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5화. 과거의 영광에 취한 자는 죽은 자요. (5)
갈천립을 상대하면서 운검은 단 한 번도 예의를 내려놓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사파의 마두라고는 하나, 검수라면 목숨을 걸고 병기를 맞대는 이에게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화산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운검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운검의 눈에서 상대에 대한 존중이 완전히 사라졌다.
세상에는 최소한의 존중조차 필요치 않은 인간이 있다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검을 멈추고 갈천립을 바라보는 화산 제자들의 눈빛은 오히려 운검보다 더욱 험악했다.
동료의 등에 칼을 박아 넣는다?
적어도 화산에선,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다.
일백의 절정검수가 모조리 살기를 담아 쏘아보니 갈천립은 움찔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냐?”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창백한 얼굴이 당혹감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에게 이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친절히 입을 열어 줄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저 차디찬 눈으로 그를 쏘아볼 뿐.
“뭐냐고! 이 빌어먹을 놈들아!”
갈천립이 고함을 치자 운검이 검을 내리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너는…….”
차고 무감한 목소리가 갈천립의 귀를 파고들었다.
“사람을 이끌 자격이 없는 이다.”
그 의도가 좋지 않았다고는 하나, 어쨌든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저 갈천립을 믿고 싸운 이들이다. 갈천립이 이들을 조금이라도 신경 썼다면 제 공격에 취해 아군의 등에 칼을 박아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운검의 냉정한 말에 갈천립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옆으로 향했다. 어느새 검을 멈춘 채 이쪽을 보고 있는 사파인들의 두 눈엔 노기와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이.”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병신 같은 것들! 멍청해서 이해를 못 하는 거냐? 내가 저 외팔이 놈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 내가 어떻게든 이겨야 너희가 살 방도도 생기는 거란 말이다!”
그런데 지금껏 반수 넘는 이들을 검으로 찔러 댄 적이 아니라 이쪽을 저런 눈으로 바라본다고?
‘뭐가 옳은지도 모르는 버러지 새끼들이!’
기껏해야 다섯 정도가 아닌가.
전장에서 공격을 하다 보면 아군의 칼에 맞는 일도 흔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사파인들은 되레 갈천립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이 병신 같은…….”
“구제불능이로군.”
갈천립이 무어라 욕을 하려는 찰나, 운검이 더는 그 말을 들어 주기 힘들다는 듯 딱 잘라 끊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검 끝에 붉디붉은 검기가 어렸다.
“이…….”
운검, 화산의 제자들, 거기에 사파인들까지도…… 모두 그를 적의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흡사 세상 모두가 그를 증오하는 것처럼.
궁지에 몰린 느낌에, 갈천립은 이를 거세게 갈아붙였다.
아니다.
이게 아니다.
그가 받아야 할 시선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를 바라보는 눈은 존경과 두려움. 그리고 질시와 공포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감히 그 위치에 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이가 절대자를 바라보는, 바로 그 눈빛.
“너는 장일소가 될 수 없다.”
으드드득!
그가 장일소를 생각할 때마다 두 눈에 어렸던 그 감정들. 그것들이 여기 있는 모두의 눈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데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느냐! 왜! 왜에에에에!”
갈천립의 입에서 짐승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인정할 수 없다!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죽여 버리겠다!”
갈천립이 괴성을 내지르며 운검을 향해 쇄도했다. 광폭한 살기. 그리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세. 얼굴엔 힘줄이 곤두선 채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는 갈천립의 모습은 섬뜩함 그 자체였다.
콰가가가각!
그가 뿜어낸 시퍼런 도기들이 가공할 기세로 뿜어져 나온다. 제아무리 갈천립을 증오한다 해도, 그가 만들어 낸 저 도기의 폭풍을 보는 순간, 실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개 같은!’
한계까지 내력을 끌어 올린 갈천립의 눈에서 혈관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이 금세 시뻘겋게 물들었다.
강호는 강자존(强者尊). 강한 자만이 정의다.
약한 자는 강자를 두려워하며 따른다. 누군가를 이끌기 위한 자격? 그건 강함으로 충분하다.
저 장일소 역시 자신의 강함으로 만인방을 만들고, 사패련을 손에 거머쥐지 않았던가?
‘그런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콰가가가각!
도기가 더욱 맹렬하게 회전했다. 뻗어진 도기 위로 새로운 도기가 궤적을 만들어 내고, 그 수십의 도기가 불규칙하게 얽혀 들면서 맹렬한 폭풍을 만들어 내었다.
인간의 몸 따위는 저 가공할 위력으로 휘몰아치는 도기의 폭풍 안에서는 그저 육편 따위로나 화할 것이었다.
한편, 휘몰아치는 도기 앞에서 한 손으로 검을 든 운검의 모습은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꾸욱.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곽회는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 조심하란 말을 소리 내어 건네는 이도 없다.
모두가 그저 굳건한 신뢰를 담은 눈으로 운검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이라면, 지난 삼 년간 운검이 어떤 수련을 해 왔는지 봐 온 이들이라면 모두 안다. 지금 운검을 걱정하는 것은 그가 흘려 온 피를, 그가 쏟아 온 노력을 폄하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가져야 할 것은 걱정이 아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이다.
“후우.”
운검이 짧게 심호흡했다.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저 가공할 도기의 폭풍은 언제든 그의 몸을 찢어발길 수 있을 것이다.
과거였다면 감히 상대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뒤로 또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그리고는…….
운검의 두 눈에 한 광경이 보이는 것 같다. 누군가 앞으로 뛰어들어 그를 지키는 광경. 그의 앞에 당당히 선, 조금 작은 어깨가.
운검이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는.
그 광경을 보지 않기 위해 이곳에 서 있다.
꾸우욱.
발끝이 땅을 굳건히 짓누른다. 모든 것은 아래에서 시작하는 법.
마음을 호수처럼 고요히 유지하고, 두 눈은 영활하게 상대를 관조한다.
보인다.
‘내력이 전부가 아니다. 초식도 전부는 아니야.’
더없이 맹렬하고, 강인하다.
하지만 확실히 어긋나 있다.
한때는 이 도격들이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얽혀 상대를 도륙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톱니바퀴들은 녹이 슬고, 먼지가 쌓여 삐걱대며 돌아간다.
벌어진 틈과 뒤틀린 축.
‘그래, 청명아. 그렇구나.’
갈천립은 스스로가 강해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력은 더 높아지고, 도에 실리는 힘은 점점 더 강해졌을 테니까.
하지만 무학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아무리 강한 힘으로 돌아가는 장치라고 한들, 섬세하고 꾸준히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은 녹슬어 비틀리는 법.
이 공격은 결국 축이 비틀린 채 억지로 돌아가는 톱니바퀴일 뿐이다.
운검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 맹렬한 폭풍을 향해 다가가는 것은 더없이 무모한 행동 같았지만, 정작 발을 내뻗는 운검의 두 눈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우우우웅.
내력을 잔뜩 밀어 넣은 그의 검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저 아이들의 모범이 될 수 있을까?’
부끄럽게도 저 아이들은 아직 그를 스승이라 부른다. 자신을 추월해 앞서 간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도, 여전히 그에 대한 존중과 존경을 여실히 보인다.
그 사실이 더없이 힘이 되다가도, 또 가끔은 그를 더없이 무겁게 짓누르는 짐처럼 느껴지고는 한다.
저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할까? 저 한결같은 녀석들에게 무엇으로 도움이 되어야 할까? 어찌해야 저 아이들에게 스승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여길 수 있을까?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운검은 한 발을 더 내디뎠다.
도가 뿜어내는 압력이 그의 머리카락을 치솟게 만들고, 피부를 금방이라도 찢어 낼 듯이 뒤흔들었다.
그 순간.
파아아아앗!
그의 왼손에 들린 매화검이 빛살처럼 도기의 폭풍 사이를 파고들었다.
카가가각!
가열하게 회전하는 톱니 사이로 쇠막대기를 꽂아 넣은 것처럼, 일견 정교하게 돌아가던 도격이 단번에 크게 흔들렸다.
파아아앗!
순간 회수된 운검의 검이 다시 빛을 뿜어냈다.
그가 저 아이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이야 빤하지 않은가.
두려움 없이 맞서는 의지. 그리고 화려함에 현혹되지 않고 본의를 지켜 나가는 심지!
그리고!
‘허울일 뿐이야.’
검 끝에 실린 힘으로 평가한다면, 그 내력의 깊이로 평가한다면, 얼마나 더 화려하고 강한 공격을 할 수 있느냐로 평가한다면 세상은 당연히 귀도무정을 그보다 강하다 여길 것이다. 운검 역시 마찬가지였겠지.
하지만 이제 그는 안다. 무학이란 그런 것이 아님을.
이제 그의 제자들은 강호에 제대로 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저들도 위기를 겪고 뒤흔들릴 날이 올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다.
‘믿어야 할 것은.’
손에 잡힌 검의 감촉이 사라진다.
하지만 둔중한 무게만은 확연하게 느껴진다. 그의 손에 어린 무게는 검이 주는 무게가 아니다. 지난 시간 한순간도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않았던 자신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다.
‘오직 본인의 노력뿐이다.’
운검의 검이 다시 빛살이 되어 도기의 폭풍을 파고든다.
하나의 검이 둘이 되고, 두 개의 검이 다시 셋이 된다.
이내 일곱 개의 검영을 그려 낸 운검의 검이 단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붉은 도기들 사이로 벌어진 틈을 찔러 내었다.
카각! 카가가각! 카가가가각!
도와 검이 서로 얽혀 들며 소름끼치는 소음이 터져 나왔다.
우드득! 우득!
손목이 부러질 듯한 통증. 내장이 뒤틀리는 충격.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핏덩어리를 억지로 삼켜 낸 운검은 손마디가 모두 희게 질리도록 검을 콱 움켜잡았다.
관(觀).
어떤 상황에서도 두 눈만은 모든 것을 지켜봐야 한다.
부술 수 없는 이물질이 끼어든 톱니바퀴처럼 폭풍처럼 회전하던 도격이 크게 출렁였다.
그리고 삼 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던 운검의 매화검은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섬전(閃電).
검 끝은 노력을 담는다.
검 끝은 시간을 담는다.
그리고 검은 그저 사람. 사람을 담을 뿐이다.
단 한 톨의 의심도 없이 모든 것을 검에 담는 순간, 검은 곧 사람이 되고, 사람은 곧 검이 된다(身劍合一).
파아아아아아아앗!
한순간에 빛살이 된 검기가 휘몰아치는 도기 사이로 파고들었다.
카가가가각!
뒤틀릴 대로 뒤틀린 톱니바퀴는 그 강렬한 일격 앞에 환상처럼 무너져 내렸다.
붉은 검기가 치솟으며 새파란 도기가 소멸했다.
시간과 노력, 그리고 사람을 온전히 담아 낸 검이 발작적으로 휘둘러진 도를 튕겨 냈다. 그리고 이내 두 눈을 부릅뜨고 경악하는 이의 육체를 강하게 파고들었다.
푸욱!
팔 전체가 없어진 듯했던 기이한 느낌은 허무하리만치 씻은 듯 사라지고, 세상이 그에게 돌아왔다. 둔중하고도 묵직한 감각이 손끝에 어렸다.
‘그리고…….’
믿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운검은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소리를 내지를 듯 주먹을 움켜쥔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아이들보다도 더욱 흥분한 듯한 스승들의 모습 역시.
‘네 뒤에 서 있는 이들이란다.’
스스로를 믿고, 함께하는 이들을 믿는다.
그것이면 그저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