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2화. 어떻게 죽고 싶냐? (1)
“아아아아악!”
긴 창이 가슴을 꿰뚫었다.
앞을 막아선 의검문도의 가슴에 창을 더 깊게 박아 넣은 회선창귀는 기괴한 얼굴로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병신 같은 놈이.”
“끄……. 으으…….”
파아아앗!
단숨에 창을 뽑아내자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뜨거운 피가 튀며 눈 아래를 붉게 물들였다.
아직 쓰러지지도 못한 이를 걷어차 쓰러뜨려 버린 회선창귀는 제 얼굴에 묻은 피를 한 손으로 훔쳤다.
물씬 풍기는 피비린내.
이 찝찝하기까지 한 열기.
“큭큭.”
나지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손맛을 제대로 느낄 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저항한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달아나는 이의 등에 창을 꽂는 것도 각별한 맛이 있지만, 이리 저항하는 이의 검을 튕겨 내고 그 가슴에 창을 꽂아 넣는 것은 어떤 것과도 비할 수 없이 커다란 쾌감을 주는 일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로군.’
그의 두 눈에서 흉흉한 빛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사패련을 피해 달아나야 했던 굴욕과 구파일방에 눌려 있던 갑갑함이 이 순간 해방감을 맞이한 것이다.
“아직 부족해.”
두 눈에 살기를 가득 담은 그가 다음 먹잇감을 찾아 눈을 돌렸다.
“아아아악!”
“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개중 아직 틈이 있어 보이는 곳을 향해 흉악한 이를 드러낸 이리가 달려 들어갔다.
파아아앗!
한 사람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고통과 공포로 점철된 눈이 하늘을 잠시 담았다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흐…….”
혈도살은 풍겨 오는 피 냄새에 취한 듯 번들거리는 눈으로 앞을 쏘아보았다.
한 사람의 목이 날아가는 것을 똑똑히 본 이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이래서 정파 놈들이 재미있지.’
사파는 강자에게 함부로 대항하려 들지 않는다. 그게 제 목숨을 앗아 가는 짓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놈들은 다르다. 이놈들은 제 실력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물러서지 않으려는 머리와 당장이라도 달아나려 발버둥을 치는 몸의 의지가 뒤섞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들을 보는 건 퍽 재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달려든 혈도살은 주춤대는 이를 단숨에 베고 채 눈을 감지 못한 이의 목을 쳐 날렸다.
“그래 봐야 명을 재촉할 뿐이지.”
나직이 웃은 그는 제 손에 끼얹어진 뜨뜻한 피를 털었다. 그의 눈에 비열한 쾌감과 짙은 살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 살기에 고무된 이들이 더욱더 흉포하게 서안의 무인들을 공격해 들어갔다.
“미쳐 날뛰는군요.”
“흐음.”
갈천립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머리끝까지 흥분한 이들이 뒤를 생각하지 않고 칼을 휘둘러 대고 있다.
‘긴 밤이 되겠군.’
아마 저들은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도 갈증을 풀지 못할 것이다. 더 많은 피를 보고서야 이성을 되찾을 것이고,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게 되겠지.
사파라 해서 모두가 피에 미친 것은 아니다.
그저 그중 조금 더 과격한 놈들과 조금 더 많은 압박에 시달렸던 이들이 그를 찾아왔을 뿐이다. 갈천립이 한 것이라곤, 그런 놈들이 날뛸 판을 만들어 준 것뿐이다.
‘이쯤 되면 신분을 속이고 다시 들어올 수도 없게 되겠지.’
상단을 턴 이와 상단을 몰살시키고 양민들을 학살한 이들이 같은 취급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마 섬서가 적당히 피해 입기를 바랐던 소림이나 개방도 지금부터 벌어질 참사를 확인하고 나면 새파래질 것이다.
갈천립이 할 일은 오갈 데가 없어진 이들을 모두 끌어모아 단단한 세를 구축하는 것뿐이다.
‘그럼…….’
우드드득.
갈천립의 두 눈에 새파란 살기가 피어났다.
‘그 갈아 마실 놈에게도 한 방 먹일 수 있겠지.’
그의 머릿속에 오만하게 웃는 장일소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과 이십 년 전만 해도 그와 장일소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장일소보다 갈천립의 명성이 더 높았고, 실력도 더 높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갈천립과 장일소의 처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내가 진즉에 세력을 키웠다면 그놈에게 뒤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후회막심이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기회가 온 것이 다행이었다.
‘어찌 보면 그놈이 만들어 준 기회로군.’
사패련이 강남에서 사파들을 복속시키려 들지 않았더라면 강서칠살이 이만한 세력을 규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못해도 수십 년은 걸릴 일이었고, 그 수십 년이 지나기 전에 사패련이 그들을 주목했을 테니까.
하지만 난세에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오는 법.
이 기회만 잘 살릴 수 있다면 단번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을 말 잘 듣는 개로 만드는 데까지야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그 정도야 감수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
갈천립이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슬슬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깨달을 놈이 있을지 모르니, 가서 좀 더 날뛰어 줘라.”
“예, 대형.”
그의 뒤를 지키던 동생들이 살기를 쏟으며 순식간에 뛰쳐나갔다.
갈천립은 혀로 입술을 훑었다. 그의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욕망이 피어올랐다.
“제기랄!”
홍대광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서안의 문파들이 여기저기서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아아아악!”
또 한 사람이 피를 뿌리는 모습을 본 홍대광의 얼굴에 피가 몰렸다.
‘빌어먹을!’
상대가 안 된다.
이곳에 모인 이들 역시 나름의 최선을 다해 수련했겠으나 속가문은 역시나 속가문일 뿐이다. 강남에서부터 악명을 떨쳤던 악적들과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전열이 무너지지 않게 막아아아아!”
“예!”
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개방도들이 이를 악물고 앞쪽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이 개방에서 고수라 불릴 이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개방이다. 어설픈 중소 문파의 제자들과는 비할 수 없이 강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중과부적이야.’
개방 본단의 고수들이라도 와야 이들을 상대하여 승기라도 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끔찍한 것은 사기마저 저쪽이 배는 더 높다는 점이다. 간만에 피를 본 사파 놈들은 한 달은 굶은 짐승처럼 날뛰고 있다. 그 기세에 눌린 이들이 안 그래도 부족한 실력을 제대로 발휘조차 못 해 보고 쓰러져 간다.
홍대광은 초조한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대로는 곧 전멸이다. 저들의 힘은 명성 그 이상이다. 지금부터 최대한 버틴다 해도 이 각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빌어먹을 종남 놈들은 언제 오는 거야!”
이제 희망은 종남파뿐이다. 그의 지시를 받은 이가 종남에 구원을 요청했다. 봉문을 선언한 종남이 그조차 무시할 수도 있지만, 홍대광은 그 가능성 자체를 머리에서 지웠다.
종남이 구원을 오지 않는다면 어차피 여기에 있는 이들은 모두 죽는다. 그리고 이 서안 전체가 피로 물들 것이다. 그런데 뭐 하러 그런 생각을 굳이 한단 말인가.
꽈악!
타구봉을 피가 나도록 움켜잡은 홍대광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그는 이곳에 있어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전황을 파악하고 적절한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홍대광밖에는 없다. 그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야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악!”
전방으로 달려든 개방도들마저도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 가고 있다.
“으…….”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이 개 같은 새끼들아아아아아!”
결국 참지 못한 홍대광이 목이 터져라 고함을 내지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음?”
맹렬한 기운을 실은 그의 타구봉이 개방 거지의 심장에서 창을 뽑던 회선창귀의 머리를 향해 떨어진다.
입가를 비튼 회선창귀가 창을 빙글 휘둘러 내리치는 봉을 막아 냈다.
쿠우우웅!
회선창귀의 머리 바로 앞에서 타구봉과 창이 충돌했다. 홍대광은 팔을 부들부들 떨며 타구봉으로 회선창귀의 창을 내리눌렀다.
“이…… 개자식아!”
“한가락 하는 거지인가?”
투웅!
가볍게 홍대광을 밀친 회선창귀가 자신만만한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창을 잡은 손끝에 묵직한 감각이 남는 것으로 보아, 이놈은 다른 어중이떠중이와는 격이 꽤 다른 모양이었다.
“개방 거지면 내가 누군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용기가 가상하군.”
“멍청한 사파 새끼라 그런지 이해력이 딸리네. 용기가 가상한 건 그쪽이지.”
“음?”
홍대광이 타구봉을 치켜들며 이를 갈아붙였다.
“이런 일을 벌인 이상 너희는 곱게 죽지 못할 거다. 한 놈도 빠짐없이 지옥을 보게 될 테니까.”
“하하. 개방에게 그럴 힘이 있을까? 소림이나 무당도 우릴 쫓아올 여력 따위는 없을 텐데?”
“병신 같은 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뭐?”
“여기는 섬서다. 너희는 화산의 땅에서 화산의 속가를 공격한 거지.”
홍대광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너희는 모른다. 너희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놈들을 건드린 거야.”
“너무 오래 빌어먹어서 머리가 돌아 버리기라도 했나? 소림이나 무당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가 한낱 화산 따위를 두려워한다고?”
“그러니까 네놈이 병신이라는 거지.”
“…….”
회선창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딱히 대단치 않은 도발일 텐데도, 그 어투가 자꾸 거슬렸다.
“이곳에서 싸우는 이들이 두려움을 몰라서 버티는 줄 아나? 그럴 리가! 목숨이 아깝지 않아서 내다 버리는 게 아니다.”
“…….”
“반드시 복수를 해 줄 거라 믿는 거다. 반드시.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네놈들에게 기필코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거라 굳게 믿으니 이곳에 설 수 있는 거다. 그게 화산이라는 문파니까.”
회선창귀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홍대광을 노려보았다.
“허…….”
주위를 둘러보니 황당하게도 홍대광의 말을 들은 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겁에 질린 아이 같은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이들의 눈에 독기가 차오른 것이다.
“그렇지.”
“큭큭. 이 새끼들 화산을 건드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 같은데.”
“알면 못 그러지, 알면.”
회선창귀는 이죽거리는 이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화산이라고?’
소림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남도 아니고…… 화산?
화산이 대체 뭐라고 이들이 이런 반응까지 보인단 말인가?
그 순간 홍대광이 으르렁대듯 말한다.
“어차피 이제 너희에게 살아남는 길은 존재하지 않아. 지금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화산신룡……. 아니, 화산검협이 알게 되는 순간, 너희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지옥을 직면하게 될 테니까.”
회선창귀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홍대광을 바라본다.
“……화산의 그 애송이가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애송이?”
홍대광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놈에게 걸려서 살아남으려면 장일소쯤은 돼야지. 그런데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급은 안 될 것 같은데?”
“……이놈이…….”
밀려드는 모멸감에 얼굴을 굳힌 회선창귀가 차가운 살기를 뿜었다.
“전신에 바람구멍이 뚫리고도 지금처럼 지껄여 댈 수 있는지 보자.”
“해보시든지, 멍청한 새끼야!”
말을 끝내기 무섭게 홍대광이 되레 회선창귀를 향해 달려들었다.
목숨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듯한 모습에, 회선창귀가 이를 악물었다.
“미친 거지 놈이!”
내력 가득 실린 그의 창이 빛살처럼 홍대광의 목을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