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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83화 (879/1,567)

883화. 과거의 영광에 취한 자는 죽은 자요. (3)

우우웅!

강대한 내력이 실린 검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단혼혈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얼굴 바로 앞을 스치고 지나간 검이 허공에서 거짓말처럼 우뚝 멈춰서더니 이내 섬전 같은 속도로 그의 목을 노리고 쇄도했다.

‘큭.’

몸을 비틀어 낸 단혼혈수는 손으로 날아드는 검을 옆면을 쳐냈다. 투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휘어졌지만, 검 끝은 이내 제자리를 찾았고, 날아드는 방향은 조금도 틀어지지 않았다.

검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며 붉은 핏줄기를 그렸다.

순간 단혼혈수의 두 눈에 새파란 살기가 어렸다.

우우우우우우웅!

수백 마리 벌 떼가 동시에 날아오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의 양손에서 진득한 핏빛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파아앗!

이윽고 단혼혈수의 장력이 핏빛 뇌전처럼 현상을 향해 날아들었다.

투우웅!

그러자 현상은 검을 뒤틀며 날아드는 장력을 검면으로 쳐 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단혼혈수도 익히 예상한 일!

파아아아앗!

단혼혈수가 연이어 십여 개의 장력을 발출했다. 붉디붉은 핏빛 강기가 현상의 전신을 뒤덮을 기세로 날아들었다.

현상의 두 눈이 순간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짧게 중단세를 취한 그의 검이 동시에 십여 개의 잔영을 만들어 내며 날아드는 단혼혈수의 장력과 충돌했다.

쾅! 콰아아앙! 콰앙! 콰앙!

연이어 폭음이 터져 나왔다.

거센 반발력에 단혼혈수는 뒤로 네다섯 걸음 물러났다. 버티려면 버틸 수 있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

그런 그의 두 눈에 들어온 건, 제자리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를 단단히 딛고 선 현상의 모습이었다.

똑같은 반발을 느꼈을 텐데, 한쪽은 뒤로 물러났고, 다른 한쪽은 그 자리에서 버텨 냈다. 물론 이것만으로 무공의 고하를 평가할 수야 없겠지만, 이 교환으로 누가 이득을 봤는지는 확연한 일이었다.

단혼혈수의 두 눈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단단하다.

마치 거대한 벽에다가 장력을 갈긴 것 같은 느낌이다. 손끝에 와 닿는 감각이 태산처럼 굳건했다.

‘이런 자가 왜 여태 숨어 있었지?’

화산에 이런 실력의 노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이만한 실력이면 아무리 화산 같은 문파에 몸을 담았다 한들 명성을 얻고도 남았을 텐데.

의아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쪽.”

쇠를 긁어 대는 듯한 단혼혈수의 목소리에 현상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제자 놈들과는 사용하는 검법의 결이 많이 다른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현상이 고소를 머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에게는 저 아이들과 같은 젊음이 없으니까.”

화산의 검은 더없이 화려하고 또한 날렵하다. 아이들이 펼치는 검을 보고 있으면 현상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현상이 한창 검을 익힐 때, 화산에는 그런 검학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진정한 화산의 검이 화산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새로운 검을 익히기에 어려운 나이에 이르러 있었다.

저 아이들은 백지와도 같았다. 그렇기에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백지에는 무엇이라도 쓸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현상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수십 년 동안 저 아이들과는 다른 검을 익혔다.

이미 글씨가 빼곡하게 써진 종이 위에 새로운 글씨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그가 지금까지 익힌 것을 모두 쇄신하고 새로운 무학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현상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가 꼭 저 아이들과 같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손끝에서 화려한 매화가 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그는 더는 꽃을 피우는 이가 아니니까. 그는 저 아이들이 꽃을 피울 수 있게 받쳐 주는, 단단한 뿌리가 되어야 할 사람이니까.

“조금 늦고, 조금 둔하지. 대신에 좀 더 단단할 걸세.”

“…….”

단혼혈수의 두 눈이 가라앉는다.

이런 이들이 더 상대하기 껄끄럽다는 것을, 그는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느긋하게 승부를 가릴 시간도 없다. 상황은 점점 불리해지고 있고, 시간을 더 끌면 승리한다 해도 달아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드득.

단혼혈수의 손가락에서 관절 푸는 소리가 매섭게 울렸다.

그렇다고 두려운 건 아니다. 이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명성을 떨치지 못했다는 것은, 거꾸로 말해 실전을 거의 겪어 보지 못했단 뜻이기도 하니까.

‘나이가 몇이든 실전을 겪지 못했다면 어차피 애송이야.’

그는 자세를 살짝 낮추었다. 이런 이들이 어떨 때 가장 당황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말은 살아남고 나서 하는 말이지, 영감!”

투웅!

그의 발끝이 땅을 한차례 밀어 냈다.

이윽고 거의 바닥을 기듯이 몸을 날린 단혼혈수가 현상의 바로 앞까지 쇄도했다. 그리고 바닥을 콱 짚으며 몸의 방향을 틀었다.

몸을 틀자마자 바로 다시 한번 땅을 박차며 현상을 향해 쏘아진다. 뱀처럼 갈지(之)자로 격하게 이동해 사선으로 쇄도해 가는 그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광이 흘러나왔다.

물론 저 어린놈들의 검을 봤을 때, 이들은 상상하기도 힘든 고련을 해 온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수련은 결국 수련일 뿐. 찰나에 생사가 갈리는 실전에서는 순간의 당혹감이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임기응변이 부족해지지!’

기괴망측한 움직임으로 거리를 좁힌 단혼혈수의 양손이 섬뜩한 검붉은 색으로 물들며 매의 발톱처럼 구부러졌다. 그리고 현상의 발목을 노리고 내뻗어졌다.

쇄애액!

그 순간 현상의 검이 벼락처럼 날아들어 발목을 노리는 단혼혈수의 우수를 노렸다. 손을 꿰뚫어 바닥에 검째로 박아 버리겠다는 심산.

하지만 단혼혈수는 오히려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손을 뒤틀어 날아드는 검의 옆면을 손바닥으로 밀쳤다.

카가가각!

검면과 손이 맞닿으며 쇠를 긁어 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터졌다.

끌어 올린 검기는 검면마저도 날카롭게 만드는 법. 그의 손 피부가 베이며 피가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 대가로 아래로 내찔러진 검이 그의 손이 아니라 땅에 박히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단혼혈수의 두 눈이 섬뜩한 빛을 뿜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위로 뒤집은 그가 양손을 벼락처럼 휘둘렀다.

콰콰콰콰!

아래에서 위로 붉은 장영이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흡사 붉은 피가 땅을 뚫고 나와 솟구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광경이 주는 섬뜩함보다도, 그 기괴함 자체가 위험했다. 어지간한 전장을 겪어 본 이라 해도 발아래에서부터 장력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걸 경험해 볼 일이 있겠는가?

그 한 수로 단혼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쾅!

과연 현상 역시 아래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듯한 공격에 순간 대처법을 찾지 못했는지, 땅을 박차며 검을 뽑아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검은 맹렬하게 추적해 오는 장영들을 다급하게 쳐 날렸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단혼혈수가 원하던 바였다.

쾅!

단혼혈수가 땅을 손으로 거세게 내리쳤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쏜화살처럼 허공으로 솟아오른 현상을 추격해 갔다. 한번 잡은 승기를 다시 내어 주지 않겠다는 독기가 엿보였다.

달아나는 이와 쫓아오는 이.

그 순간 현상이 허공을 한차례 박차며 단혼혈수와의 거리를 조금 더 벌려 내더니 검을 치켜들었다.

우우우웅!

끝에 강력한 검기를 담은 현상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깔끔한 호선을 그렸다.

검격에 어린 기운만으로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 따위는 단숨에 두 쪽 나고 남을 듯했다. 하지만 그 위험천만한 검기를 본 순간 단혼혈수의 두 눈에는 되레 쾌감이 어렸다.

‘걸렸다!’

고오오오오오!

있는 내력을 모조리 끌어 올리니 그의 양손은 이내 붉다 못해 검게 물들었다.

“하아아아압!”

커다란 고함을 토해 낸 단혼혈수는 날아드는 검을 향해 되레 달려들었다. 그리고 양손을 교차하며 검을 움켜잡았다.

카가각! 카가가가각! 카가가각!

날카로운 날이 쇠의 녹을 긁어 대는 듯한 마찰음이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혈수(血手)에 잡힌 현상의 검이 어부의 손에 잡힌 활어처럼 날뛰며 그의 손을 말 그대로 깎아 냈다.

하지만 손바닥이 움푹움푹 베여 나가는 와중에도 단혼혈수는 현상의 검을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검수란 어차피 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평소처럼 단단하게 땅을 단단히 내딛지 못한 상태에서 날리는 검격은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날카로울 수는 있지만, 강력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그의 손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이런 놈들은 몇 번이고 상대해 봤다. 여유로운 얼굴로 화려한 검을 선보이던 놈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는 광경은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콰드드득!

검날을 제 손 뼈에 더 강하게 박아 넣어 완벽하게 고정해 버린 단혼혈수가 현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순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확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단혼혈수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가 본 것은 현상의 얼굴이 아니라 제 얼굴로 빠르게 다가오는 뭉툭한 무언가였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단혼혈수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고 그게 현상의 팔꿈치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얼굴에 직격한 어마어마한 충격이 의식을 순간적으로 까마득히 날려 버렸다.

콰아아아아앙!

암전.

세상이 순간 검게 변했다가 다시 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단혼혈수가 본 것은 새파란, 그저 푸른 하늘이었다.

“끄윽…….”

이윽고 가공할 고통이 얼굴을 짓뭉개듯 엄습했다.

‘이…….’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본능이 움직였다. 뒤이어 날아들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려던 순간, 그의 손이 무언가에게 묶이기라도 한 듯 쭉 당겨졌다.

‘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젖혀져 있던 몸이 강제로 당겨지는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금 전 보았던 바로 그 팔꿈치였다.

콰아아앙!

단혼혈수의 몸이 화포가 쏘아낸 포탄처럼 날아갔다. 바닥에 커다란 자국을 남기며 튀어 오른 그는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다시 아래로 처박혔다.

“쿠, 쿨럭! 쿨럭!”

고통에 채 신음하기도 전에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온 핏덩어리가 연신 입 밖으로 밀려나왔다. 고작 두 번의 공격으로 내부가 완전히 뒤집혀 버린 것이다.

“끄으…….”

손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키려던 그의 몸이 다시 아래로 처박혔다. 흐릿한 시야에 반듯하게 잘려 나간 그의 손의 단면이 들어왔다.

“쿨럭! 쿨럭!”

하지만 단혼혈수를 괴롭히는 것은 완전히 함몰되어 버린 얼굴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도, 언제나 그를 지켜 내던 손이 잘린 충격도 아니었다.

바로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그 자체였다.

‘어떻게…….’

머리로는 안다.

그가 자신의 손에 검을 박아넣어 고정한 순간, 저자가 그 검을 당겨 그를 끌어들임과 동시에 검을 잡지 않은 왼팔의 팔꿈치로 얼굴을 갈겨 버린 것이다.

검을 뼈에 박아 넣어 완벽하게 고정했으니, 단혼혈수 역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래, 어떻게 된 것인지는 이해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하지만 어떻게 저 늙은이가 찰나에 그런 완벽한 대응을 해 낼 수 있었단 말인가. 본디 검을 든 자는 검이 상대에게 제압되는 순간 머리가 비어 버리고 어쩔 줄 모르기 마련인데…….

탁.

그 순간 앞에 내려선 현상이 침중한 눈으로 단혼혈수를 응시했다.

“나쁘지는 않은 수였지만, 한 가지를 간과했군.”

“…….”

단혼혈수는 윙윙 울리며 끔찍한 고통에 휩싸인 머리를 애써 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에 의문이 가득했다.

간과?

그 의문을 풀어 주겠다는 듯 현상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 입장에서는 자네의 공격은 기괴하지도 않고, 변칙적이지도 않네. 오히려 지독하게 뻔하다고 해야겠지. 안타깝게도 화산에는 날아드는 검을 이로 물어 막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이가 있거든.”

“…….”

“차라리 급히 서두르지 않았더라면 좋은 승부가 되었을 것을.”

가볍게 고개를 저은 현상이 검을 들어 올렸다.

“자네의 패인은 상대를 얕보았다는 걸세. 그리고 전장에서는 방심하는 자가 가장 먼저 죽는 법이지. 그 녀석의 말처럼 말이야.”

단혼혈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더 일그러질 수도 없을 만큼 얼굴이 망가졌으니 기괴하게 뒤틀렸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뻔하다고?’

피로 젖은 어깨가 잘게 떨렸다.

‘전투에 익숙하지 못한 애송이는 오히려 나였다는 건가?’

단혼혈수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으으…….”

육신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 현상의 말이 주는 고통이 더욱 컸다. 결국 신음은 짐승 같은 울부짖음으로 화했다.

“이……. 이 개 같은! 으아아아아아아아!”

서걱.

그 순간, 현상의 검이 단혼혈수의 목을 단숨에 베어 냈다.

턱.

여전히 괴로움에 일그러진 그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하지만 자네에게는 적당한 최후가 되겠군. 지옥에 가서 지금까지 지은 죄를 사죄하게.”

검을 털어 낸 현상은 머리를 잃고 무너져 버린 단혼혈수의 몸을 일별하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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