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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87화 (883/1,567)

887화. 이제 곧 다시 뵐 수 있을 겁니다. (2)

벼락처럼 벌어졌던 상황은, 그 수습 과정 역시 벼락같았다.

항복하거나 부상을 입은 사파인들의 무공을 전폐한 화산의 제자들은 그들을 일단 은하상단의 창고에 가두었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재물이 가득한 창고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지만, 과연 그들이 그 사실을 기뻐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화산이 가장 우선시하여 움직인 건 당연히 부상자의 치료와 시신 수습이었다.

“어떻습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더 이상 죽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

하나의 의방에서 치료할 수 있는 수가 아니었기에, 현영은 은하상단의 전각 하나를 통째로 의실로 만들고 서안의 의원들을 끌어모았다.

그들의 대표격 되는 노의원의 말에 현영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응당 다행이지, 불행일 건 뭡니까?”

“……그게…….”

의원이 슬쩍 현영의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만큼 큰 부상을 입은 이들은 치료 기간이 굉장히 길어집니다. 못해도 석 달 이상은 꼼짝 않고 누워서 치료받아야 하지요.”

“그래서요?”

“일어나도 예전처럼 몸을 쓸 순 없게 될 겁니다.”

“아아.”

현영이 대충 의원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정확히는, 아시다시피 저런 중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비싼 약재를 써야 합니다. 아무리 아껴 쓴다고 해도…….”

“걱정 마십시오, 의원님.”

현영이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 비싼 약재의 가격은 평범한 이들의 벌이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리라. 치료하면서도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의가에 있는 약재를 몽땅 끌어모아 왔을 텐데, 그 약재 값조차 제대로 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이곳에서 다친 이들의 치료비는 모두 화산에서 댈 것입니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예.”

현영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만 해 주신다면…….”

이건 이미 현종과 합의가 된 일이다.

사실 화산이 굳이 이들의 치료비를 대야 할 이유는 없다. 애초에 그들은 화산을 노린 이들이 아니라 서안을 노린 이들이니까. 화산이 있든 없든 그들의 마수는 서안을 덮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시시콜콜한 이치와 손익 문제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 우리가 이치만을 따진다면, 저들 역시 우리에게 그럴 것이다. 서로가 이치를 따지는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원하는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구나.

옳은 말이었다.

돈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돌아가는 어느 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도 확인했으니 더더욱 옳은 말일 것이다.

“저희 역시 악도와 맞서 싸우신 분들에게 비싼 치료비를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설프게 약재를 아끼고 제대로 시술을 하지 못하면 후유증이 많이 남을 수도 있는 터라.”

“돈은 신경 쓰지 마시고, 최대한 치료해 주십시오.”

현영은 흰 천 위에 누운 부상자들을 둘러보았다.

“의기를 보인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노의원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의기를 보인 이들에게 박수를 쳐 주는 일이야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제 재물을 내어 놓는 건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화산은 지금 딱히 이 일에 이 정도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아닌가.

기껏해야 장소나 제공해 주는 것으로 생색을 낼 줄 알았는데, 이리 파격적으로 나오니 절로 감탄하게 되었다.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의원님. 저희 의약당에서도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예. 큰 도움이 되고 있…….”

푸욱!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 뭔 엄살이 이리 심해요! 우리 사형들은 이거보다 더 큰 침으로 찔러도 신음 하나 안 흘리는데!”

“소, 소저……. 너무 아프…….”

“시끄러워요. 이쪽으로 몸 돌……. 응? 으응? 여기가 아닌가? 어……. 너무 오랜만에 하니까 좀 헷갈리는데…….”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가 태연하게 흘러나왔다.

“뭐, 별 상관없겠지. 다시 꽂을게요.”

“사, 살려…….”

푸욱!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대침 박힌 이의 발이 천장을 향해 솟구치듯 뻗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그 발끝을 멍하니 바라보던 현영과 의원은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뭔가 말을 하려던 현영은 주먹을 입에 대고 크게 헛기침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장로님.”

훈훈하게 시작하여 어색하게 끝나 버린 대화였다.

“제자들의 시신은 모두 수습했느냐?”

“예, 아버님.”

위립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치른 격전을 떠올리면 사실 사상자가 많다고 할 순 없다. 전멸했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가혹한 전투였으니까.

하지만 한 문파의 문주 된 입장으로 사상자가 적다고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아남은 것이 부끄럽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버님. 아버님께서 문주로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문도들 모두가 보았습니다.”

이건 그저 위립산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위소행은 정말 그리 생각했다. 위립산의 아들이라는 것이 더없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는 화영문의 문도들 역시 위소행과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 전투에서 위립산은 그가 단순히 화산의 후광만으로 문파를 이끌어 나가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 냈다. 온화함과 침착함뿐만 아니라 무사다운 의기도 갖추었음을 제자들 모두 알았을 것이다.

“시신은 어찌하기로 했느냐?”

“고향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희생을 치른 다른 문파들은 대부분 그 문도가 서안 출신이지만, 먼 곳에서 문파를 옮겨 온 화영문도들의 고향은 남양(南陽)이었다. 적어도 그들을 고향에서 쉬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내가 직접 가야겠구나.”

“아버님. 몸이 성치 않으십니다.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아니다.”

위소행의 만류에도 위립산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화영문의 문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아버님…….”

위립산이 옅게 웃었다.

“그런 얼굴로 보지 말거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 하지만 너는 네 사형들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누구보다 정의롭지 않았더냐.”

“예. 그 마지막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위소행의 두 눈에 단호한 빛이 서리자 위립산은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는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 일로 화영문의 제자들은 한층 더 무인다워질 것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위안이었다.

“그럼 서둘러야겠구나. 먼 길이니.”

“아, 아닙니다.”

“음? 시신이 상하기 전에…….”

“화산 장문인께서 빙정을 구해 주기로 하셨습니다. 하루 이틀 정도는 걸릴 터이니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빙정을?”

위립산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귀한 빙정을 시신을 보호하는 데 쓰겠다니……. 이건 현종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위립산조차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한 조치였다.

“빙정이 있으면 시신이 상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하루라도 빨리 가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빙정을 구하는 데에 이틀 정도 걸린다고 하니 조금은 정양을 취하시는 게…….”

위립산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빙정이 화산에 있다면 이틀이나 걸릴 리 없고, 빙정이 없어 구해야 한다면 이틀 만에 구해질 리가 없다. 이건 위립산이 몸을 돌보지 않고 나설 것을 걱정한 현종의 배려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자꾸나.”

“예, 아버님.”

위립산이 슬쩍 시선을 주며 말했다.

“소행아.”

“예.”

“청명 도장은 만나 보았느냐?”

“…….”

위소행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립산이 희미하게 웃었다.

“슬프기는 하지만, 이 또한 무가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당연히 겪어야 할 일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억누를 필요는 없단다.”

“…….”

“문주로서의 명이니 가서 청명 도장과 본산의 제자 분들께 감사를 표하고 오거라.”

“하지만…….”

“그것 역시 소문주로서의 의무다.”

위소행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다녀오거라.”

“예.”

위소행은 조심스레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화영문을 벗어나 화산이 거하고 있는 은하상단으로 향했다.

타닥. 탁탁!

처음에는 느릿하던 걸음이 이내 점점 더 빨라졌고, 종내에는 빠른 뜀박질로 변해 갔다.

‘청명 도장님!’

그때 청명이 그를 구해 준 이후로 감사의 인사조차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해.’

소문주로서 문파의 일을 수습하는 것도 큰일이지만,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 역시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

숨이 가빠질 만큼 속도를 높인 그는 단숨에 은하상단의 지척까지 달려갔다.

그런데…….

은하상단을 목전에 둔 위소행의 발이 점점 느려졌다.

그러다 이내 멈춰 버렸다.

그의 얼굴에 망설임과 함께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예전 같았으면 단숨에 은하상단으로 뛰어들어 청명이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갔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발이 무거웠다.

‘왜지?’

그 변화를 자신도 이해할 수 없어서 위소행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어쨌든 감사의 말은 꼭 해야 하니 은하상단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저기.”

“예?”

지나던 인부에게 말을 건 위소행이 다소 굳은 얼굴로 물었다.

“화산 분들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식당에 계실 겁니다. 식사하실 시간이라서. 저기 보이는 저 큰 전각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위소행이 천천히 식당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껄끄러움이 자꾸만 그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다.

식당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질 못하고 머뭇대는 모습이 위소행과 비슷한…….

“분타주님?”

“으응? 소문주시군.”

홍대광이 위소행을 보더니 살짝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위소행은 뒤에 따라붙어 나오려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이라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러자 홍대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산신룡……. 아니, 화산검협에게 할 말이 있어서 오긴 왔는데.”

“예.”

“그…… 뭔가 좀 껄끄럽다고 해야 하나?”

위소행이 눈을 크게 떴다.

“화산이 강해진 건 알겠는데…… 참, 그게 뿌듯하고 자랑스럽긴 한데. 뭔가 이번에 본 화산의 모습이 내가 아는 거랑은 너무 달라서 괜히 그…….”

우물쭈물 이어지는 홍대광의 말을 들으며, 위소행은 그제야 오는 길에 느꼈던 껄끄러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멀게 느껴지는 거구나.’

괜히 그들을 마주했을 때, 과거의 그들 같지 않다면 어떡하나 겁이 난 것이다.

멍청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위소행뿐만 아니라 홍대광도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보면 화산이 보여 준 모습이 그만큼 낯설긴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끄응.”

홍대광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혼자라면 모를까 위소행 앞에서도 내내 전전긍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들어가 보세.”

위소행이 안 왔다면 전각에 귀를 대고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들어 볼 심산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젠 쳐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애써 태연함을 가장한 홍대광이 단번에 전각의 문을 열어젖혔다.

“여어, 화산검…….”

너스레를 떨려던 홍대광의 입이 절로 슬그머니 다물어졌다.

문을 열자마자 안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말없이 그를 돌아본 것이다.

아니, 그가 들어오기도 전에 저 모습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 이거…….’

그가 알던 왁자지껄한 화산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다 굳어 있었다.

늘 외인을 따뜻하게 맞이하던 과거의 화산파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새삼 제 짐작이 맞았다는 생각에 홍대광이 앓는 소리를 흘리려는 찰나.

“아니이이이이이이!”

‘응?’

저 앞에서 익숙한 뒤통수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꽥 질렀다.

“거, 뭐! 그게 뭔 사람 새끼들이라고 밥을 처먹여! 밥을!”

“……몇 번이나 말했잖으냐. 그러다 굶어 죽는다니까?”

“굶어 뒈지든 삶아 뒈지든 내 알 바냐고! 아무튼 이것들이 배가 불러 가지고! 저 시골 가면 아직도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그런데 뭐? 밥? 바아아아압? 저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들한테 밥을 줘? 내가 그 새끼들 줄 밥 있으면 동네 개를 먹이지! 개를!”

“아니……. 진짜로 죽는다니까? 정말로 꽥, 하고 죽는다니까?”

“아? 아……. 아!”

청명이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쳤다.

“뭔 말인지 이해했어.”

“응?”

내내 지친 얼굴로 설득하던 백천이 순간 불길함을 느끼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이 상쾌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죽을까 봐 걱정이란 거지?”

“그, 그렇지. 아무리 사파 놈들이라지만 굶겨 죽이는 건…….”

“그럼 굶어 죽는 일 없도록 미리 죽이면 되겠네.”

“……어?”

“내가 지금 가서 모조리 목을 따 버리면 다 해결 아냐?! 잠깐만 기다려! 영원히 밥 처먹을 필요 없게 만들어 주고 올 테니까!”

“잡아!”

“저 새끼 잡아!”

“아오! 빌어먹을 제발 얌전히 밥 좀 먹자! 이 망할 놈아!”

“투덜거릴 시간 있으면 잡으라고!”

검을 뽑아 들고 내처 달리려는 청명에게 화산의 제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덮치고 눌렀다.

“놔! 안 놔? 이 새끼들 싹 다 미친 거 아냐? 지금 사파를 살리겠다고 나를 공격해? 니들 도대체 언제부터 사파랑 붙어먹었냐!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나 때는!”

“아, 좀 닥치라고! 주둥이! 주둥이!”

“아악! 거기 똑바로 잡아! 똑바로!”

“제발…… 제발 밥 좀 먹자. 제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홍대광의 귓가에 순간 키득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

위소행이 언제 긴장했냐는 듯이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변한 게 없어.’

그들이 강해진다 해도, 그리하여 그들이 과거와 다른 위상을 가지게 된다 해도.

화산은 그저 화산일 뿐이다.

“청명 도장님!”

그 사실을 깨달은 위소행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청명을 크게 부르며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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