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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79화 (875/1,567)

879화. 그렇게 벌레처럼 죽어 가라. (4)

카가각!

구유검객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파아아아앗!

“큭!”

섬전과도 같은 검기가 그의 얼굴 바로 옆을 쾌속하게 스쳤다. 턱의 피부가 갈라지며 그의 턱부터 뺨 아래까지 붉고 긴 자상이 생겨났다.

‘빌어먹을!’

이건 절대 어설프게 익힌 검술이 아니었다. 제 손아귀에 검이 잡혀 있는 건지, 손끝에서 검이 돋아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으로 휘두르고 또 휘둘러 본 검귀만이 쓸 수 있는 검격이다.

그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여자가 그의 검을 무색하게 할 만큼의 검기를 내보인다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계속해서 몸에 상처가 생기니 구유검객의 얼굴에도 노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망할 년이 누구건, 지금 그를 몰아붙이며 온몸에 혈선(血線)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노호성을 터뜨리며 검을 가로로 그었다. 맹렬하게 솟구친 검기가 둑 터진 제방에서 쏟아진 물줄기처럼 세차게 전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이거나 처먹…….”

파르르르!

하지만 그 순간 구유검객은 두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전방에서 갑자기 붉은 꽃잎들이 구름처럼 피어난다 싶더니 그의 검기가 뻗어 나가는 곳을 모조리 점해 버렸다. 채 끝까지 뻗어지지 못한 검기가 꽃잎과 충돌하며 뒤로 한참을 밀려났다.

“컥!”

나아가지 못한 내력이 역류하며 그의 내부를 뒤집어 놓았다. 목구멍으로 비린 피가 울컥울컥 토해져 나왔다.

‘망할!’

이럴 리가 없다.

그는 구유검객이다. 저 어린 계집년이 어미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천하에 명성을 날렸다. 그런 그가 검 대 검의 싸움에서 밀려 피를 토한다?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로.

“이 개 같은!”

구유검객은 검을 뒤쪽으로 슬쩍 당겼다. 이내, 일곱 줄기의 검은 빛살이 뻗치기 시작했다.

당하는 이가 제 죽음조차 알지 못하고 저승에 떨어지게 되는, 가공할 쾌검.

구유검객이라는 이름을 안겨 준 그의 독문 검법, 탈명십이뢰(奪命十二雷)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탓!

검이 발출됨과 동시에 당소소는 바닥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가공할 속도로 쇄도하던 구유검객의 검이 당소소의 목 단 한 치 앞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거두어졌다.

‘뭐…….’

구유검객이 눈을 부릅떴다.

우연? 아니면?

‘말도 안 돼.’

저 어린 여자가 그의 검을 견식 한 적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 지금 처음 보는 검이 어디까지 뻗어질지를 순간적으로 예측하고 그 거리만큼 정확하게 물러났단 말인가?

그런 게 가능한가? 이 지독한 전투 와중에?

아니,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조금만 계산이 어긋난다면 목이 꿰뚫리지 않는가? 대체 무슨 배짱으로 거기에서 멈춰 섰다는 말인가?

‘제정신인가?’

그 순간.

검을 회수하던 구유검객의 눈과 당소소의 감정 없는 두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오싹.

그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내달리는 걸 느꼈다.

일말의 감정조차 담지 않은 눈이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뱀처럼 그를 지켜보고 있다. 작은 움직임 하나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이…… 이……!”

구유검객이 이를 갈아붙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애송이의 눈에 순간적으로 섬뜩함을 느꼈단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감히 저 어린 검수가 전투 중에 그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죽어라아아아앗!”

입에서 악에 받친 고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의 검에서 열두 개의 검은 섬전이 발출되었다.

더 강하고, 더 빠르게.

그가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실은 검격이 열두 개의 뇌전이 되어 당소소를 향해 쇄도했다.

‘물러나도 소용없다.’

한번 당했던 것을 또 당할 그가 아니다. 같은 짓을 한다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목을 꿰뚫어 줄…….

그때였다.

탓!

당소소가 그 자리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녀의 몸을 향해 쏟아지던 검기가 짧게 휘두른 그녀의 검과 맞부딪혔다.

순간, 그 반동을 이용한 당소소가 더욱 높게 몸을 띄워 올렸다.

‘멍청한!’

저건 최악의 수다. 허공에서는 몸의 움직임이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꼬치처럼 꿰뚫어 주마!’

내심 쾌재를 부른 그는 다시 한번 허공에 솟아오른 당소소를 향해 탈명십이뢰를 전개하려 했다.

하지만.

파르르르!

잠자리가 날갯짓하는 듯한 짧은 파공음과 함께 당소소의 검 끝에서 붉은 검기가 피어올랐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이내 수십 송이까지.

구유검객은 검기를 발출하려던 사실조차 잊고 그 광경을 멍하니 보았다.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붉은 꽃이 당소소의 몸마저 가려 버렸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드넓은 하늘이 모조리 붉은 꽃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화아아아악!

피어오른 꽃이 일시에 화르륵 흩날리더니 세상을 향해 비처럼 뿌려지기 시작했다.

붉은 꽃의 비.

“어…….”

그 순간 구유검객의 뇌리에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만천…….”

사천당가를 상징하는 절초.

한번 펼쳐지면 온 하늘에 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당가에서 전해지는 전설의 무학.

“만천…화우(萬千花雨).”

달아날 구석도 없이 쏟아지는 꽃비 사이로, 당소소의 검 끝에 달린 선명한 녹색 수실이 얼핏 보였다. 구유검객의 입에서 앓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가…….”

환상 같은 꽃비가 무정하고 현란하게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온 하늘이 꽃잎으로 뒤덮여 있었다.

“……빌어먹을.”

그 말이 구유검객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아아아악!”

비명이 처절하게 허공에 울려 퍼졌다.

“저…….”

위립산의 입이 절로 헤 벌어졌다.

화산의 검수들이 세 배는 더 많아 보이는 적들을 되레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 화산의 검에 밀려난 이들이 서로 얽혀 들며 점점 더 궁지에 몰리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세상에.”

일방적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일방적인 전장의 양상은 위립산에게 기쁨보다 당혹감을 먼저 안겨 주었다.

저들의 실력이야 앞서서 직접 겪어 본 그가 가장 잘 안다.

그가 직접 상대할 때는 사신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두려웠던 이들이, 저토록 무력하게 밀리고 쓰러질 수가 있는가?

위립산은 문득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안의 다른 문파 장문인들도 하나같이 황망한 표정으로 이 못 믿을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 화산이…….”

“저렇게나…….”

그렇겠지.

화산의 실력을 가장 잘 아는 이들 중 하나라 자부할 수 있는 위립산조차 지금 화산이 보여 주는 모습에 황망함을 금할 수 없는데, 다른 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파아아앗!

화산의 검수가 뿌려 대는 붉은 검기가 충천하여 하늘을 수놓는다.

“저기…….”

누군가의 어정쩡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도 돕는 게…….”

그러자 여기저기서 실소가 터졌다.

“저길 말이오?”

“……아, 아니, 그래도…….”

“우리 실력으로는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것이오. 돕는 것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법이잖소.”

“……그렇긴 하지요.”

다시 모두가 넋 놓고 화산의 검수들을 보았다. 몇몇이 마른침을 삼켰다. 환상처럼 허공을 수놓는 검을 보고 있자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종남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건만.’

화산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

문파의 문도들이 아직 어리고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

그렇기에 수십 년 뒤에는 어찌 될지 몰라도 당장은 일대제자들과 장로들이 쟁쟁하게 버티고 있는 종남을 뒤따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런 인식을 산산이 부숴 놓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아아아아아아악!”

구유검객이 붉은 꽃잎에 휩싸여 비명을 내지르는 광경까지 확인한 서안의 장문인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장래를 논하는 것이 부질없어 보일 정도구나. 지금 당장이라도 종남과 맞설 수 있다.’

‘화산이 이렇게까지 강해질 줄이야…….’

표현하기 힘든 벅참과 뿌듯함이 그들의 가슴에 휘몰아쳤다. 한때는 그들조차 경시했던 이들이 이토록 눈이 부시도록 성장하고 만 것이다.

그 순간 위립산이 절뚝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장문인…….”

그러자 뒷짐을 지고 상황을 살피던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위립산을 마주 보았다.

“위 문주. 몸은 괜찮은가?”

“……예. 저는 괜찮습니다. 장문인.”

“우리가 너무 늦었네. 용서하게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장문인. 이리 와 주신 것만으로도 제자는 감읍할 따름입니다.”

현종이 따뜻한 눈으로 위립산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고생 많았네.”

위립산은 순간 감정이 뭉클하고 울컥했다가 이내 전장을 슬쩍 둘러보았다. 이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이런 환담을 나누고 있는 자신이 새삼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그의 잘못이 아니다. 제자들이 싸우고 있음에도 조금의 걱정도 없어 보이는 현종의 느긋한 태도가 그의 긴장마저 풀리게 만든 것이다.

위립산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무엇이?”

“기세를 잡았다고는 하나, 저들 역시 만만치 않은 이들입니다. 혹 저희가 도울 일이 있다면…….”

“괜찮네.”

“하나…….”

“괜찮다네.”

현종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정도로 문제가 생길 아이들이 아니지. 그러니 그저 믿고 지켜보게나.”

“아…….”

뭔가 더 할 말이 남은 듯 머뭇거리던 위립산은 현종의 담담한 얼굴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제자들을 향한 확고한 신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거의 현종은 제자들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적을 상대할 때도 일말의 불안을 감추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제자들이 더없이 강대한 적을 상대하고 있음에도 불안을 내비치지 않는다.

현종이 달라진 것일까? 아니면…….

“이상한가?”

“아…….”

그런 위립산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현종이 살짝 웃으며 물어왔다. 위립산은 움찔하여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제자가 장문인의 깊은 뜻을 짐작하기 어려워…….”

“자연히 그렇게 되더군.”

“……예?”

현종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전장을 물끄러미 보았다.

매화검기가 전장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일 리 없다. 저 안은 지금 목숨이 오고가는 위험하고도 두려운 곳일 터.

하지만.

“저 아이들이 어떤 시간을 보내 왔는지 지켜본 이라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네. 이런 일로 노심초사하는 것은 저 아이들에 대한 무시이고, 저 아이들이 보내 온 시간에 대한 무시가 될 테니.”

그 말을 들은 위립산이 멍한 얼굴로 전장을 돌아본다.

‘대체…….’

현종의 말에는 더없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그렇다 보니 대체 이들이 지난 시간 대체 어떤 수련을 해 왔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걱정할 것 없네.”

그때 현종의 담담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화산은 강하니까.”

위립산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다 울컥 치밀었다.

이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던가?

어쩌면 평생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말이 마침내 현종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장문인…….”

더없이 강한 화산의 제자들.

그리고 더없이 진중하고 굳건해 보이는 화산의 장문인.

화산의 이름을 쓰는 이라면 본산의 제자이건 속가의 제자이건 같은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예?”

그때 현종이 턱짓으로 한 사람을 가리켰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었으면 벌써 길길이 날뛰었을 놈이 아직까지 참고 있는 걸 보니 아직 위험하려면 멀었지.”

그가 가리킨 곳에, 한 사람의 뒷모습이 있었다. 뒤쪽에서 팔짱을 낀 그 모습이.

대충 높이 질끈 묶어 놓은 치렁치렁한 머리만 봐도 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다.

‘청명 도장.’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그 굳건한 등을 보며 위립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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