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1화. 과거의 영광에 취한 자는 죽은 자요. (1)
“아아아악!”
검이 어깨를 가르고 옆구리에 긴 혈선을 그었다. 발작적으로 반항하던 이들은 감정적으로 내두른 공격을 상대가 냉정하게 대처하면 어떤 결론이 나는지 몸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아, 안 돼.”
“도, 도망쳐야 돼!”
이들은 잔혹한 성정을 지녔을 뿐, 결코 멍청하지 않다.
그들이 판세를 읽을 줄 몰랐다면, 그 험난한 강남에서 오랫동안 악명을 떨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불리함을 직감한 순간 이들의 머릿속을 점한 건 도주해야 한단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어디로?
사방이 적이다. 적은 수가 많은 수를 포위한다는 건 병법을 한 자라도 읽은 이라면 선택하지 않을 멍청한 수지만, 지금 이들은 중요한 것은 머릿수가 아니라 실력이라는 사실을 검으로써 증명해 내고 있었다.
파아아앗!
차가운 얼굴. 그리고 그 얼굴보다 배는 더 차가운 검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급소를 베고 찌른다.
숨이 턱턱 막히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일백에 달하는 절정 검수가 모두 같은 검술을 익히고, 서로 호흡을 맞춰 밀고 들어오는 모습은 이곳의 모두에게 어째서 명문대파가 두려움의 상징이었는지를 떠올리게 했다.
이대로 가면 전멸이라는 결과만이 기다린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물론 처음 과격하게 맞붙은 이후로는 죽는 이보다 제압당해 쓰러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빌어먹을, 그게 뭐가 다른데!’
제압당했다고 해서 이 화산 놈들이 그들을 순순히 풀어줄 리도 없지 않은가? 분명 무공을 전폐당하고 갇히게 될 텐데, 그건 이들에게는 죽음에 비해 그리 나을 것도 없는 결과다.
“아아아악!”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발작처럼 화산 검수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채 반도 떠오르기 전에, 날아든 검이 그의 다리를 베어 넘겼다.
“……빌어먹을.”
사파인들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차라리 저들이 젊은 혈기에 날뛰며 과격하게만 그들을 몰아붙여 왔다면 이토록 절망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거라면 반드시 틈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저 망할 새끼들은 그 나이가 무색하게 징그러울 만큼 냉정하고 침착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검을 휘두르는 자세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가슴을 가로 베어 상대를 쓰러뜨린 이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쓰러진 이의 손목을 찔러 완벽하게 무력화를 시키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상대를 향해 다가간다. 이런 모습은 그 무위를 떠나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더니.”
누군가가 신음처럼 흘린 그 말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세상은 화산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
어떤 이들인지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절대 이 섬서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제 머리를 범의 아가리 안으로 스스로 밀어 넣는 미친놈이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후회란 아무리 빨리 해도 늦다.
이미 그들에게는 이 잘못된 선택을 돌이킬 길이 없었다.
얼굴을 굳힌 단혼혈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좋지 않군.’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상대가 강한 것은 차후의 문제다. 진짜 문제는 이 머저리 같은 놈들이 전의를 잃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파란 기세를 잡았을 때는 그 누구보다 거칠게 몰아치지만, 한번 기세를 잃어버리면 모래알이 되어 버린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그런 이들이 사파가 되기 때문이다.
제 한 목숨과 제 손에 주어질 재물, 자신의 기분이 가장 중요한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당장 제 목숨이 위험하다 싶으면 상황이 어찌 되었건 제 살길부터 악착같이 찾는 것이 사파의 생리다.
이런 상황에서 전열을 다시 정비할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강력한 우두머리의 존재.
하지만…… 슬쩍 시선을 틀어 보니 석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린 갈천립이 보였다.
‘틀렸군.’
저런 머저리로는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
하기야, 저놈에게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한낱 강서칠살로 그 명성을 떨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놈은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장일소처럼 될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저따위 머저리가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장일소에게는 모욕일 것이다. 애초에 그릇 자체가 다르니까.
‘상황은?’
단혼혈수는 날카로운 시선을 돌려 전장의 상황을 파악했다.
‘병신 새끼.’
회선창귀가 화산 검수 둘을 상대로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 명성에 비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사실 굳이 따지자면 회선창귀를 욕할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우선 어깨에 뚫린 저 구멍이 제 실력을 반도 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그리고…….
‘둘이 아니군.’
겉으로 보기에는 둘과 싸우고 있지만, 실제 회선창귀는 셋과 싸우고 있다. 아니, 어쩌면 셋 이상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검수들의 뒤편에서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 저자에게 어마어마한 압박을 느끼는 모양이니까.
곱슬머리의 어린 검수. 아마 저자가 회선창귀의 어깨에 구멍을 뚫어 준 장본인일 터. 이 먼 거리에서조차 섬뜩한 기세가 대단했다.
혈도살 역시 마찬가지다.
화산 검수 셋을 상대로 조금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저쪽에서 상처를 각오하고 달려들었다면, 이미 피를 뿌리고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굳이 그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그게 아니면 이게 더 효율적이라 판단한 건지, 전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혈도살을 요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화산 제자들의 뒤쪽에도 한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여검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단혼혈수는 전신의 근육이 절로 팽팽하게 당기고, 손바닥에 축축한 땀이 배어나는 걸 느꼈다.
“흐……. 갈천립 이 머저리 같은 놈.”
저 둘만이 아니었다.
이 전장을 냉정히 바라본 이라면 깨달을 수 있다. 지금 그들을 몰아치는 화산의 전력이 실제 전력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화산의 진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지금 검을 휘두르지도 않고 있다.
전장의 곳곳에 스며든 핵심 인사들은 마치 어미 호랑이가 새끼 호랑이에게 사냥 연습을 시키듯, 적당한 먹잇감을 앞에 던져다 주고 뒤에서 찬찬히 전장을 관찰하고 있었다.
누군가 위기에 처한다면 언제든 나설 수 있도록.
그 말인즉슨…… 저들이 시작부터 전면에 나섰다면, 전투는 이미 끝났을 거란 소리다.
‘구파일방 급이 안 된다고?’
웃기는 소리.
구파일방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만한 검수를 백 명이나 보유했을 리가 없다. 천하의 어떤 문파가 이곳에 있더라도 화산을 상대로 부상자 하나 없이 전장을 정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수의 한계야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이미 중소 문파의 수준을 넘었다. 구파에서 이들을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문파가 몇이나 되겠는가?
단혼혈수의 눈이 새파란 빛을 내뿜었다.
지금이라도 그가 직접 나서서 전장을 정리한다?
무리다.
누군가는 분명 존재만으로도 그 양상을 뒤집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장은 휘몰아치는 탁류와도 같아서 어설픈 실력을 믿고 뛰어들었다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휩쓸리게 된다.
그의 실력으로 이 전장의 판도를 아예 뒤집는 것?
불가능하다.
생각을 정리한 단혼혈수가 슬쩍 발을 뒤로 뺐다.
사파인의 특성에 대해 비난이야 했지만, 어차피 그도 사파인이다. 그 속성이 크게 다를 리 없다. 특히나 사패련에 밀려 강북까지 밀려온 이들의 성향이야 다들 비슷하지 않겠는가.
지금 그에게 절실한 건 어떻게든 그의 한 몸을 빼낼 수 있는 생로(生路)였다.
다행히 아직 저들은 그를 딱히 주목하지 않고 있다.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빠져나가는 건 무리일지 몰라도, 그를 주목하지 않는 틈을 타 단숨에 한두 놈을 쓰러뜨리면 그의 몸 하나 빼낼 길을 여는 것이야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추적이 따라붙겠지만, 수도 없는 추적 속에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지 않았던가. 한순간만 포위를 벗어날 수 있다면 살아날 자신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저기!’
실낱같은 틈을 찾아낸 단혼혈수가 땅을 박차며 몸을 날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는가.”
힘이 바짝 들어갔던 다리에 힘이 풀리며 무릎이 꺾였다.
단혼혈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구부렸던 몸을 천천히 폈다. 그리고 어느새 등 뒤에 와 있는 자를 돌아보았다.
“……알고 있었나?”
“그리 섬뜩하게 이곳저곳을 바라보는데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단혼혈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빌어먹을, 그럼 그렇지.’
일이 이리 쉽게 풀릴 리가 없지.
꾸우욱.
주먹을 움켜쥔 그는 자신의 앞에 선 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눈치가 빠르면 명을 재촉하게 되지.”
“하하. 살 만큼 살았는데 그게 대수겠는가?”
“……어린애들이 재롱을 떨고 있으면, 느긋하게 뒤에서 구경이나 할 것이지. 굳이 앞에 나서서 같이 재롱을 떨 필요가 있나?”
“아이들이 저리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뒤에서 뒷짐이나 지고 있을 수 있겠는가? 다른 곳은 어떨지 모르지만, 화산에는 구경꾼이 존재하지 않네.”
단혼혈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한눈에 보아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아무래도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앞에 선 이는 현재 싸우고 있는 화산의 검수들과 달리 확실한 연륜이 엿보이는 이니까.
“누구지?”
나직하게 묻자 앞에 선 이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화산의 장로인 현상이라고 하네.”
“……장로라.”
참으로 불공평한 일이다. 다른 놈들은 이대제자나 삼대제자를 상대하고 있는데 그는 장로라니.
하지만 다시 말하면…….
단혼혈수는 힐끔 현상의 뒤를 넘겨다보았다. 그의 뒤쪽에는 다른 제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늙은이를 죽이면 길이 열린다는 뜻이겠군?”
“그렇겠군. 나를 죽이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걸세.”
우드드득.
단혼혈수의 주먹에서 으드득 뼈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두 손이 새빨간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상대를 잘못 골랐어, 늙은이. 나는 저 머저리 놈들과는 달라.”
“알고 있네.”
현상이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 내가 상대해야지. 물론 이곳에는 나보다 강한 녀석들이 많지만, 어설픈 잔챙이를 상대해서야 장로로서 체면이 안 서지 않겠나.”
“그 체면…….”
비아냥거리려던 단혼혈수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절로 다물어졌다. 일변한 현상의 기에 순간 숨이 막혀 온 것이다.
검을 뽑기 전까지는 사람 좋은 노인으로나 보이던 이가, 검을 쥐자마자 그 기질마저 달라진 느낌이었다.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버텨 낸 노검수의 기운이 묵직한 압력이 되어 그를 짓눌렀다. 저 칼날 같은 어린 제자들과는 다른, 웅혼하고도 무거우며 진중한 기운.
세상이 생각하는 ‘정도(正道)’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기운이다.
“진짜 화산의 검이라는 건가……?”
“그런 건 없네. 모든 것이 진짜 화산의 검이지.”
“…….”
“그저 조금 더 낡고, 조금 더 무거울 뿐이지. 하지만…… 실망시킬 일은 없을 걸세.”
단혼혈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빌어먹을,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어쩌면 이곳이 정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단혼혈수는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그 질긴 목숨 이곳에서 끝내 주마, 늙은이!”
양손에서 핏빛의 강기를 칼날처럼 뽑아낸 그는 단숨에 현상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