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1화. 이곳은 화산의 땅이다. (6)
“흐음.”
활짝 열린 서안의 성문을 본 갈천립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주 멍청한 놈들은 아닌 것 같군.”
“오히려 지독히 멍청한 놈들 아닙니까? 털어 달라고 대문을 열어 놓은 격인데.”
“그럴지도.”
생각은 다르지만, 굳이 이런 일로 입씨름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기세가 더 중요하니까.
“저희가 온 걸 모르는 게 아닙니까?”
“천하에 굴러다니는 거지 놈들의 눈을 모두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당연히 알고 있을 거다. 이 큰 성문에 행인 하나 없는 걸 보면 확실하지.”
그 말에 담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이 큰 성문을 오가는 행인이 없다는 건 확실히 부자연스러웠다. 성문을 지키는 수비병이 보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고.
“어쩌시겠습니까? 함정일지도 모르잖습니까?”
“뻔한 소릴 하는군.”
갈천립이 혀로 느리게 입술을 핥았다.
“함정이든 뭐든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 없지.”
갈천립이 슬쩍 뒤쪽에서 살기를 피워 대는 이들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멈추자는 말을 입에 올리기라도 하면 저 살기가 되레 이쪽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큭큭.”
낮게 웃은 갈천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들이 모두 달려든다고 해도 겁먹을 이유가 없는 강서칠살이지만, 굳이 이 축제를 막아설 이유도 없다.
“뭘 준비했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
갈천립을 필두로 한 사파 무리가 흉흉한 기세로 서안의 성문을 넘어 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히익……!”
“오, 온다.”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었다.
사파인들이라고 생김새가 평범한 이들에 비해 별다를 것은 없다. 하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살기와 흉흉한 기세는 멀리서 그들을 본 이들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미처 달아나지 못했던 이들, 차마 집을 버리고 떠나지 못한 이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대로로 접어든 그들을 바라보았다.
몸에 묻은 피를 지울 생각도 하지 않은 이들이 한눈에 보기에도 섬뜩한 병기를 들고 들어오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차마 숨지도 못하고 얼어붙어 버린 이들을 보며 갈천립이 이를 드러냈다.
“대형.”
“우선은…… 은하상단부터 확인하지.”
저 멀리 달아나는 무리들과 짐마차가 보였다. 그럼 일단 먹잇감부터 확인하는 게 순리일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담해가 바람처럼 몸을 날려 앞쪽에 있는 이 하나의 목덜미를 잡아채어 갈천립의 앞으로 돌아왔다.
“어……. 어어…….”
뭐라 말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린 이를 향해 갈천립이 나직이 물었다.
“은하상단이 어디 있는지 아나?”
사내가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갈천립이 씨익 웃었다.
“안내해라. 그럼 무사히 보내 주지.”
* * *
“……뭐라고 하셨습니까?”
위립산이 땀으로 범벅이 된 홍대광을 보며 되물었다.
홍대광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함을 외면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진실을 알리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화산에 화산파의 제자들이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니, 굳은 낯으로 잠깐 말이 없던 위립산이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문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이리된 이상 차라리…….”
“안 될 말입니다.”
위립산이 고개를 저었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서안의 양민들이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달아날 때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중과부적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화산의 제자에게는 너무 익숙한 말이구려.”
“…….”
“고생하셨습니다, 분타주. 분타주께서라도 어서 몸을 빼십시오.”
홍대광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빌어먹을. 서안이 망하면 이곳 거지들이 다 굶어 죽을 텐데 저희더러 어딜 가란 말입니까! 안 그러냐, 거지들아?”
홍대광이 오기도 전에 몰려와 있던 개방의 거지들이 고함을 내지른다.
“옳소!”
“빌어먹을, 굶어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지. 사람들이 없으면 우린 어차피 굶어 죽는데.”
“끌끌. 거지 구역을 침범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려 줘야지요.”
“구걸하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창피한 건 얻어 처먹고도 고마운 줄 모르는 거지요. 그동안 먹은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위립산이 피식 웃었다.
“거보십시오. 본인들은 달아나지 않을 거면서 왜 저희더러 달아나라 하십니까.”
“……섬서 거지새끼들은 다 제정신이 아니라 그런 겁니다.”
“섬서 거지가 그런 게 아니라. 섬서 사람이 그런 겁니다.”
위립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섬서를 대표하는 이들이 그런 양반들이니 별수 있습니까.”
“……망할 화산 것들.”
홍대광이 짜증 어린 얼굴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저 소림도 무당도 제 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적에게 고개를 숙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명성도 없고 가진 것도 딱히 없는 이들이 악적들을 상대로 목숨을 내던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오냐. 어차피 한 번 살다 갈 목숨, 쪽팔리지 않게 뒈지자! 이 거지새끼들아! 한 놈이라도 더 물고 늘어져라! 그래야 양민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살 수 있다.”
“예!”
홍대광이 막 뭔가를 더 말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말했다.
“옵니다.”
그 짧은 한마디가 모두에게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활짝 열린 대문 너머로 펼쳐진 대로를 통해 한 무리의 무인들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홍대광은 이를 악물었다.
저건 강자의 걸음걸이다. 상대를 적으로조차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독 안에 밀어 넣은 쥐새끼를 잡으러 오는 걸음걸이였다.
‘빌어먹을 사파 놈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얼굴에 피가 몰렸다.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다.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저들과 그들 사이에 얼마나 큰 격차가 존재하는지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는……. 이백? 아니, 삼백인가?’
저 많은 이들 중에 그보다 약해 보이는 이가 없다. 수는 이쪽이 확연히 우월하지만, 그 질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강서칠살.’
선두에서 걸어오는 이들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한 홍대광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곳이군.”
문 앞에 도달한 갈천립이 빙긋 웃었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대문 안으로 보이는 병장기를 든 이들만 보아도 확실하니까.
“여, 여기입니다. 제, 제대로 안내했으니 약속대로 살려 주십…….”
“아아, 걱정하지 말게.”
그 순간 사내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담해의 소도(小刀)가 사내의 등을 파고들었다.
“커억…….”
사내가 두 눈을 부릅떴다. 힘이 바짝 들어간 몸이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켰다.
“어……. 어째서…….”
사내의 눈에 떠오른 원망의 빛을 본 갈천립이 어깨를 으쓱했다.
“약속은 지켰네. 나는 살려 줬지. 하지만 내 동생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군. 형이라곤 하지만 장성한 동생에게 이래라저래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그리고 너무 억울해하지 말게. 지금 이곳에서 편히 죽는 것도 복이니까.”
사내의 몸이 땅에 곤두박질쳤다. 움찔움찔 경련하던 몸뚱이가 이내 축 늘어졌다.
홍대광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쳤다.
“이! 개자식들아! 왜 죄 없는 양민을 죽이는 것이냐! 왜!”
“왜?”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그를 보며 갈천립이 정말로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 이유가 있나?”
“…….”
홍대광은 입도 채 다물지 못하고 그런 갈천립을 응시했다.
“힘이 없으면 죽는 거지. 간단하지 않은가? 이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네가 나를 죽이면 돼. 물론 그럴 능력이 있다면 말이야.”
지독히 담담한 말투에 되레 소름이 돋았다. 멀쩡히 살아 있던 사람 하나를 죽여 놓고도 낫으로 벼를 벤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것 같지 않은가?
“이…….”
그 순간 위립산이 홍대광의 앞으로 나섰다.
말없이 잠시간 갈천립을 노려보던 위립산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대화는 통하지 않겠지만, 한 가지는 알아 두거라.”
“흐음?”
위립산은 은하상단의 정문을 잠시 훑어보았다. 마치 그곳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듯. 그리고 다시 갈천립을 주시했다.
“이곳은 화산의 땅이다.”
“…….”
“화산의 제자는 화산의 땅을 침범하는 악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대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하……. 하핫.”
갈천립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이 벌레 같은 놈이…….”
그리고 동시에 그의 몸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까지 여유로웠던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감히 내 앞에서 주둥아리를 털어 대? 너는 가장 처참하게 죽여 주마.”
어차피 이제 더는 뒤의 놈들을 잡아 둘 수도 없었다. 눈앞에 적을 본 놈들은 신선한 고기를 본 맹수들처럼 독이 올라 있다.
갈천립이 살기 어린 눈으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대신 상단주는 죽이지 마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서칠살의 뒤쪽에 있던 사파인들이 숨 막히는 기세를 폭발적으로 내뿜으며 돌진했다.
커다란 기합 같은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게 더 소름이 돋는 일이다. 맞서 기세를 올릴 틈도 주지 않고 달려든 사파인들이 선두에 선 이들에게 순식간에 칼을 박아 넣었다.
“아아아아악!”
“아악!”
끔찍한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뭔가 해 볼 틈도 없이 제자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에, 남자명이 두 눈을 부릅뜨며 일갈했다.
“이 하찮은 놈들이!”
그 순간에도 회선창귀의 창은 막아서는 이들의 검을 꿰뚫고 사람의 몸에 틀어박혔다. 혈도살의 칼 역시 날아드는 검을 갈대처럼 잘라 버리고 단숨에 목을 쳤다.
사방에서 피가 솟구치고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잘려 나간 목이 하늘로 치솟는다.
실로 일방적인 광경이었다. 삽시간에 전장은 공포에 휩싸였다.
“빌어먹을! 응전해라, 거지새끼들아!”
“예!”
“화영문도들은 물러서지 마라!”
“충!”
일순간 얼어붙어 버린 이들을 돕기 위해 개방과 화영문이 기세를 끌어 올렸지만, 한번 압도된 기세를 되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니, 그 이전에 실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의기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목숨을 걸고 이곳에 선 이들이 아닌가? 상대가 사파가 아니라 저 사패련이라고 해도 이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의기만으로 이 실력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흐, 흐읍!”
얼굴을 향해 빛살처럼 날아드는 검을 보며 화영문도가 두 눈을 부릅떴다.
‘주, 죽…….’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직감한 그 순간, 뒤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이 날아드는 칼을 튕겨 냈다.
“괜찮으냐?”
“무, 문주님?”
위립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칼을 쳐낸 그의 손목이 부러질 듯 아파 왔다. 고작 일 수를 교환했을 뿐인데 실력의 고하를 가늠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없는 사파인조차 그보다 강한 것이다.
하지만 위립산은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상대를 쓰러뜨리려고 하지 마라!”
칼을 또 한 번 막아 내는 그의 목에서 커다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악착같이 버텨 내라!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 흉흉한 눈빛들을 보고 있으면 알 수밖에 없다. 이들의 칼은 결코 그들의 피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린다.’
저 뒤에 황종의가 있다.
그가 생각이 없어 이곳에 버티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도 짐작했으리라. 은하상단이 달아나 버리면 분노한 이들의 칼이 누구를 노릴 것인지.
상인조차 양민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데 화산제일속가 문주인 그가 목숨을 아까워해서야 되겠는가?
물론 그의 목숨은 더없이 귀하다. 그리고 그를 믿고 따라 준 제자들의 목숨은 더욱더 귀하다.
하지만, 무인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린 오늘 여기서 죽는다! 섬서의 무인들은 협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음을 증명하라!”
악에 받친 함성과 함께 전장이 더욱더 지독한 열기로 가열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