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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74화 (870/1,567)

874화. 어떻게 죽고 싶냐? (3)

휘이이잉!

귀곡성 같은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든 회선창귀의 창이 윗가슴을 파고든다. 쩍 갈라진 살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홍대광은 손에 들린 타구봉으로 창을 쳤지만, 실린 힘이 어린아이 손장난에 실린 힘만도 못했다. 눈에도 이젠 빛이 거의 꺼졌다. 얼마나 극한까지 몰려 있는지가 여실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큭큭.”

회선창귀는 나지막이 비웃음을 흘리며 창을 회수했다.

“멍청한 거지새끼!”

저런 상처를 입고도 아직 두 발로 서 있다는 것은 칭찬해 줄 만한 일이다. 죽음에 거의 닿아 있으면서도 아직 싸우겠다고 저 짤막한 봉을 휘둘러 대는 건 박수를 쳐 줄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의미한 발악이다.

“핫!”

회선창귀의 창이 십여 개의 창영을 만들며 홍대광의 가슴을 농락하듯 난자했다. 홍대광은 기운 잃은 몸으로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춤을 추듯 허우적대다 뒤로 물러났다.

“끝이다!”

더는 가지고 노는 것도 질린 회선창귀가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강맹한 경기를 머금은 그의 창이 단숨에 홍대광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숨통을 끊기 위해 날아드는 창을 보면서도 한계에 도달한 홍대광은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회선창귀는 자신의 창이 홍대광의 목을 꿰뚫을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슬쩍 시선을 돌려 다음 사냥감을 물색했다.

‘다음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카앙!

창을 잡은 손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이 엄습했고, 뒤이어 몸이 뒤로 맥없이 튕겨 났다.

‘뭐?’

쿵!

창대를 바닥에 박으며 겨우 균형을 잡은 회선창귀는 경악하여 급히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나타난 한 남자가 그와 홍대광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언제?’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그가 홍대광의 죽음을 확신하고 아주 잠시 시선을 돌린 그 찰나에 사이로 뛰어들어 그의 창을 막아 냈다고?

저 젊은 놈이?

회선창귀가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훑었다. 수많은 전장을 겪으며 발달한 생존본능이 우선 상대의 역량부터 파악하려 드는 것이다.

검은 무복.

한 손에 쥔, 다소 가느다란 검.

젊다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먼저 눈을 잡아끈 것은 검을 잡은 손과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뚝에 새겨진 수많은 흉터였다.

일부러 새겨 넣기라도 한 듯 종횡으로 그어진 흉터가 마치 거미줄처럼 손과 팔을 뒤덮고 있었다.

순간 회선창귀의 등을 타고 소름이 올랐다.

‘저건…….’

예전에 몇 번 본 적 있다.

전장만을 찾아 천하를 배회하는 낭인들. 파리목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들 중에도 괴이할 정도로 오래 살아남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의 손이 딱 저랬다.

저 손은 수많은 전투를 겪고, 숱하게 사선을 넘나든 이들의 것을 닮았다.

그때 끼어든 사내가 회선창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였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홍대광은, 그런 건 이미 잊기라도 한 것처럼 제 앞에 선 이의 등을 보며 넋을 놓았다. 흡사 꿈이라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걸.”

바짝 마른 입이 잘 열리지 않아 그는 몇 번이고 입을 달싹였다.

익숙하고도 낯선, 듬직한 뒷모습. 홍대광은 그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조걸 도장?”

그러자 조걸이 고개를 슬쩍 돌려 홍대광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아…….”

홍대광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이고 눈만 끔뻑이다가 마침내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스르륵 허물어졌다.

털썩.

아주 주저앉아 버린 그의 안색은 몇 번이고 일변했다. 금방이라도 화를 낼 듯 입술을 깨물었다가, 안도했는지 한숨을 내쉬다가…….

그렇게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던 홍대광이 결국 입에 담은 것은 원망이었다.

“제길……. 빨리…… 좀 오실 것이지.”

“죄송합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는데.”

“아니……. 지금이라도 와 줘서 다행이지. 지금이라도. 아이고…….”

그 양을 가만 보던 회선창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놈들이?’

이들은 지금 명백히 그를 무시한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이런 굴욕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이것들이 나를 무시해?”

그가 막 한마디를 더 하려는 찰나 조걸의 눈빛이 그에게 닿았다.

움찔.

감정 없이 응시해 오는 그 눈을 본 순간 회선창귀의 입이 의지와 무관하게 절로 닫혔다.

그 스산한 눈빛 앞에서, 그의 본능이 더는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를 보내온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어린놈에게 겁을 집어먹기라도 했다는 건가?’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회선창귀가 혼란을 느끼던 그때였다.

“이 개자식이!”

옆쪽에서 들려온 짐승 같은 울부짖음에 회선창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틀었다.

“괜찮으십니까?”

“……유, 윤종 도장.”

조금 전까지 철귀를 상대하던 화영문주를 누군가가 부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철귀는 그런 그에게서 멀리 떨어진 채 으르렁댈 뿐, 차마 달려들질 못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회선창귀는 그제야 이 전장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를 느꼈다.

분위기가 변했다. 괴이한 일이지만, 지금 전장의 분위기는 명백히 조금 전과는 달랐다.

특이점이라고는 두 사람. 아니, 고작 세 사람이 합류한 것뿐이다.

그런데 그토록 격렬하던 전투는 어느새 멈춰 버렸고, 조금 전까지 사정없이 주위를 할퀴고 물어뜯던 이들은 거리를 벌리고 낮게 으르렁대기만 할 뿐이다.

영역을 두고 다투던 늑대들이 어느새 다가온 범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반대로 그 셋의 존재를 확인한 서안 무인들의 얼굴에는 벅찬 환희와 안도가 들어찼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울먹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회선창귀는 어안이 벙벙했다.

겨우 세 명이다. 그 셋의 등장으로 용광로처럼 끓던 전장이 멈춰 버렸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놈들이 대체 누구이기에?’

“어이.”

그 순간, 그의 앞에서 선 이의 검이 섬전처럼 날아들어 왔다.

‘뭣?’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검은 이미 그의 어깻죽지에 틀어박혀 있었다.

“끅!”

어깨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회선창귀가 정신없이 뒤로 몸을 물렸다. 단번에 일 장 이상 뒤로 물러난 그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힐끔 어깨를 내려다보니 갈라진 의복 사이로 울컥울컥 피가 샘솟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겪은 일이 환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보이지도 않았어.’

어떻게 사람이 휘두른 검이 이토록 빠를 수 있다는 말인가?

회선창귀는 난생처음 보는 쾌검에 전율했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내달렸다.

그 쾌검을 선보인 이가 그의 반도 채 살지 않았을 젊은 무인이라는 사실에도 놀랐으며, 지금부터 그가 그를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중압감을 느꼈다.

저벅. 저벅.

그의 어깨에 바람구멍을 낸 조걸과 위립산을 구해 낸 윤종이라는 자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숨통을 짓누르는 기세에, 회선창귀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는 몸뚱이를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누구도 말릴 수 없을 것 같았던 사파도, 목숨을 걸고 응전하던 이들도 모두 손을 멈추고 앞으로 나서는 이들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이놈들은 대체…….’

그 순간 무언가가 회선창귀의 시선을 잡아채었다. 그는 충격에 눈을 부릅떴다.

그를 향해 다가오는 이의 가슴팍에 매화 문양이 새겨진 걸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화, 화산……?”

이곳 사람들이 내도록 입에 달고 있던 그 화산이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진 회선창귀는 앓는 듯 내뱉었다.

“화산파?”

검은 무복과 가슴에 새겨진 붉은 매화 문양은 너무나도 유명한 화산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보자마자 화산이라는 이름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 것은, 저들이 내뿜는 기세가 너무 섬뜩해서였다.

지금껏 그들이 상대했던 정파인들과는 너무도 다르고 이질적인 기세. 게다가 저 숨 막히도록 뿜는 살기는 또 어떤가.

그러니 도저히 이들을 보자마자 화산이라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도사가 사파보다도 더한 살기를 뿜어낸다는 건 상상도 못 해 봤으니까.

‘화산이라고? 그럼 이자가 설마……?’

그때였다.

“물러서 있어. 다친다.”

“도, 도장님. 저는…….”

“이야기는 조금 뒤에 마저 하자.”

한 사람의 목소리가 태연하고 편안하게 전장에 울렸다.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느릿한 목소리였다.

저벅.

그 목소리의 주인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대충 쓸어 높게 묶은 머리.

살짝 작은 듯한 키.

걸음에 맞춰 펄럭이는 검은 도포.

크게 인상적이진 않은 모습이었다.

칼날과도 다름없는 기세를 뿜어내는 조걸이나, 사위를 누르는 위압감을 뿜어내는 윤종에 비하면 이자의 기세는 너무도 평범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회선창귀는 도저히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건 본능이 발하는 경고였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은 본능적으로 그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이가 누구인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지금 그의 본능이 말하고 있다.

저자가 지금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저벅. 저벅.

느릿하게 걸어 나온 그는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스윽.

그리고 죽어 쓰러진 이들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흡사 눈에 새기기라도 하는 듯 그 시선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 중 누구도 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스윽.

사내의 시선이 다시 이동했다. 이번엔 부상을 입어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게로였다.

그가 침묵한 채 시선만 움직이는 동안 흐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진대, 세상이 멈추기라도 한 양 길게 느껴졌다.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힌다는 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작은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무서울 정도의 고요함이 상단 전체를 짓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사내의 시선이 다시 천천히 돌아왔다.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처음과 그리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고, 눈빛 역시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그 눈빛을 받는 사파인들이 느끼는 위압감은 결코 처음 같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살육과 죽음, 고통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주…….”

모두 숨을 죽이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마치 그래야만 한다고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잘도 저질러 놨네.”

사내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그 섬뜩한 미소에, 회선창귀와 철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서 너희…….”

사내는 흡사 하나하나의 얼굴을 모두 봐 뒀다고 말하는 듯 앞에 선 모든 사파인들을 좌에서 우로 훑었다.

“어떻게 죽고 싶냐?”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이제껏 뜨거웠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전장의 공기가 얼음장같이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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