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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84화 (880/1,567)

884화. 과거의 영광에 취한 자는 죽은 자요. (4)

툭.

몸통에서 분리된 단혼혈수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고함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 찬 전장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퍼져 나갔다.

홀리듯 고개를 돌려 목 잃은 시체를 확인한 이들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다, 단혼혈수가…….’

이곳은 전장이니 누가 죽어도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그 단혼혈수가 이름도 없는 노검수의 검에 목이 베였다.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아는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으…….”

바보가 아닌 이상, 상황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들은 전장의 상황에 누구보다 민감한 사파인들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달아나려 해도 달아날 곳이 없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이런 전세(戰勢)가 누군가의 활약으로 일시에 전복될 수 있으리란 마지막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장을 주도하고 기세를 뒤집는 역할을 해 주어야 할 고수인 단혼혈수가 머리를 잃고 땅에 엎어진 채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다.

사파인들의 두 눈에 절망이 어렸다.

아직 강서칠살과 이름 있는 몇몇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악전고투를 치르고 있다.

천하의 강서칠살이 화산의 이름 없는 검수를 상대로 오히려 밀리고 있는 모습은 상황을 파악한 이들의 가슴에 찬물을 끼얹었다.

더는 희망을 찾지 못한 이들의 시선이 향한 곳이야 뻔했다. 그들이 이곳에 모일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대라는 것을 걸어 볼 만한 유일한 이.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들의 마지막 남은 기대를 처참하게 뭉개 놓았다.

쾅!

맞부딪힌 검과 도가 커다란 굉음을 만들어 내며 동시에 튕겨 나갔다.

서로 승기를 잡아 내지 못한 팽팽한 격돌. 하지만 무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이라면 이 격돌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가 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것이다.

갈천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놈이!”

맹렬히 땅을 박차고 화살처럼 쏘아진 갈천립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

대기를 가르다 못해 찢어 내는 듯한 파공음이 울렸다. 가공할 속도와 힘을 담아 낸, 그야말로 혼신의 참격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아래에서 위로 선명한 호를 그려 낸 검이 날아드는 갈천립의 도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커다란 폭음이 터지면서 갈천립의 몸이 태풍을 맞은 갈대처럼 뒤로 휘청였다.

타닥! 탁!

여력을 감당하지 못한 그의 발은 몇 번이고 뒷걸음질쳤다.

분노한 갈천립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물론 그의 도격을 막아 낸 운검 역시 그와 비슷한 거리를 물러났다. 하지만 그 사실은 갈천립에게 있어 오히려 굴욕이었다.

“으…….”

갈천립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양손으로 휘두른 도가 한 손으로 휘두른 검과 부딪혔는데 동수를 이뤘다. 그의 도가 저 검보다 최소 두 배는 두껍고, 세 배는 무겁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건 처참한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이건 내력도 검술도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하게 완력으로 패배한 거니까.

‘무슨 외팔이 놈의 힘이…….’

한쪽 팔이 없는 이는 남은 한쪽 팔로 모든 것을 해야 하니, 일반적으로 양손을 쓰는 이보다 완력과 악력이 강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그건 무학을 익히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내력이 있는 이가 한 손으로 생활하며 일반인들만큼의 불편함을 겪을 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대체 저 상식을 벗어나는 완력은 어디에서 나온다는 말인가?

“……차라리 도를 익혔으면 절정에 올랐겠군.”

갈천립의 말에 운검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선천적인 게 아니오. 익힌 것이지.”

“……검수가?”

운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무학을 처음부터 다시 정립해야 한다고 여겼을 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딱 하나의 광경이었다.

그가 청명이라는 이름을 그 머릿속에 처음 새겨 넣었던 그때.

그놈은 커다란 돌덩어리를 매단 채, 육체를 혹사시키고 있었다.

검수는 날렵해야 한다는 상식을 무시하듯 말이다.

처음에는 그저 저보다 나이 많은 사형들을 강제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가 알기로 청명은 그 이후로도 육체 단련을 멈춘 적이 없다.

그래. 눈앞에 있었다.

재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던, 한없이 나약하고 작은 몸으로 이제는 감히 그가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이가. 그 빛나는 길이 이토록 선명하게 보이거늘, 어찌 따라 걷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얻은 것들은 지금 그의 검 끝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다.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 아니겠소?”

갈천립의 두 눈에서 살기가 뿜어졌다.

“잘도 떠드는구나!”

그리고 삽시간에 바닥을 박차며 운검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 외팔이 좌수 검사가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은 확인했다. 평소의 그라면 조금 더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상대를 탐색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 저 건방진 놈이 지껄인 말이 그의 속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더 큰 이유는 이 이상 시간을 끌 수 없기 때문이다.

머저리 같은 단혼혈수 놈이 제대로 힘도 써 보지 못하고 목이 잘리는 모습은 그도 똑똑히 보았다. 여기서 그까지 어물쩍대고 있으면 저 들개 같은 놈들은 결국 전의를 잃고 항복해 버릴 것이다.

그리되면 갈천립에게는 싸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저놈들은 몰라도 이 일을 벌인 당사자인 그를 화산이 살려 줄 리가 없으니까.

“죽어라아아아아앗!”

파아아아앙!

대기를 찢으며 내리쳐진 도가 시뻘건 도기를 머금고 운검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운검도 감히 맞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몸을 옆으로 날려 도격을 피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도격을 얻어맞은 바닥이 폭발하며 터져 나갔다. 그저 바닥을 내리친 것에 불과하건만 단단하던 바닥에 사람 하나는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지켜보던 몇몇이 절로 헛숨을 삼킬 정도의 위력이다. 귀도무정이라는 별호가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격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그 도격을 방금 막 피한 운검의 눈빛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냉정한 얼굴로 갈천립에게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놈!”

그 순간 갈천립의 도가 소름 끼치는 파공음을 내뿜으며 횡으로 가로 그어졌다.

이렇게나 가공할 힘이 실린 도를 얇디얇은 검으로 막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에 충분한 참격.

갈천립 역시 이번만큼은 저 망할 외팔이가 감히 이 도를 맞상대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 순간 운검이 바닥에 발을 박아 넣으며 날아드는 도를 향해 검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멍청한!’

첫 충돌에 우세했던 것이 머릿속에 너무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저지른 실수가 아닐까? 이건 누가 보아도 무모한 일이었다.

쾅!

이윽고 거대한 충돌음이 울렸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검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갈천립이 내심 쾌재를 부르며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운검을 반으로 갈라 버릴 심산으로!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튕겨 나갔던 검이 좀 전보다 더욱 강한 기세를 싣고 도를 후려쳤다.

쾅!

도가 살짝 주춤하는 와중에 또 한 번의 검격이 이어졌다.

쾅! 콰앙! 콰앙!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십여 번의 검격이 터져 나오며, 갈천립의 도가 가진 기세를 완전히 죽여 버렸다.

갈천립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뭐, 뭣?’

대체 검이 얼마나 빠르면 저럴 수 있는가?

아니, 저건 그저 단순히 빠르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검과 도가 충돌하는 순간 몸으로 퍼져 나간 충격을 완벽하게 해소하고, 그 힘을 역이용해 검을 날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묘기다.

파아아아앗!

갈천립의 도가 튕겨 나가는 순간, 운검의 검이 빛살로 화하며 십여 줄기의 붉은 검기를 자아냈다.

전신을 노리며 날아드는 검기에 갈천립의 생각은 뚝 끊어졌다. 상대의 실력에 놀랄 때가 아니다. 저 검기가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목숨이 아닌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잽싸게 몸을 뒤틀며, 도를 움직였다. 날아드는 검기를 일거에 쳐 날린 그는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으로 다시 도를 휘둘렀다.

‘이럴 리가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갈천립이다!’

그는 이 모두를 이끌고 청해로 나가 사파의 거두가 되어야 할 이다.

그래. 당연히 그랬어야 한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인식이었지, 실력이 아니었으니까. 뒤늦게나마 그 사실을 깨달았으니, 이제는 당연히 손에 넣을 수 있어야 했다.

명성. 명예. 영광. 권력.

그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는 장일소와 같은 위치에 올랐어야 할 게 바로 이 갈천립이다. 이런 곳에서 이름도 없는 검수에게 발목을 잡힐 내가 아니란 말이다!’

파아아아앗!

그리고 그 순간, 운검이 날린 검기가 거센 도기 사이를 파고들어 갈천립의 옆구리를 길게 갈랐다.

욱신!

옆구리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는 순간, 갈천립의 두 눈에서 새빨간 혈기가 치솟았다.

“이, 이 개 같은 새끼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갈천립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갈천립이 뿜어낸 새파란 도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저 악만 남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듯했다. 하지만 굳이 정교하지 않아도 속도와 힘만 있다면, 불규칙적인 도기 역시 강대한 절초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공격이었다.

갈천립을 중심으로 사방을 향해 뿜어져 나간 폭풍 같은 도기가 순간적으로 운검을 집어삼켰다.

카강! 카앙!

운검이 뒤쪽으로 급히 물러나며 날아드는 도기를 쳐 냈다. 강한 악의와 살의를 머금은 도기는 흡사 지옥의 아귀처럼 운검을 쫓았다.

“죽어어어어엇!”

도기는 더욱 맹렬히 날아들었다. 이번엔 반드시 운검을 갈아 버리겠다는 듯이.

“큭!”

운검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힘을 더한 도기의 폭풍이 마치 공간 자체를 집어삼키듯 뻗어졌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폭발한 도기를 맞이한 것은 운검뿐만이 아니었다.

“헉!”

쉼 없이 밀어붙이는 화산의 제자를 상대로 악전고투를 벌이던 사파인 하나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에 싸우는 중인 것도 잊고 돌아보았다.

그리고.

“으아아아아아악!”

갈천립이 내뿜은 도기가 뒤에서부터 많은 사파인들을 덮쳐 버렸다.

“아아아아아악!”

“이 개자………. 크아아악!”

별안간에 등 뒤로 날아든 도기에 베인 이들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발 하나 디딜 틈도 없이 휘몰아치는 도기의 폭풍에 휩쓸린 이들이 어떤 꼴이 되었을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도가 휘둘러지는 방향을 따라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헉!”

“미친놈이!”

자신이 상대하던 이가 등 뒤에서 날아든 도기에 휘말려 육편이 되는 광경을 목도한 화산의 제자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사파인들도 일단은 몸을 날려 피하기에 바빴다.

휘이이이이이이이잉!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회전하던 도가 서서히 멈춰 섰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광경은 그저 참혹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했다.

바닥이 피로 흥건했다. 그리고 군데군데 보이는 옷자락과 육편들은 누구의 것인지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도질이 되어 있었다.

“후욱. 후욱……. 후욱!”

갈천립은 도를 바닥에 꽂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적으로 막대한 내력을 끌어 올린 탓에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갈천립이 이를 악물고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때였다.

“짐승도…….”

운검이었다.

갈천립의 도가 빚고 만 참상을 목도한 운검이 눈에서 새파란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제 무리의 등을 물어뜯지는 않는다.”

“…….”

“네게 어울리는 죽음을 선사해 주겠다.”

운검이 발아래 고인 피 웅덩이를 콱 짓밟으며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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