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8화. 그렇게 벌레처럼 죽어 가라. (3)
홍대광의 눈이 부릅뜨였다.
전신에 난 자상에서 고통이 욱신욱신 번져 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이게 대체 무슨.”
화산의 제자들이 사파들을 일방적으로 몰아치고 있다.
섬전 같은 검기를 날려 대고, 완벽한 연계로 적을 몰아붙인다. 화산의 성명절기인 매화검기가 곳곳에서 그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피워 내고 있었다.
“세상에…….”
피를 뿌리며 속절없이 쓰러지는 사파들을 보고 있자니 홍대광은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분명 죽음을 각오하고 버티며 화산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보통 기대라는 건 현실로 이뤄지기 힘들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그가 정말로 기대한 것은 화산이 늦지 않게 도착하여 그들과 함께 손을 맞추어 저들을 비등하게 상대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화산이 홀로 저들을 일방적으로 몰아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저 사파인들이 누구인지, 어떤 이들인지 그 면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분타주 홍대광에게 그건 기대를 품는 것만으로도 황당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곳, 그의 바로 눈앞에서 기대조차 해 보지 못한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대체 지난 삼 년간 무슨 짓을 한 거냐, 이 미친놈들…….’
어린 티가 묻어나던 이들의 얼굴이 어느새 검수의 얼굴로 바뀌어 있다.
파르르르!
가공할 쾌검(快劍)으로 상대를 밀어 내고, 능수능란한 유검(柔劍)으로 상대의 반격을 흘린다. 그리고 거리가 조금만 벌어졌다 싶으면 화산파 특유의 환검(幻劍)이 화려한 꽃을 피운다.
“이게 화산…….”
한때, 저 무당조차 밀어내고 천하제일검문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던 화산이 지금 이곳에서 세상을 향해 포효하고 있다.
꾸우욱.
홍대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에 열기가 차오르고 가슴속에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 벅찬 마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외쳤다.
“잘한다! 다 조져 버려! 저 빌어먹을 새끼들!”
“…….”
생각지 못한 상황에 갈천립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대형!”
“…….”
“대형!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대형!”
순간 움찔한 갈천립이 옆을 돌아보았다. 담해가 사색이 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화산파가 도착한 후로 갈천립을 에워싸고 지키던 다른 동생들 역시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대로 두면 다들 무너집니다!”
갈천립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빌어먹을.’
핏발 선 눈으로 전장의 상황을 다시 한번 훑었다. 저 애송이……. 아니, 이젠 차마 애송이라 부를 수 없는 화산의 검수들이 그가 끌고 온 정예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하고 있었다.
기세에 눌리고,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 사파는 점점 더 뒤로 밀려나고 뒷걸음질 치며 이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상황은 오히려 반대여야 했다.
아무리 명문정파의 제자들이라고는 하나,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깟 명성에 짓눌릴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전장을 제대로 겪어 보지 못했을 저 애송이들은 바로 앞에서 사람의 목이 날아가고 팔이 끊어지는 전장의 무게에 짓눌렸어야 옳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면 제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게 전장이 아닌가?
그런데…….
“히익!”
“무, 물러서! 저 개 같은 꽃잎이 또 날아든다.”
“아아아악!”
사색이 되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쪽은 오히려 사파 쪽이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수십 년간 강호에서 치렀던 숱한 전투를 통해 명성과 실력을 손에 넣은 이들이, 제 반도 살지 않은 어린놈들에게 이렇게나 처참하게 밀리고 있다니.
게다가 저 악귀 같은 화산 놈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한결같이 섬뜩한 검기를 뿜고 있다.
‘이게 명문이라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정파들 모두 이런 게 가능했다면 정과 사가 팽팽하게 나뉜 적도 없었을 터. 이건 명문정파의 힘이 아니라 온전히 화산의 힘이다.
‘처음에 기세를 너무 크게 잃었다. 저 빌어먹을 놈들이!’
가장 처음 충돌하는 순간 몇몇이 제대로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목이 잘려 나간 것이 가장 타격이 컸다.
과감함을 넘어 잔인할 정도의 손속.
일시적인 동맹이긴 하나, 어쨌든 바로 앞에서 동료가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본 이들은 당연히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초조하게 생각을 이어 가던 갈천립이 순간 눈을 부릅떴다.
‘이건 우리가 하려던 것 아니었나?’
“이……!”
그는 노기를 누르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형!”
또다시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천립은 정신을 다잡았다. 분석 같은 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번 크게 기세를 잃어버린 이상 수습하지 않으면 정말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는 내력을 실어 크게 외쳤다.
“철귀! 혈도살! 회선창귀! 단혼혈수!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셈이냐!”
한번 꺾인 기세를 되살리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더 강한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 전장의 기세란 언제나 몇몇 고수의 활약에 따라 뒤집히는 법이다.
“너희도 합류해라! 더 걷잡을 수 없어지기 전에, 저 애송이 놈들에게 하늘이 높다는 걸 알려 줘라!”
“예! 대형!”
그의 주위를 지키던 강서칠살이 재빠르게 앞쪽으로 쇄도했다.
“빌어먹을…….”
갈천립의 손바닥에 축축한 땀이 배어났다.
이리될 일이 아니었다. 이 서안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은하상단의 재물을 털어 청해로 나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일이 왜 이렇게까지 꼬였단 말인가?
‘아니! 아직 아니야!’
하지만 아직 크게 어그러진 건 아니다. 저 망할 놈들을 정리하기만 하면 모든 건 그의 계획대로 돌아갈 것이다.
‘반드시!’
이를 악문 갈천립의 눈에 전방으로 몸을 날리는 이들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파아아앗!
검 끝이 섬전처럼 어깨로 파고들었다.
“아악!”
삽시간에 어깨를 관통당한 이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어깨를 찔러 낸 검을 비틀며 뽑은 화산의 검수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재차 검을 찔러 상대의 단전에 박아 넣었다.
“끄윽…….”
아랫배를 부여잡은 이의 두 눈에 절망이 어렸다. 단전이 부서진다면 다시는 무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이건 평생을 무인으로 살아온 이에게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다.
털썩.
무릎을 꿇은 이가 이내 앞으로 고꾸라졌다.
상대를 제압한 화산의 삼대제자, 진태의 발이 상대의 가슴께로 파고들었다.
쿵!
쓰러진 이를 걷어차 뒤로 밀어 낸 그는 재빨리 호흡을 가다듬었다.
피비린내가 콧속으로 훅 밀고 들어왔다. 거기에 살기 위해 발악하는 이들의 몸에서 쏟아지는 열기와, 끓는 듯한 비명,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파열음까지. 모든 게 온몸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점점 더 차분히 가라앉기만 했다.
쇄애애액!
그 순간 그의 머리를 향해 새파란 예기를 머금은 도가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머리 쪽을 향해 쇄도하는 도기를 확인한 진태는 아주 잠시 주변을 살폈다.
‘없어.’
상대해야 할 것은 이게 다다. 등 뒤는 사형들이 받쳐 주고 있다.
상황을 깔끔하게 파악한 그는 오히려 앞으로 뛰어들었다. 도란 본디 그 힘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병기.
하지만.
카앙!
진태가 휘두른 매화검의 끝이 도의 손잡이 바로 근처를 올려 치니 날이 위로 휙 튕겨 올라갔다. 도가 위로 튕겨 올라가는 순간 상대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안일하다.
힘으로 누르려 든다고 그걸 그대로 상대해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은 부분을 맞상대하면 얇은 검으로도 충분히 저 도를 걷어낼 수 있다.
도가 힘을 잃자마자 검이라는 병기의 강점을 가장 확실하게 살릴 수 있는 가공할 찌르기가 연이어 펼쳐졌다.
‘이 정도가 아니야!’
피가 튀고 살이 갈리는 전장?
웃기지도 않았다.
그들이 겪어 온 수련이 이보다 백 배는 더 맹렬했고, 이보다 백 배는 더 잔혹했다.
살기?
저 망할 새끼의 살기를 바로 앞에서 받아 본 이에게 이런 살기는 간지럽지도 않다. 심지어 이놈들에게선 반드시 상대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저 빌어먹을 놈을 상대하고도 살아남은 생존자다. 그런 그에게 이들의 기세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온화하고, 그 공격은 너무도 정직하기만 하다.
진태는 침착하게 상대의 힘줄을 갈라 제압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파아아아앗!
그의 얼굴을 향해 예기 서린 검이 별안간에 휙 날아들었다.
“읏!”
진태의 허리가 급격하게 뒤로 꺾였다.
‘언제?’
분명 주변에 다른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형들이 제 상대를 놓치지는 않았을 텐데 이 검은 대체 어디서 날아든 것이란 말인가?
그의 얼굴 바로 앞을 스치고 지나간 검은 허공에서 빙글 회전하더니 이내 먹이를 쫓는 독사처럼 목을 향해 다시금 떨어져 내렸다.
절체절명의 상황.
하지만 진태는 당황하지 않고, 자세가 흐트러진 그대로 검을 빗겨 쳐올렸다. 검과 검이 충돌하며 전해진 어마어마한 충격이 그의 어깨까지 경련하게 했다.
“큭!”
힘을 반쯤 흘려 냈는데도 그 충격을 감당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니 알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상대했던 이들과 이자가 격이 다르다는 것을. 진태는 일단 몸을 빠르게 회전하며 상대의 범위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쇄애애액!
한번 기세를 잡은 상대의 검은 결코 그를 호락호락하게 놓아주지 않았다. 집요하게 뒤쫓으며 자세를 바로잡지 못하게 노려 왔다.
“이……!”
진태가 이를 악물었다.
어설프게 달아나다가는 정말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그는 제 옆구리를 내어 줄 각오를 하며 검을 고쳐잡았다.
그때.
카앙!
눈앞으로 무언가가 번쩍했고, 그를 추격해 오던 검이 뒤로 튕겨 나갔다. 진태는 제 앞에 내려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순간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이놈은 제가 맡을게요, 사형.”
그 말에 진태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에서 중요한 것은 배분이 아니라 실력이다. 더 강한 이가 더 강한 자를 상대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 선 이는 그보다 늦게 들어왔지만 분명 더 강하다.
“흐음.”
손목이 시큰거린다는 듯 검을 잠깐 까딱인 사파인은 옅게 긴장감이 어린 눈으로 앞에 선 화산의 검수를 바라보았다.
칼날 같은 기세와 흐트러짐 없이 안정적인 자세.
그야말로 검수의 표본이라 할 만했다.
“같은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 통성명 정도는 하지. 나는 구유검객 황성(黃聲)이라 한다. 네 이름은?”
“너 따위에게 알려 줄 이름은 없어.”
“…….”
그 순간 구유검객의 두 눈에서 새파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 망할 년이…….”
화산의 검수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려 그의 목을 겨누었다. 그 서늘하고 날카로운 기세에 구유검객은 이를 악물었다.
“같은 검을 쓰는 사람?”
북해의 바람처럼 차가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건 내 검을 모독하는 말이야. 너 따위가 쓰는 검과 내가 쓰는 검이 같을 리가 없으니까.”
“…….”
“똑똑히 알고 죽어라. 이게 화산의 검이다.”
검 끝에 화산의 정기를 품은 당당한 화산의 검수.
삼 년의 시간만큼 더욱 단단해진 당소소가 칼날 같은 눈빛을 내뿜으며 단숨에 구유검객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