 년의 시간이면 이무기가 용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 그 아이가 전면에 나섰다면…….”
“저…….”
법계가 여전히 말하기 어렵다는 듯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개방의 소식대로라면 화산검협은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뭐?”
법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산검협뿐 아니라 과거 화산에서 명성을 떨쳤던 화산오검은 대부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그들을 제압한 것은 순전히 화산의 다른 제자들로…….”
쿵.
법정의 손이 다탁 위로 떨어지며 작은 울림이 퍼져 나갔다. 법계에게는 이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법정이 어지간해선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단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뭔…….”
나직이 중얼거린 법정의 얼굴에 망연함이 스쳤다.
대체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인가?
과거 그가 알던 화산의 전력이라면, 지금 서안으로 몰려간 이들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벌였어야 맞다. 운이 좋아 승리를 거둔다 해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감수해야 맞다.
물론 성장이 빠른 젊은 무인들을 데리고 삼 년의 봉문을 했으니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장의 상황을 내 눈으로 보지 못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못해도 세 배는 더 강해져야 가능한 일이거늘.’
아무리 성장이 빠른 젊은 무인들이라고 하나, 불과 삼 년 만에 이만한 전력의 상승을 이뤄 내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법계가 들은 바가 사실이라면, 화산의 전력은 이제 구파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아니. 구파에서도 중간께에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
그 화산이…….
법정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천하후기지수 비무대회에서 그들을 처음 봤을 때.”
“예, 방장.”
“나는 그들이 강호에 새로운 활력을 넣어 주리라 생각했다. 지난 백 년 동안 강호를 이끈 문파들이 너무도 안일해졌기 때문이지. 화산검협 같은 무인이 이끄는 젊은 문파라면 그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하리라 믿었다.”
“…….”
“그런데…….”
법정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안일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구나.”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제 화산은 더 이상 법정이 어찌 할 수 있는 문파가 아니다.
“……화산에 연통을 넣거라.”
“뭐라 전합니까?”
“봉문을 푼 것을 축하한다 해야겠지.”
“……그리 전하겠습니다.”
법정이 대답 없이 눈을 감자 법계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정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데, 굳이 뭉개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가 조심스레 물러나자 법정이 다시 눈을 떴다. 입에서 허탈한 불호가 새어 나왔다.
“아미타불…….”
화산의 소식이 퍼져 나가면 겨우 진정되어 가던 강호가 다시 들썩이기 시작할 게 분명했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화산은 강호인들의 주목을 받는 문파가 되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법정이 걱정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지난 삼 년은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어찌 보면 안정의 기간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안정이라기보다는 수습의 시간이었다.
저 화산이 두문불출한 순간부터는 강호에 큰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법정에게는 들리는 것만 같았다. 멈춰 있던 커다란 수레바퀴가 다시 굴러가는 굉음이.
“……아미타불.”
그리고 이제는 누구도 이 흐름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 * *
서안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떠났던 양민들은 환란이 제압되었다는 말을 듣고 서안으로 돌아왔고, 뒤숭숭했던 분위기도 급속도로 진정되었다.
물론 크나큰 위기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는 은하상단 안에서만 이루어졌고, 다른 양민들은 딱히 피해를 입은 게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마저 안심시킨 것은 그 화산이 바로 은하상단에 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럼 이제 화산이 봉문을 푼 것인가?”
“그렇지. 그러니 여기 있지 않겠나?”
“거참 기가 막힌 일이로군. 어쩌면 이리 딱 맞춰서 봉문을 풀 수가 있는가?”
“멍청한 소리 하지 말게.”
“응?”
“우연히 맞아떨어진 일이 아니지. 원래 화산은 봉문을 더 이어 가려 했을 걸세. 그런데 악적들이 몰려온다는 소리를 듣고는 과감하게 봉문을 풀어 버린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 그렇지. 그게 더 말이 맞는군.”
말을 주고받던 이의 시선이 은하상단의 정문으로 향했다.
“여하튼 대단하신 분이네.”
“누구 말인가?”
“누구겠는가? 당연히 화산의 장문인이신 현종진인 말이지! 목적이 있어 한 봉문일 텐데, 그걸 풀고 나온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에이. 그건 좀 이상한 소리 같군. 그래도 정파인데 사람들이 위험하면 당연히 만사 제치고 달려와야 하지 않나?”
“종남은?”
“……응?”
“종남 말일세. 자네 말이 맞다면 종남은 뭘 했는가?”
“그건…….”
“내 알기로 자네 집안에도 종남 사람이 있다던데. 종남 얼굴에 먹칠하는 소리를 자네 입으로 해도 괜찮겠는가?”
“끄응.”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핀 이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자네뿐만이 아닐세. 나도 마찬가지지. 어디 이 서안에 종남과 관련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몇 다리 건너면 다들 종남과 어떻게든 인연이 있는 이들이지.”
“그렇지. 여긴 서안이니까.”
“하지만 말일세……. 이제 아마 뭔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사람들은 종남이 아닌 화산을 찾게 될 걸세.”
“……설마 그렇게까지?”
“자네는 집안에 강도가 쳐들어온다면 누구를 찾아가겠는가?”
질문을 들은 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도 화산이라는 두 글자가 종남보다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저 화산이 종남보다 빨리 왔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닐세. 생각해 보게나. 종남이면……. 아니, 종남이 아닌 어떤 문파라 해도 이만한 일을 했으면 웬만큼은 거들먹거리지 않았겠는가?”
“그, 그렇지. 그런데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은가? 그만한 일을 했으니까.”
“그렇지. 잘못된 건 아닐세. 그러니 오히려 화산이 대단하다는 거지. 보게. 화산파 분들을 코빼기도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시선이 은하상단의 정문으로 향했다.
“협객은 협행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하더니, 그 말을 정말 지키는 곳이 있을 줄은 몰랐네. 설마 이만한 일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은인자중할 줄이야.”
“……그릇이 크구먼.”
“암, 크지. 너무 크지.”
은하상단 앞을 지나는 이들의 입에서는 모두 이와 비슷한 말이 오고 갔다.
화산에 딱히 좋은 감정 없던 이들이라 해도, 단숨에 달려와 그들을 구하고 그 공을 내세우지 않는 이들에게 호의를 품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서안을 생각해 주는 건 화산밖에 없다는 거지.”
“저 소림이니 무당이니, 단 한 놈도 서안을 도우러 오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멀리까지 갈 것도 없네. 저 종남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허이. 종남은 봉문 하지 않았나?”
“화산은? 화산은 봉문 안 했는가? 둘 다 봉문을 했는데 한 문파만 봉문을 풀고 나왔으면 평가가 다른 게 당연한 일 아닌가!”
“그건 그렇지…….”
양민들은 서안을 덮친 사파가 얼마나 강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기에, 화산의 전력을 평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화산이 서안을 구하기 위해 발 벗고 달려왔다는 사실만은 확연하게 이해했다.
서안이 쑥대밭이 되었다 해도 그 화살은 사실 화산이 아닌 종남을 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원수나 다름없는 문파를 대신해 양민들을 구하러 온 이들을 어찌 칭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결과.
이제 서안에선 종남의 이름보다 화산의 이름이 더욱 커졌고, 이를 부정하는 서안 사람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각.
적당히 후처리를 마친 화산의 중진들이 은하상단의 회의실에 둘러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