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882화 (878/1,567)

882화. 과거의 영광에 취한 자는 죽은 자요. (2)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갈천립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분명 이 서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아니, 이 은하상단에서 막아서는 이들을 도륙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은 그의 계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화산의 개입?

당연히 예상했다. 과거 저 개 같은 만인방 놈들이 서안에 쳐들어왔을 때도 나선 것은 종남이 아니라 화산이었으니까. 삼 년 전만 해도 천하가 좁다 하고 강북을 제집처럼 누비던 게 화산이니까.

그런 이들이 제 안방에서 일이 터졌는데 봉문을 했단 이유로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뿌드드득.

갈천립은 부러져라 이를 갈아붙였다.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화산의 개입 여부가 아니라. 화산의 전력이었다.

‘이건 불가능해.’

어떻게 삼 년 만에 이토록 강해질 수가 있는가?

이건 상식적으로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세상이 알고 있는 화산과 지금 그가 두 눈으로 목도하고 있는 화산은 애초에 다른 문파다.

이들이 이런 힘을 갖춘 걸 알고 있었더라면 이 서안에 발을 들일 일은 없었을 것이다.

화산의 전력에 대해서는 이미 삼 년 전에 모두 파악했다. 그럼 그때의 평가가 잘못되었던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이들이 그때부터 이렇게나 강했다면 장강참변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어났다 하더라도 강남불침의 조약이 맺어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 대문파들조차 살기 위해 장일소에게 굴욕을 겪는 와중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다 전해지는 게 화산이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때의 화산은 그리 격렬하게 저항했음에도 판도를 뒤바꿀 만한 힘이 없는 문파였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정말 삼 년 만에 이렇게 바뀌었다고? 이렇게나 강해졌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게 가능한 일이면 누가 이 고생을 하겠냐고!’

수련한다고 해서, 노력한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강해질 수 있는 거라면 세상에 고수가 아닌 이들이 어디에 있고, 대문파가 아닌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이놈들은 그런 강호의 상식을 완전히 부숴 놓고 있었다. 중소 문파의 수준을 겨우 벗어났던 이들이 고작 삼 년 만에 당당한 대문파의 전력을 갖추고 돌아온 것이다.

아니, 사실 이들의 저력이 어디까지인지는 그도 아직 파악할 수 없었다. 무릇 실력이란 적절한 잣대가 있어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법인데, 저들의 잣대가 되기에는 그가 끌고 온 이들의 실력이 너무도 모자란다.

강북으로 올라온 사파 중 정예란 정예는 모조리 끌고 왔는데도, 이들을 이끌고 청해로만 나가면 강호를 뒤흔들 만큼 확고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다고 확신한 전력을 이끌고 왔는데도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대체 어디서부터?

“아아아아아악!”

그때 그의 귀에 날카로운 비명이 파고들었다. 전장의 추를 기울이기 위해서 앞으로 달려 나갔던 그의 동생이 내지른 비명이었다.

그동안 그들이 직접 나서서 이루지 못한 일은 없었다. 이런 작은 전장 따위는 언제든 마음먹은 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그들조차 휩쓸려 짓밟히는 이에 불과했다.

모든 것이 무너진다.

이들을 이끌고 청해로 나가 세력을 구축하고, 정과 사가 서로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패권을 손에 쥐려 했던 그의 모든 계획이, 모든 야망이 지금 이곳에서 불타올라 스러지고 있었다.

“이…….”

갈천립의 두 눈에 핏발이 선다.

‘화산!’

모든 것이 이놈들 때문이다. 이들…….

저벅. 저벅.

그때,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 비명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난무하는 이 전장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느릿하고 규칙적인 발소리.

갈천립이 악귀 같은 얼굴로 획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그 남자의 등장은 여러 가지를 의미했다.

이제 더는 화산의 검수들이 모두 달려들 만큼 사파인들이 많이 남지 않았단 뜻이기도 했고, 그 남은 사파인들에겐 화산파의 검수가 등 뒤로 넘어가는 걸 막을 여력이 없단 뜻이기도 했다.

그 무엇보다…….

“감히!”

갈천립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를 홀로 상대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있을 만큼, 그가 얕보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귀도무정 갈천립을 상대로 말이다.

“이…….”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너는 누구냐?”

이를 갈며 던진 질문에, 사내는 작은 고소를 머금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소. 딱히 자랑스레 내세울 별호 같은 것은 없어서 말이외다.”

“별호도 없는 애송이라고?”

“그렇게 됐소이다.”

겸연쩍어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표정은 그저 당당하기만 했다. 그 모습이 외려 갈천립의 화를 더 돋웠다.

“……화산검협도 아니고, 화산정검도 아니고……. 별호도 없는 무명소졸 놈이 감히 나를 상대하겠다고 나섰다고? 멀쩡한 놈도 아니고 팔도 하나 없는 외팔이 놈이?”

상대는 이번에도 화내는 기색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조금 미안하게 됐소이다. 어쨌든 물었으니 대답은 하겠소. 빈도는 화산의 일대제자인 운검이라 하오.”

운검이 하나뿐인 손을 뻗어 허리춤에 찬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스승께서 다른 이에게 가 계셔서 별수 없이 빈도가 나서게 되었으니, 무명소졸이라 너무 탓하지 마시오.”

갈천립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사람이 화가 너무 나 버리면 되레 냉정해진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잘 모르겠소.”

“……몰라?”

황망해하는 갈천립의 표정을 보며 운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소. 안타깝게도 그대들이 누구인지 듣고 올 만큼 상황이 여유롭질 않았으니까. 소식을 듣자마자 뛰어온 것이오.”

“…….”

운검이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아무도 말해 주지 않으니, 모를 수밖에.”

갈천립은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지금 이런 놈들에게 당하고 있었던 건가?

“나는 귀도무정 갈천립이다. 저 강서칠살의.”

“아, 그러시군.”

운검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연한 반응에 갈천립이 이를 악물었다.

“이 멍청한 놈이 귀도무정이라는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모양이군.”

“알고 있소.”

“……뭐?”

운검이 차분한 눈으로 갈천립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소이다. 내가 아무리 견문이 좁다고는 하지만, 귀도무정이라는 별호와 강서칠살이라는 이름을 듣지 못했을 만큼 귀가 막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도 감히 네놈이 나를 상대하겠다고?”

“그러지 못할 이유라도 있소?”

갈천립의 입술이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저 강남에서는 사신과 같이 군림하던 그다. 그가 대체 어디서 이런 모욕을 받아 보았겠는가?

“그 팔.”

“……음?”

“누구에게 베였지?”

운검이 대답 없이 갈천립을 응시했다. 그 질문의 진의를 확인하겠다는 듯이.

그러자 갈천립이 칼날 같은 눈빛을 내뿜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에 만인방이 화산에 쳐들어갔을 때, 죽다 살아난 놈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지. 그게 네놈인가?”

“그렇소.”

“그렇다면 만인방의 일개 대주조차 감당하지 못했던 놈이라는 의미로군. 그런데 감히 나를 상대하겠다? 만인방에서 나를 상대하려면 저 장일소가 직접 나서야 하거늘!”

그 말이 나온 순간 운검의 표정이 무너졌다.

하지만 절망에 빠졌다거나 치욕스러워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건 말하자면……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지금껏 내내 담담하던 그가 입술을 꽉 깨물고 웃음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그 반응에 갈천립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뭐가 그리 우습지?”

“아아, 미안하외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장일소라는 이름이 나오니 참을 수가 없어서.”

“…….”

“하나 묻겠는데. 그대가 패군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요?”

“……마지막?”

갈천립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의도로 물은 건지는 모르지만, 직접 만난 것은 못해도 족히 십오 년은 지났을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그런데 그게 뭘 어쨌다는…….

“내 장담하건대, 그대가 삼 년 전의 패군을 그 두 눈으로 보았다면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을 것이오.”

“이 자라 새끼가…….”

갈천립의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운검은 그저 냉정하게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사파라 해도 도사인 그에게 사람의 대한 예의를 잃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자의 입에서 장일소의 이름이 나오니 천하의 운검마저도 비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청명과 오검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장일소를, 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저 갈천립이 대단치 않은 무인이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 격이 다르다. 지금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만사의 화신이 바로 장일소 아니던가?

오히려 사파인인 갈천립이 그 장일소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어쩌면 그대가 패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말 역시 근거 없는 허언은 아니겠지. 그 장일소가 그대가 보았던 과거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운검의 말뜻을 이해한 갈천립이 이를 악물었다.

“이놈이 감히 나를 모욕…….”

“비록 적이지만, 그는 단 한시도 쉬지 않고 자신을 갈고닦는 이였소. 그런데…… 그대는 어땠소? 내 강서칠살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지 꽤 되었건만, 지금껏 딱히 달라진 게 없지 않소?”

“…….”

“과거의 영광에 취한 자는 죽은 자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갈천립의 심장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제가 이룬 것에 만족하고 주저앉아 버린 이는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뒤처지게 되지.”

운검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돌아갔다. 적을 맞아 당당히 싸우는 화산의 제자들과 그들의 뒤를 지키는 오검의 모습이 보였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갈고 닦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이들이 있다. 가장 높은 명성과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도 되레 그들보다 더욱 노력한 이도 있다.

그러니 그들의 스승으로서 못난 모습을 보일 수야 없지 않은가?

운검이 검을 들어 올려 갈천립을 겨누었다.

“마침 잘되었소. 조금 전 빈도를 두고 만인방의 대주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이라 하지 않았소?”

“……그래서?”

“그렇다면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어떻겠소? 그 만인방의 대주 하나 감당하지 못했던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리고 과거에 그 패군과 비교되었다던 그대가 얼마나 뒤처졌는지.”

“…….”

갈천립이 무표정한 얼굴로 운검을 뚫어져라 보았다.

들끓던 화가 삽시간에 가라앉으며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얼음장 같은 살기였다. 전장의 상황이 어찌 되었든 당장 이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않으면 이 기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 검이…….”

스르르릉.

갈천립이 천천히 제 도를 뽑아 들었다.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 간 애도가 손에 잡히자 가슴이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워졌다.

“그 주둥아리만큼 검이 매섭기를 바라야겠군.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될 테니까.”

그 대단한 갈천립의 살기를 받으면서도 운검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대가 실망할 일은 없을 것이오.”

정갈한 자세로 매화검법의 기수식을 펼친 운검이 중단세를 취하고 짧게 말했다.

“오시오.”

“그 아가리를 찢어 주겠다!”

갈천립이 폭풍 같은 기세를 내뿜으며 운검을 향해 쇄도했다.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