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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80화 (876/1,567)

880화. 그렇게 벌레처럼 죽어 가라. (5)

서늘한 청명의 눈이 앞쪽을 주시했다.

이전이었다면 가장 앞에서 누구보다 가열하게 검을 휘둘렀을 청명이지만, 지금 그는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대신 눈으로는 빠르게 전방을 훑었다. 그 어떤 광경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모두의 검 끝에 조금의 주저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검수들의 움직임이다.

무쇠는 망치를 맞아야 단단해지고, 검수는 피를 흘릴수록 강해진다. 그동안 화산의 제자들이 흘린 피와 땀은 저들을 단련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리고 그 겹겹이 쌓아 올린 노력이 지금 이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햇병아리들이…….”

청명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아니, 햇병아리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저 검에 실린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이라면, 저 검 끝이 그려 내는 완벽한 검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이라면 결코 저들을 그리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파아아앗!

그때 마침 누군가가 펼친 매화검법이 치열한 전장 한가운데에 붉은 꽃을 피워 냈다. 곳곳이 피어나는 매화로 붉게 물들어 가는 걸 보며 청명은 살짝 주먹을 움켜쥐었다.

묘하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광경이다.

검이란 평생을 두고 닦아 나가는 것. 감히 완성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편의 좋게 삼 성이니 십이 성이니 말해 대지만, 십이 성을 달성한다 해도 더 오를 곳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니 감히 숙달했다라는 말은 쓸 수 없겠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화산의 제자들이 펼치는 매화검이 과거의 선인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경지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마침내.

자잘한 상처가 가득한 손으로 코 아래를 살짝 문지른 청명이 눈빛을 가라앉혔다.

‘우쭐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쨌거나 지금은 감히 서안에 쳐들어와 화산의 속가를 참살한 저 정신 나간 놈들에 대한 단죄가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뒤쪽에서 전면을 향해 뛰쳐나오는 강서칠살의 모습이 청명의 두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저 새끼들이?”

청명이 움찔하고 발을 떼려는 순간, 한구석에서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르르르!”

“워워. 자, 진정해야지!”

“아니, 사형! 저 새끼들이……!”

“쓰읍. 기다려.”

“아니!”

“기다리라고. 청명이 말 못 들었냐? 다짜고짜 나서지 말라 그랬잖아.”

“끄으으응.”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 들썩이던 조걸이 엉덩이를 빼는 모습을 보며 청명도 슬그머니 다리에 힘을 풀었다.

애초에 이 전투는 그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가 아니다.

“끄응.”

청명이 조걸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날아드는 강서칠살을 향해 몇몇 이들이 몸을 띄워 올렸다.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을 본 순간 청명이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니, 저 새끼가?”

그러고 보니 저놈한테는 나서지 말란 말을 안 했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피에 미친 중놈 새끼가?

“저저…… 부처도 돌아누울 새끼.”

빛을 받아 찬란히 반짝이는 머리를 본 청명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염왕부(閻王斧) 고송(庫頌)의 얼굴에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괴이한 표정이 스쳤다.

이 전장 한가운데서 이런 표정을 짓는다는 게 안일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은 충분히 그럴 만했다.

생각해 보라.

화산이 검문으로 유명하다고는 하지만, 검법만 있는 건 아닐 테니 권법을 주력으로 삼는 권사가 있다 해도 아주 이상할 건 없다.

그 권사가 달려드는 염왕부 고송을 단번에 바닥으로 추락시킬 만큼 정교하고 강한 권력을 날리는 이다? 그것도 퍽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그 권사가 하필 눈 부시도록 반짝이는 대머리인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고, 그 대머리 권사가 그 유명한 황금빛 불광을 내뿜는 건 더더욱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미타불.”

“…….”

대체 뭔가? 이 괴이한 족속은?

뭐라 말할 수 없는 황당함 속에, 고송은 제 손의 염왕부를 꽉 움켜잡았다.

“너는…… 도사냐, 중이냐?”

“아미타불. 당연히 중이외다.”

“그럼 왜…… 도포를 입고 있는데?”

도사복을 입은 중, 혜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사람에겐 저마다 사정이 있는 법이니 시주께서는 굳이 물어 탓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따져 묻지 않을 상황인가? 내 강호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으며 별의별 미친놈을 다 봐 왔지만, 도포 입은 중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이냐?”

“…….”

혜연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그도 이게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 않는다.

당장 소림의 법정이 이 꼴을 본다면, ‘저 미친놈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소림의 제자가 화산의 옷을 입어? 왜, 아주 대가리에 매화도 꽂지 그러느냐? 꽂을 머리카락이 없어 흘러내리겠지만!’ 하며 길길이 날뛰고도 남았을 것이다.

애초에 의복이란 소속을 상징한다. 소림의 제자인 그가 화산의 옷을 입고 있다는 건 사파가 눈살을 찌푸릴 만큼 괴이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뭘 어쩌겠는가?

저 망할 시주가 시키는 수련은 옷자락 따위가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련하다 보면 옷이야 심심하면 찢겨 나간다.

어떻게든 승복을 다시 구해 입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삼 년 내내 그 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혜연은 본분을 지키고자 시도는 해 봤다.

하지만…….

- 승복? 승보오오오오옥? 근데 이 땡중 새끼가 너무 처맞아서 정신이 이상해졌나? 지금 너 편히 수련하시라고 승복까지 구해다 바치라 이 말이냐? 돌았냐? 어? 돌았어? 남의 문파 봉문 하고 수련하는 데 삐질삐질 기어들어 와서 엉덩이 들이밀고 있는 것도 어이없는 마당에, 뭐어? 승보오오오옥?

그 마귀 놈에게 말이 통할 리가 없지.

처음에는 하다못해 도복이 아닌 다른 평범한 옷이라도 구해다 입으려 애썼지만…… 본디 포기하면 많은 것이 편해지는 법. 결국에는 주변에 널려 있는 검은색 도복을 주워 입을 수밖에 없었다.

“꺼, 껍데기.”

“뭐?”

“껍데기 따위는 허울에 불과한 것이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가 아니겠소?”

“그래서 중이 도사 옷을 입고 다닌다고?”

“…….”

“진짜 별 미친놈을 다 보겠…….”

그 순간, 혜연이 진각을 밟으며 권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염왕부 고송의 몸이 부러질 듯 뒤로 꺾였다. 순간적으로 도끼를 들어 막아 내는 데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저 권력이 머리에 꽂혔다면 지금쯤 그의 머리는 잘 익은 수박 꼴이 났을 것이다.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이 맺혔다. 짧게 끊어 날린 권력이 이런 위력이라니, 그럼 제대로 힘을 모아 권을 치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확실히…… 몰골이 우습기는 하지만…….”

혜연이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그렇다고 그대와 농을 하며 놀아 줄 생각은 없소. 무학을 익힌 자의 의무를 저버리고, 약한 이를 핍박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이 미친 중놈이…….”

고송이 이를 갈며 염왕부를 움켜잡았다.

우스운 몰골이나, 이자의 권력은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 충분했다.

“후욱.”

게다가 더더욱 거슬리는 것은 중답지 않은 저 냉정한 눈이었다.

‘소림이겠지?’

소림의 중을 상대해 본 적은 딱히 없지만, 그들 모두가 이자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이자의 눈빛은 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검수에 더 가까워 보이니까.

칼날 같고 냉정한 눈을 보는 순간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길게 탐색할 시간은 없다. 이 와중에도 전열은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다. 저기서 피를 뿌리는 놈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빨리 저들을 도와야 한다.

이대로라면 다른 놈들이 모조리 쓰러지고, 그들 형제만으로 이 많은 이들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

“노오오오옴!”

고송이 앞으로 달려들며 폭발적인 힘으로 도끼를 내리쳤다.

염왕부라는 별호에 걸맞게 그의 도끼에 실린 힘은 명불허전이었다. 일반적으로 함께 중병에 분류되는 도와도 비교도 되지 않는 힘. 내리쳐 끊어 내는 힘만큼은 천하의 어떤 무기도 감히 도끼와 비견될 수 없을 것이다.

휘이이이이잉!

도끼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기세로 귀를 파고들었다. 그 소음과 기세만으로도 웬만한 무인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고 주저앉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도끼를 바라보면서도 혜연의 눈빛은 그저 어둑하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탓.

혜연의 발이 짧게 앞으로 이동했다.

늘 그가 보여 주던 시원시원한 보법이 아니라 몸의 요동을 최소화한 지극히 실전적인 보법.

쿵!

동시에 강하게 진각을 내리밟은 그는 그 힘을 온전히 싣고 주먹으로 떨어지는 도끼를 향해 올려 뻗었다.

‘미친!’

그 광경에 오히려 공격을 퍼붓던 염왕부가 더 놀랐다.

주먹으로 도끼를 막는다고? 주먹으로?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라면 하지 않을, 할 수가 없는 발상이다.

‘그래, 이 오만한 놈. 반쪽을 내주마!’

염왕부는 있는 내력을 모조리 밀어 넣었다. 금방이라도 혜연을 두 동강 낼 기세였다. 이내, 그의 도끼와 혜연의 주먹과 맹렬한 기세로 맞부딪쳤다.

콰앙!

하지만 안타깝게도 염왕부가 기대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주먹에 부딪힌 도끼가 되레 강철 벽에라도 부딪힌 양, 뒤로 튕겨 나온 것이다.

‘뭐?’

염왕부 고송의 눈이 찢어질 듯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틈을 놓치지 않은 혜연이 비조처럼 그에게 쇄도했다.

“헉!”

무릎을 노리고 날아드는 혜연의 발을 보고 기겁한 염왕부는 옆으로 몸을 날리며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 순간 혜연의 몸이 섬전처럼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도끼를 잡은 그의 손목을 걷어찼다.

빠각!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굳이 전해져 오는 통증을 느끼지 않아도 손목이 일격에 박살 났음을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송을 충격에 빠뜨린 건, 그의 손목을 부순 혜연의 각법이 아니었다.

고송을 향해 뻗었던 발을 순간적으로 뒤틀어 허공을 걷어찬 후 몸을 띄워 올린 저 말도 안 되는 경신법이었다.

허공을 딛고 몸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은 그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서로 고속으로 이동하며 싸우는 와중에 어떠한 준비동작도 없이 자연스레 허공을 발판으로 사용하는 것은 생전 듣도 보도 못했다.

‘어떻게…….’

하지만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손목을 부순 혜연이 허공에서 몸을 뒤틀더니 고송의 바로 앞으로 쇄도해 왔다.

동시에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일 권.

엄지를 위로 한 채 주먹을 세로로 세워 뻗어 내는 소림 특유의 권이 고송의 얼굴을 부숴 버리겠다는 듯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큭!”

고송은 이를 악물며 허리를 뒤로 뒤틀었다. 혜연의 주먹이 그의 코 바로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 피했……!’

“꺽!”

하지만 그 기쁨은 채 한순간도 이어지지 못했다. 주먹이 고송의 얼굴을 스치는 그 순간, 혜연의 팔꿈치가 접히며 가슴에 틀어박혔다.

가슴뼈가 모조리 으스러지는 충격에 고송의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으……. 으아아아아!”

고송이 발작적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하지만 혜연은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도끼가 아무리 날카롭다 해도, 안기듯 파고든 이를 베어 낼 수는 없는 법.

“시주.”

그 순간 고송의 배에 혜연의 손이 부드럽게 닿았다.

“악행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오.”

“아, 안……!”

투우우우우웅!

단전과 맞닿은 혜연의 손끝에서 발출된 촌경(寸經)이 고송의 내부를 산산이 부숴 놓았다.

“쿨럭!”

고송의 입에서 붉은 선지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시야가 급격하게 흐려지는 가운데, 고송은 혜연의 얼굴을 어떻게든 바라보려 애썼다.

“너……. 너무…….”

털썩.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마지막에 느꼈을 감정만은 확연했다.

“아미타불.”

혜연이 짧게 불호를 외었다.

“부디 내세에는 선인으로 사시오.”

쓰러진 고송을 일별한 그는 고개를 돌려 다음 상대를 찾아 나섰다.

염왕부 고송.

강서칠살의 둘째로 수많은 악명을 떨쳐 온 그답지 않게 허무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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