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5화. 어떻게 죽고 싶냐? (4)
“아버님.”
위소행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대는 위립산을 부축했다.
생각 같아서는 바닥에 눕혀 쉬게 해 드리고 싶지만, 이곳은 전장이다. 부들거리는 다리로 필사적으로 버티고 선 화영문도들을 위해서라도 위립산이 벌써 쓰러져서는 안 된다.
“……소행아.”
“아버님. 왔습니다……. 도장님이…….”
“그래.”
위립산의 목소리에서도 숨길 수 없는 안도감이 묻어났다.
상황은 딱히 바뀌지 않았다.
아직 그들을 노리는 이리의 송곳니는 날카롭고, 주린 배를 충분히 채우지 못한 저들은 다시 맹수의 야성을 드러내고 그들을 물어뜯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립산은 더는 걱정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저 앞에 등을 보이고 선 사람의 이름을 아는 이라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면 누구라도 위립산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절벽 끝에 선 듯, 제 목숨을 내던지고 싸우던 서안의 무인들은 앞에 버티고 선 등을 보고는 눈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청명 도장.”
“도장…….”
“화산이…….”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얼거림이 다시 한번 실감하게 만들었다.
“……화산이 왔다.”
그 말의 울림이 지금껏 버텨 낸 이들을 휩쓸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화산이라는 이름은 이 서안에서 딱히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절대 아니다.
서안을 넘어 섬서에서, 화산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죽음에 공포에 질려 있던 이도, 검을 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이도, 달아나고 싶은 다리를 필사적으로 잡아끌던 이들도. 모두 화산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다시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고작 세 명의 등장만으로 말이다.
‘좋지 않군.’
한편 상황을 지켜보던 갈천립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서안의 무사들이 악착같이 들러붙은 것쯤이야 그저 궁지에 몰린 쥐새끼의 발악 정도로 치부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아니다. 저들로 인해 분위기가 완전히 일변했으니까.
더 큰 문제는 조금 전까지 그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쳐 날뛰던 이들이 지금은 숨을 죽이고 있다는 점이다.
더 기세가 죽었다가는 그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
갈천립이 불편한 심정으로 앞쪽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매화가 새겨진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가 양손을 늘어뜨린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두 눈에 담긴, 시린 냉기를 직면한 순간 갈천립의 머릿속엔 자연히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한때는 너무도 유명했던, 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이제는 조금 그 빛이 바래 버린 이름 말이다.
“그렇군.”
갈천립이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그 화산검협인가?”
화산검협.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오히려 사파 쪽이었다.
“화산검협?”
“장강에서 그…….”
사파인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차마 말을 다 잇지는 못했지만, 뒷말이 무엇이었는가는 명백하다.
그 장일소와 호각으로 맞붙었다던.
이곳의 모두는 사패련을 피해 달아났다. 그런 이들에게 사패련의 련주인 장일소의 이름이 얼마나 큰 무게로 다가올지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사패련의 련주이자 명실상부한 사파제일인.
강남을 피와 죽음의 땅으로 만들고, 마침내 강남일통을 이뤄 낸 신화의 주인.
한때는 그의 이름 앞에 신주오패 중 하나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지만, 장강참변으로부터 삼 년이 지난 지금은 천하의 그 누구도 장일소의 앞에 그런 멍청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화산검협의 이름도 빛날 수밖에 없다. 최근 몇 년 내에 그 장일소의 명성에 작은 흠집이나마 새긴 이는 화산검협이 유일하니까.
‘저자가…….’
‘그 소문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사내는 가타부타 말없이 입을 연 갈천립을 응시할 뿐이었다.
“맞는 것 같군.”
청명이 대답하지 않자 갈천립이 나지막이 웃었다.
“애송이가 허명을 얻더니 꽤 오만해진 모양이군. 멍청한 놈아. 설마 네가 장일소와 대등한 무인이라는 말을 믿는 이가 있겠느냐? 애초에 믿지 않았지만, 이리 눈으로 보니 더욱 확실해지는군.”
그 말에 사파인들이 다시 한번 청명을 경계하며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할 말이 없나?”
그때 말이 없던 청명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이가 없군.”
“뭐가 어이가 없지? 네가 장일소 그 머저리 놈 정도는 된다는…….”
갈천립이 빈정거렸지만 청명은 그의 말허리를 가차 없이 끊었다.
“병신 같은 사파 새끼가 내 앞에서 주둥아리를 다 털어 대고.”
“…….”
갈천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네놈…….”
“네 말대로야.”
여전히 갈천립의 말을 성의 있게 들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내 앞에서 사파 놈이 주둥이를 털려면, 그래. 네가 말한대로 장일소 그 병신 새끼 정도는 돼야지. 그 새끼가 지껄이는 말은 그래도 참고 들어 줄 만은 하거든. 그런데…….”
청명의 입에 비웃음이 내걸렸다.
“너는 아냐. 이 조무래기 새끼야.”
“…….”
“그러니 주둥이 처다물어. 죽은 놈과 대화하는 취미 같은 건 없으니까.”
갈천립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조무래기……?”
그가 살면서 언제 저런 애송이 놈에게 이런 취급을 당해 보았겠는가?
게다가 그를 더욱 분노하게 하는 건, 저 개 같은 애송이 놈이 그를 장일소만 못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건 갈천립에게 있어서 역린이나 다름없다.
머리카락이 거꾸로 곤두설 만큼 분노한 그는 주먹을 콱 움켜쥐며 화를 내리눌렀다. 이 많은 이들 앞에서 노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그가 저 애송이 놈에게 말려들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이를 갈아붙인 그는 최대한 냉정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애송이 놈이 입이 맵구나. 하지만 허세는 적당히 떨어야지. 네가 설사 소문만 한 실력을 가졌다 한들, 셋으로는 아무것도…….”
“냄새 나는 주둥이 처닫으라고 했지.”
하지만 이번에도 차가운 음성이 갈천립의 입을 틀어막았다. 갈천립의 얼굴은 이제 더 이상 굳을 수 없을 만큼 차게 굳었다.
“이 개 같은 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청명이 이를 드러냈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네놈들을 다 찢어 죽이고 싶은 걸 참아 주는 중이야. 그러니까 아가리 털지 마.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저 개자식이!”
강서칠살의 막내 담해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하지만 갈천립은 청명의 말에서 분노보다는 오히려 의아함과 괴이함을 느꼈다.
“참고 있다고?”
“…….”
“왜? 뭘 참는다는 거냐?”
“간단하지.”
청명이 비웃음을 담고 말한다.
“너희를 잡아 죽일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뭐라고.”
“그리고 또 하나 착각을 정정해 주지.”
청명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누가 셋이라고?”
그리고 그 순간.
“분명 셋은 아니지.”
등 뒤에서 또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갈천립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무복을 입은 헌앙한 사내가 느릿한 걸음으로 대문을 넘고 있었다.
그를 본 순간 갈천립의 몸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걸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호흡. 그 모든 것이 저자가 자신의 몸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른 고수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노기가 실린 그의 시선이 갈천립의 낯에 잠시간 머물렀다.
“딱히 셋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사내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 뒤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언제?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재물을 내리고 옮기기 위해 과할 정도로 커다랗게 지어진 장원을 둘러싼 담벼락 위로 검은 무복을 입은 이들이 하나둘 올라섰다.
그 모습을 본 사파인들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뒤흔들렸다.
포위당해서?
아니면 예상하지 못한 적이 나타나서?
아니다. 그들이 당황한 이유는, 지금 그들을 포위한 이들이 흘리는 기세가 너무도 날카롭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정파 특유의 묵직하고 온화한 기세가 아니다. 손을 데면 베일 것 같은……. 아니,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저미는 것 같은 칼날 같은 기세가 그들을 압박했다.
특히나 그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담벼락 위에 올라선 이들의 중앙에 선 여인이었다.
과할 정도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아름다움마저 뒤덮어 버리는 냉혹하고 차가운 살기.
감정이라고는 한 올도 실리지 않은 그 시선을 마주한 이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검귀…….’
일백이 넘는 검귀들이 뿜어낸 살기가 자욱했다.
실력이 뛰어난 이일수록 더욱 큰 압박감을 받았다. 저런 기세를 흘리는 이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어야만 저들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 수 있으니까.
‘이건…….’
담해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런 놈들이 무려 일백이라니…….
‘빌어먹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저들의 가슴에 새겨진 매화 문양만 봐도 확실하다.
화산파.
한때 천하제일검문의 자리를 노렸던 섬서의 명문검파.
하지만 지금의 화산은 결코 명문이라 할 수 없는 곳이다. 화산이 떨친 명성은 화산파의 본연의 힘이 아니라 저 화산검협의 활약에 기댔기에 가능했단 걸 세상 누구나 알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실제로 조우한 화산은 그런 담해의 생각을 사정없이 부숴 놓았다.
할 수만 있다면 화산 자체는 별게 아니라는 말을 지껄였던 놈들을 모조리 찾아내서 그 입을 난자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후회라는 건 언제나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고, 틀린 정보를 알아챘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난 뒤가 아니던가.
드넓어 보였던 은하상단의 장원이 한없이 좁게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대문으로 들어와 그들의 뒤를 점거한 이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세 사람의 노인이 묵직한 걸음을 옮기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자, 장문인!”
“장문인!”
화영문도들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화산의 장문, 현종이 차게 굳은 얼굴로 걸어 들어와 장내의 상황을 그 두 눈에 담았다.
식어 가는 처참한 시신들과, 숨은 붙어 있되 피로 범벅이 된 생존자들을 본 현종의 두 눈에 보기 드문 노기가 진득이 휘몰아쳤다.
“감히…….”
주먹을 움켜쥔 채 이를 간 그가 외쳤다.
“운검. 백천!”
“예! 장문인!”
호명된 두 사람이 그 자리에 곧장 부복했다.
현종이 내뿜는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제자들과 같은 짙은 살기는 아니나, 거산과도 같은 진노였다.
화산의 장문인이란 명성이 없다 해도, 지금의 현종을 본다면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었다.
“감히 섬서를 침범하고.”
현종의 묵직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 순간 사파인들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화산의 친우를 공격하고!”
그 말을 들은 화영문도들과 서안 문파의 문도들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화산의 땅에서…….”
짧게 숨을 고른 현종이 무게 실린 목소리로 단호히 명했다.
“감히 무도한 짓을 저지른 이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라! 화산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알려 주어라!”
“명을 받듭니다!”
챙! 챙!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감정이라곤 없어 보이는 일백의 검수가 한꺼번에 검을 뽑아 드는 모습은 전율과 공포를 동시에 일으켰다.
그들을 기다렸던 이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전율과 벅참을.
그들을 상대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숨통을 옥죄는 압박감과 공포를.
“화산의 이름으로!”
백천의 입에서 웅혼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악적들을 처단하라!”
검을 아래로 뻗은 화산의 제자들이 동시에 사파를 향해 쇄도했다. 흡사 서안의 한중간에 검은 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움직임이 세상에 선언했다. 마침내 화산이 돌아왔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