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9화. 이곳은 화산의 땅이다. (4)
“……지금 뭐라 하셨소?”
“사파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이곳으로!”
한 번쯤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을 만한 소리였다. 하지만 전력을 다해 달려왔는지 전신이 땀으로 젖은 개방도를 보고 있자니 차마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지금 당장 서안의 문파들을 규합하여 대비를 해야 합니다! 방도들이 서안 주변에 있는 문파들에도 연통을 돌리고 있으니 곧 지원이 올 것입니다.”
“서안 주변이라니…….”
그 주변에 도움이 될 만한 문파가 어디 있냐는 물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화영문주 위립산은 그 말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들을 도우려 애쓰는 개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하나 묻겠소이다. 적의 전력은?”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막강합니다.”
“과거 서안으로 쳐들어왔던 만인방에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만인방 전체라면 모를까 만인방의 적사대와는 비교할 정도가 아닙니다.”
“……그렇구려.”
위립산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서안의 문파들은 그 적사대 하나가 무서워 서안을 버리고 달아났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과거와 다를 게 없다. 아니, 몇 배는 더 절망적이다.
“소림과 개방에서 지원을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알겠소이다.”
위립산이 가타부타 없이 몸을 일으켰다.
개방도가 두 눈에 이채를 띠고 위립산을 바라보았다. 보통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하나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안달복달하기 마련이다. 그래야 달아날지 맞서 싸울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위립산은 이미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았다는 듯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되레 이상하게 여긴 개방도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말이오?”
“이걸로 충분하신지……?”
질문을 하는 자도 본인이 정확히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모호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위립산은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소이다.”
“…….”
“문파가 한 지역에 자리를 잡는다는 건 그곳의 생사고락을 함께한다는 뜻. 서안 사람들이 모두 달아난 뒤가 아니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오.”
개방도의 눈이 살짝 떨렸다.
“화산의 제자는 물러서지 않는 법이지. 내 서안의 문파들을 규합하여 최대한 막아 볼 터이니, 귀하께서는 지원을 서둘러 주시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위립산이 걸음을 내딛기 무섭게 소리쳤다.
“소행!”
“예, 아버님!”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위소행이 재빨리 대답하며 문을 열었다. 어리디어렸던 아이가 그사이 꽤 많이 자랐다.
“제자들을 보내 서안 모든 문파의 장문들을 소집하라. 긴급이다!”
“예!”
“그리고 남은 제자들을 보내 서안에 있는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아라.”
“예!”
“서둘러라!”
위소행이 대답도 없이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개방도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화영문주 위립산.’
그가 알기로 위립산은 모두가 화산을 버릴 때, 홀로 화산을 부여잡고 있었던 덕에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운 좋은 남자다.
덕분에 화영문은 지금 서안을 대표하는 문파가 되어 있지만, 정작 문주 위립산은 딱히 대단하다고 할 수 없는 평범한 무인에 불과하다는 게 개방의 평이었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가? 아니면 개방이 저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인가?’
사람의 진가는 위기에 드러난다고 하더니, 지금 위립산이 보여 주는 모습은 그간 개방이 해 왔던 평가를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보오. 걸개.”
“……예? 아……. 예, 문주님!”
“혹여…….”
지금껏 망설임 없이 시원시원히 말하던 위립산이 처음으로 살짝 주저하는 기색으로 조심스레 입을 뗐다.
“혹…… 화산에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소?”
개방도가 살짝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본디 어떤 상황이건 봉문 한 문파를 찾아가는 것은 강호의 법도에 어긋나나…….”
그러다 이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상황이 이리 급박하니 분타주께서 분명 말을 전하러 가셨을 겁니다.”
위립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조금만 버티면 되겠구려.”
“문전박대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일은 없소.”
위립산은 한 점 의심도 없는 얼굴로 빙긋 웃었다.
“반드시 와 줄 것이오. 화산이라면.”
그들은 그런 이들이니까.
* * *
“사파라…….”
황종의의 얼굴에 짙은 수심이 어렸다.
짧은 순간에도 수많은 생각을 한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으로 온단 말이오?”
“예. 저희 생각으로는 서안에 도달한 그들이 가장 먼저 노릴 곳은 아무래도…….”
“이곳이겠지.”
황종의는 탄식했다.
지금의 은하상단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곳이 됐다. 최근 들어 세상이 어지러워지니 사업 역시 조금 어려워지기는 했지만, 그렇다 한들 최근 몇 년간 그들이 쌓아 올린 부가 어디에 가지는 않는다. 명실상부 서안제일상단이자 천하십대상단의 위치를 확고히 한 지 오래다.
그런 먹음직스러운 곳을 악적들이 내버려 둘 리가 없다.
“우선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
황종의가 가타부타 말이 없자 개방도가 입술을 깨물며 재촉했다.
“지금 오는 이들은 위험합니다. 단순히 사파라 이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미친 짐승들입니다.”
“…….”
“상단주께서도 과거 저 만인방의 적사대가 서안을 침범했던 사실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렇소.”
“그때와는 다릅니다. 그때 적사대는 양민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이미 두 개의 촌락을 몰살했습니다. 여기에 남아 계시면 절대 살아남으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서…….”
“그럴 수는 없소이다, 걸개.”
하지만 황종의는 고개를 내저었다.
“예? 그, 그렇지만…….”
“알고 있소. 하나 내가 달아날 수는 없소. 상인은 상단을 버리지 않소이다.”
“……상단주님.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실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안일하지 않기에 이리 말하는 것이외다.”
“…….”
황종의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상단의 창고에는 수많은 물품이 있소이다. 그것들을 빼앗긴다면 상단은 무너지오.”
“물품을 가지고 달아나시면 되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상단원들이 상행을 나간 터라 물건을 옮길 만한 이들이 딱히 없소이다. 그리고…… 재물을 노리고 쳐들어온 악적들이 창고가 비었다고 돌아가겠소? 지옥 끝까지 쫓아와 뺏으려 들겠지. 그건 상단원들마저 죽게 만드는 짓이오.”
“……이미 벌어 둔 돈이 있잖습니까? 귀한 물건들만 우선 옮기면…….”
황종의가 빙긋 웃는다.
“벌어 둔 돈을 금고에 쌓아 두는 상단은 망해야 하는 곳이지요. 손쉽게 들고 가도 되는 귀중품 같은 건 이곳에 없소이다.”
“…….”
“그리고.”
황종의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상단이란 홀로 벌어먹는 곳이 아니오. 우리를 믿고 거래해 주는 수많은 곳이 있소. 창고의 물건들을 빼앗기면 그들 역시 모두 망하오.”
“……그게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잖습니까?”
“돌아가신 선친께서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소이다. 상인에게 신용이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오. 선친께서는 언제나 그 말씀을 지키셨소. 그런데 내가 목숨이 아까워 믿음을 저버리고 달아난다면 죽어 선친을 어찌 뵙겠소?”
황종의가 고개를 내젓는다.
“그리고 이곳의 물품들은 대부분 나의 재산이 아니오. 나를 믿어 준 친우들의 것이지.”
“…….”
“그들이라면 돈 따위는 아무래도 좋으니 몸이나 빼라고 하겠지만……. 하하. 지금 그들이 자리에 없으니 내 뜻대로 해도 되지 않겠소?”
“상단주님…….”
황종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지금 앞에 있는 이가 재물에 초탈한 개방도가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타인에게 맡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구구절절 설명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큰 신뢰가 있어야 하는 일인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화산은 그들의 모든 재산을 황종의에게 맡기고 봉문에 들었다. 그런데 그 재산을 모조리 잃고 봉문을 풀고 나온 이들을 맞이한다?
아무리 그가 뻔뻔함 없이는 살 수 없는 상인이라지만, 낯짝이 그렇게까지 두껍지는 않았다.
“최대한 많은 이들을 대피시키겠소. 하지만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소.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상단의 쌀 한 톨에도 손대지 못할 것이오. 그게 은하상단의 상단주로서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니, 더는 말하지 마시오.”
개방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강경하게 말하는 이에게 더 이상 무슨 소릴 하겠는가?
“……화영문주께서 서안의 문파들을 규합하여 도우실 겁니다.”
“문주께서?”
“예. 악적들이 쳐들어온다는 말씀을 듣더니 고민조차 하지 않으시고 싸우겠다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종의가 나직이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개방도가 의아해하며 묻자 황종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오.”
“어떤…….”
“참 한결같구나 싶소. 아마 보고 배운 것이 그래서겠지.”
개방도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황종의는 굳이 풀어 설명해 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화산의 친우들이겠지.’
입으로는 위험하면 내빼라고 말하면서 위험할 때마다 가장 앞으로 달려 나가는 이를 너무 오래 지켜봐 버린 모양이다. 그조차도 달아날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황종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애꿎은 상단원들이 죽지 않도록 대피시키고, 호위들과 함께 이곳을 지키는 것이다.
“저들이 이곳을 쉽게 보는 모양인데, 섬서인들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려 줘야겠지.”
“……상단주님.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지 저는…….”
“이해하오.”
“……예?”
황종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리 생각할 때가 많았으니까. 저 똑똑한 이들이 왜 저렇게 미련스럽게 굴까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소.”
“…….”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소이다. 내가 여전히 소단주였다면 아버님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시라고 했을 거요. 하지만 나는 이제 상단주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이는 이득만을 따져서는 안 되는 법이지.”
그의 아버지가 그랬고, 화산이 그랬듯이.
그러니, 이제는 그가 얼마나 미련할 수 있는지 증명할 시간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아무 생각 없이 무모하게 구는 게 아니니까. 그들은 반드시 올 것이오.”
“……화산 말입니까?”
“그렇소.”
황종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화산은…….”
“소식만 전해진다면 그들이 오지 않을 리가 없소. 그저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오.”
“……알겠습니다.”
하지만 위립산도, 황종의도, 그리고 양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바삐 뛰고 있는 개방도들까지도…… 누구 하나 예상하지 못했다.
있는 힘을 다해 화산에 오른 홍대광이 상상도 하지 못한 사태에 직면해 있으리라고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