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886화 (882/1,567)

886화. 이제 곧 다시 뵐 수 있을 겁니다. (1)

갈천립이 천천히 고개를 내려 제 가슴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흰빛을 띤 검이 반절 이상 박혀 있었다. 아마 이 검의 끄트머리는 그의 등을 뚫고 삐죽이 솟아 있을 것이다.

절망, 공포, 좌절, 분노 등등.

수많은 감정이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 많은 감정 중 가장 주된 것을 꼽으라면 분명 경악일 것이다.

“너…….”

그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턱 때문에 제대로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결국 말보다 붉은 피가 먼저 줄줄 새어 나왔다.

“너…….”

울컥울컥 역류하는 피가 갈천립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운검이 검을 비틀어 뽑으려다 손을 떼고 갈천립을 마주 보았다.

“한때는.”

“…….”

“그대에게도 그대가 원한 것을 이룰 가능성이 있었을 거요.”

갈천립은 흐려져 가는 눈으로 어떻게든 운검을 바라보았다.

“그 작은 성취에 만족해 버리지만 않았더라면.”

“…….”

무어라 더 말을 하려던 운검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원래 하고자 한 말은 ‘나 역시 그리 대단한 자는 아니지만, 무인이란 죽는 그 순간까지 나아감을 멈춰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소?’였다.

하지만 이런 말은 이자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갈천립은 그에게 무인의 대접을 받을 만한 이가 아니니까.

“선인이나 악인이나, 죽음만은 공평한 법. 내세가 있다면 속죄하고 사시오.”

하지만 마지막까지 도인으로서의 본분만은 잊지 않았다.

갈천립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운검의 기세에 눌려서가 아니다. 더는 제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죽음에 가까워진 것이다.

“나……는…….”

꾸역꾸역 치솟은 피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은 그에게 마지막까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

그의 고개가 힘겹게 옆으로 돌아갔다.

크게 에워싸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그가 이끌고 온 사파인들까지 모두 싸늘한 눈으로 그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작은 온기조차도 없었다.

“크흐…….”

갈천립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개 같은…….”

털썩.

결국 앞으로 고꾸라진 갈천립의 가슴에 운검의 검이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건 간신히 붙어 있던 명줄을 끊어 놓기에 충분했다.

채 눈을 감지 못하고 숨이 끊긴 갈천립의 시체가 천천히 싸늘하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운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강한 상대였다. 가진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할 만큼 녹슬어 버린 상태가 아니었다면, 분명 힘겨운 전투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승리한 것은 그다.

“관주님!”

“사숙조.”

어느새 주위로 다가온 이들이 혹여나 운검이 상처를 입지는 않았는지 살폈다. 짧은 전투였지만, 지켜보는 이들도 바짝 긴장할 만큼 험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다.”

운검이 막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는 찰나였다.

저벅. 저벅.

한 사람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파인들은 그의 존재에 호흡을 잊기라도 한 양 일제히 숨을 죽였다.

저벅. 저벅.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다가온 그는 발끝으로 갈천립을 뒤집고 가슴에 박혀 있던 운검의 검을 뽑아냈다.

스슥.

검이 뽑혀 나오는 섬뜩한 소리가 모두의 귀에 스산하게 파고들었다.

촤아아악!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청명은 고개를 돌려 잔뜩 긴장한 얼굴의 사파인들을 둘러보았다.

움찔.

청명의 눈을 본 이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계속할까?”

세상에는 수많은 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전의를 꺾어 놓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또 있을까?

잠시 전투가 멎으며 머릿속에 들끓던 피가 식고 나니 주변의 상황이 확연하게 보였다.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갈천립. 그리고 저 뒤쪽에 목을 잃은 채 싸늘히 식어 가는 단혼혈수와 다른 고수들, 죽지 않았더라도 제압당해 쓰러진 채 신음하는 이들…….

거기에 여전히 냉엄한 기세를 내뿜으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화산의 검수들까지.

상황은 너무도 명백하다.

턱.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무기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해진 장원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고요한 호수에 인 파문은 더 멀리, 크게 퍼지기 마련이다. 그 작은 소리가 그나마 남아 있던 전의를 완전히 끊어 놓았다.

사파인들의 손에서 무기가 줄줄이 떨어졌다.

애초에 큰 목적 없이 무기를 들었던 이들이다. 이끌고 소리칠 이가 사라졌는데 굳이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남았을 리 없다.

“병신 같은 것들이.”

청명이 그런 이들을 경멸하듯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반항하든 반항하지 않든 모조리 목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힘이 있을 때는 신이 나 날뛰다가 불리하다 싶으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다. 청명이 가장 경멸하는 이들이다.

그가 손에 쥔 검을 꽉 움켜잡은 순간, 누군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돌아보니 운검이 가만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구나.”

“……압니다.”

가볍게 혀를 찬 그는 손에 든 검을 정중하게 운검에게 건네주었다.

납검한 운검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제자들은 들어라!”

“예, 장문인!”

현종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인들의 무공을 폐하고, 모두 제압해 가두어라. 저들의 처분은 추후에 결정한다.”

“예!”

“상처를 입은 이들을 의가로 옮겨라. 혹여 주변에 다른 적도가 있을지 모르니 주변을 살펴 혹여 있을지 모를 양민들의 피해를 방지하거라!”

“예, 장문인!”

현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산의 제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은 사파인들은 무공을 폐한다는 말에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살기 어린 얼굴로 검을 휘둘러 대던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감히 반항할 엄두도 내질 못했다.

“끄윽!”

“아, 아악!”

단전이 부서지고 내력이 흩어지는 끔찍한 느낌.

하지만 전신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그 끔찍한 탈력감에 충분히 신음할 틈도 없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들을 바닥에 처박고 어디선가 가져온 동아줄로 전신을 꽁꽁 묶었다.

그 광경을 보던 홍대광은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새로 완전히 주저앉았다.

남은 사파인들을 제압하는 화산의 검수들과 뒷짐을 진 현종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허탈하여 웃음이 다 새었다.

“……허, 허허. 이리 간단하게…….”

화산이 모습을 드러내고, 단혼혈수와 갈천립의 목을 베기까지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화산의 진가는 그 누구보다 홍대광이 잘 알고 있다. 아직 명성도 실력도 그 무엇도 없던 화산의 가치를 알아채고, 저 낙양지부장의 자리도 마다하며 이곳으로 온 이가 바로 그니까.

하지만 오늘 눈앞에서 펼쳐졌던 광경은 그런 그가 보기에도 황당할 정도였다.

저 강남에서 그토록 악명을 떨쳤던 지독한 마두들.

그런 이들이 마치 삼류 파락호들처럼 쓰러졌다. 소림도, 무당도, 종남도 아닌 바로 화산의 손에 말이다.

강해진 거야…… 놀랍긴 해도 그럴 수 있다. 지금껏 화산은 언제나 홍대광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어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그가 당혹한 이유는 단순히 화산이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제자들이 제압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현종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홍대광이 있는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꿀꺽.

그 모습을 보며 홍대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현종과 그 뒤를 호위하듯 따르는 장로들과 화산의 검수들을 보고 있자니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뭐가 다른 거지?’

예전이었다면 홍대광은 웃으며 현종을 맞이했을 것이다. 너무 늦게 오셨다고 너스레를 떨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홍대광은 온몸의 통증도 잊고 자세를 바로잡고 있었다. 마치 소림이나 무당의 장문인을 배알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현종에게서 느껴지는 것을 굳이 조악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격’이라 해야 할 것이다.

홍대광과 모여 있던 서안 속가문 사람들 앞에 선 현종이 천천히 그들을 모두 눈에 담았다.

어떤 공격적 기세도 느껴지지 않건만, 기이할 만큼 커다란 존재감이 현종을 마주한 이들을 내리눌렀다.

“장문…….”

결국 그 무게감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다급하게 입을 열어 감사를 표하려는 순간이었다.

현종이 느릿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주 깊게.

“자, 장문인!”

“왜 이러십니까!”

그 모습을 본 이들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누군가는 당장에 달려들어 현종을 일으키려다 차마 손을 대지 못하여 발을 굴렀고, 누군가는 순식간에 핏기가 가신 얼굴로 몸을 떨었다.

고개 숙인 현종의 입에서 낮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

그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본문이 너무 늦게 당도하여 여러 문파의 피해가 너무도 컸소이다. 화산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음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누군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장문인.”

서월문주 남자명이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화산이 와 주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감사를 표하려던 남자명은 잠깐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희 서월문은 종남의 속가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장문인께서는 저희를 구원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저희를 위해 이리 고개를 숙여 주시는군요. 봉문 한 화산이 오지 않았다 해서 누구 하나 비난할 일 없었을 터인데…….”

말끝을 흐린 남자명이 이내 양손을 움켜잡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정말로 감사와 존경의 의미를 담아 깊이 허리 숙였다.

“……화산의 도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서안 속가의 문주들, 그리고 속가문의 제자들이 일제히 포권을 하며 읍했다. 부상으로 몸이 성치 않은 이들도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그제야 현종이 숙이고 있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부족한 저희를 너른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말에, 문주들의 얼굴엔 다들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스쳤다.

‘끝났군.’

홍대광은 그 순간 깨달았다.

아마 서안 속가의 문주들은……. 아니, 서안 속가에 속한 모든 이들은 이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때로는 강대한 힘보다 한마디의 말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이렇게 말이다.

‘장문인께서도 과거와 달라지셨구나.’

온화함과 포용력. 그리고 주변을 압도하는 존재감. 그 어느 하나 대문파의 장문인의 자격에 부족함이 없다.

화산이 과거와 완전히 다른 문파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되었다. 이를 깨닫고 나니 홍대광의 눈은 자연히 다른 한 사람을 찾아 헤맸다.

이 모든 변화를 만들어 냈을 장본인.

“응?”

그때 홍대광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뭐지?’

평소 같았으면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이 없거나, 그게 아니면 적어도 현종의 옆을 지키기라도 했을 청명이 중앙에 우두커니 서서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보는 거지?”

백천 역시 홍대광과 같은 의문을 품었는지 청명에게 다가가 물었다.

“뭘 보고 있는 거냐?”

“흥.”

청명이 작게 코웃음 치며 묘한 얼굴로 입가를 뒤틀었다.

“애송이 놈들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고 있었지.”

“……네 애송이들은 네 앞에 있다만.”

“아니. 그 애송이들 말고. 진짜 애송이.”

“응?”

백천은 영문을 모르고 되물었지만 청명은 대답해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정리하자. 빨리 끝내고 화산으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간만에 사람을 봐서 그런가, 영문 모를 소리나 해 대는구나.”

그런 청명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어서, 백천은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항상 한발 늦는 것 같습니다, 사형.”

“흥.”

코웃음 소리에 미묘하게 날 선 불쾌감이 어려 있었다.

“아쉽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냐?”

“청명 도장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지 못했잖습니까. 동생 분도…….”

“쓸데없는 소리 지껄일 시간 있으면 돌아가서 검이나 휘둘러라. 우린 아직 봉문을 푼 게 아니다.”

“예, 사형. 그러겠습니다.”

서안의 외곽.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길로 접어든 한 무리의 무인들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발길을 재촉했다.

가장 뒤에서 따르던 이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곧 다시 뵐 수 있을 겁니다, 청명 도장.”

환한 미소를 지은 이송백이 그리운 듯 서안을 바라보다 다시 몸을 돌려 발길을 재촉했다. 발걸음마다 활기가 돌고 있었다.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