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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68화 (864/1,567)

868화. 이곳은 화산의 땅이다. (3)

“이 개 같은 놈들아!”

우렁우렁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삼문협(三门峡)에 위치한 중소 문파 벽호문(壁虎門)의 장문인, 벽력노호(霹靂怒虎) 조명산(曺名産)은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서범촌(西凡村)으로 악적들이 몰려와 양민들을 도륙하고 있다는 소식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참이다. 불타는 마을과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양민들의 모습을 본 순간 그의 가슴에도 겁화와 같은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힘없는 양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조명산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벌일 수가 있느냐!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벽호문은 삼문협에 위치한 작은 문파고, 지금껏 단 한 번도 평범한 이들에게 해악을 끼쳐 본 적이 없는 곳이다. 무학을 익히는 이유는 오직 자신들보다 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돌보기 위한 것이라 믿는 이들.

그런 그들의 눈에 참혹하게 죽어 간 양민들의 모습은 더없는 충격이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벽력노호의 고함이 울리니 초토화된 마을을 유유히 떠나던 이들이 이리 같은 눈으로 벽호문의 문도들을 돌아보았다.

의복 곳곳에 피가 튄 그들의 모습은 분기탱천한 벽호문의 문도들조차 순간적으로 흠칫하게 만들었다.

“……저건 또 뭐야?”

“큭큭. 대단한 협사 나셨군.”

비웃음을 흘리고 있지만, 그들의 눈빛은 웃음기 하나 없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섬뜩하다’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도무지 정파 놈들 생각은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긴 창을 쥔 회선창귀가 피식 웃으며 벽호문의 문도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냥 못 본 척 도망갔으면 제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와서 떼를 쓰는 걸까? 지들 목에는 칼이 안 박힌다고 생각하나?”

“그러니 정파겠지.”

“멍청한 새끼들이.”

다른 이들도 천천히 걸음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찾아온 손님이니 대접은 해 드려야겠지.”

딱히 강서칠살이 분위기를 잡지 않았음에도 사파인들은 먼저 나서서 이를 드러내며 벽호문을 옥죄기 시작했다.

“무, 문주님.”

“이…….”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사파인들을 보며 벽력노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관홍!”

“예!”

“삼대제자들을 이끌고 지금 당장 서안으로 가라! 서안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예!”

“남은 일대제자와 이대제자들은 나와 함께 이들을 막는다!”

“……알겠습니다!”

벽호문도들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들의 실력으로는 절대로 이들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저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벌써부터 손끝이 저릿저릿하고 오금이 저려 온다. 저런 괴물들을 삼문협의 작은 문파가 무슨 수로 감당하겠는가?

그럼에도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가 달아난다면 모두가 죽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곳에 남아 달아나는 제자들의 방패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저 안에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살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양민들을 두고 달아난다면 평생을 외쳐 온 협이라는 글자가 부끄럽지 않겠느냐!”

“예!”

“무사는 어떻게 죽느냐로 자신을 증명하는 법이다! 모두 이를 악물어라!”

벽력노호의 고함에 문도들의 두 눈에서 두려움이 사라진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본 회선창귀는 그저 끌끌 웃을 뿐이었다.

“어떻게 죽느냐로 자신을 증명한다고?”

그그극.

창끝으로 바닥을 긁어 댄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너희는 모조리 개새끼겠군.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테니까!”

그는 간만에 본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남에게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단번에 벽호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막아라!”

“악적들을 물리쳐라!”

회선창귀를 시작으로 다른 사파인들이 일제히 낄낄 웃어 대며 달려들었다.

벽력노호는 있는 대로 내공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잠시라도!’

이기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끄는 것. 달아난 제자들이 살아날 시간을 벌고, 이 악적들이 다음 마을에 당도하는 것을 한 시라도 늦추는 것이었다.

‘반드시 구파일방이 도우러 올 것이다! 반드시!’

각오를 다진 벽력노호는 진각을 내리밟으며, 날아드는 회선창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벽호문의 독문무공인 노호십팔벽(怒虎十八壁)이 벽력노호의 생을 통틀어도 다시없을 만큼 완벽하게 펼쳐졌다. 강렬한 붉은색 권기를 머금은 그의 두 주먹이 범의 앞발처럼 휘둘러졌다.

하나…….

“느려, 늙은이.”

콰드드득!

섬전처럼 뻗어진 회선창귀의 창이 벽력노호의 오른쪽 주먹을 너무도 쉽게 꿰뚫어 버렸다.

콰득! 콰득! 콰득!

연이어 팔뚝과 팔꿈치, 어깨에 아이 주먹만 한 구멍을 뚫어 버린 회선창귀의 창이 단숨에 벽력노호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끄으…….”

단 일 초.

그 드높았던 협의가 무색할 만큼 순식간에 당해 버린 벽력노호를 향해 회선창귀가 조롱의 웃음을 흘렸다.

“저런, 주둥이 놀릴 시간에 수련을 했으면 잠깐은 더 버텼을 텐데.”

회선창귀가 벽력노호의 가슴에 박힌 창을 가차없이 뽑아내려던 순간이었다.

“쿨럭…….”

벽력노호 조명산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에 틀어박힌 창을 콱 움켜잡았다.

“음?”

그건 회선창귀를 어찌 해 보겠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조명산은 그 창을 되레 제 가슴으로 더욱 밀어 넣었다. 그리고 가슴 근육을 힘껏 조이며 양손으로 창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내어 주지 않겠다는 듯이.

이 창을 다시 뽑아 휘두르는 것을 찰나만큼이라도 더 늦추겠다는 듯 말이다.

“……이 늙은이가?”

붉은 피를 입으로 울컥울컥 쏟으며 조명산은 어떻게든 웃음을 지으려 했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게 될 리가 없음에도.

“야, 양민들……에겐…… 손을 대지…….”

파아아아앗!

그 순간 단숨에 휘둘러진 회선창귀의 창이 조명산의 몸을 반으로 토막 내고 그의 머리 위로 빠져나왔다.

털썩.

“멍청한 늙은이 같으니. 끝까지 주제도 모르고.”

손끝으로 떨어진 핏방울을 털어 낸 회선창귀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벽호문을 덮친 이들이 일방적으로 도륙을 해 대고 있었다.

제 몫을 찾던 회선창귀는 짜증스레 혀를 차 댔다. 이런 피라미들을 상대로는 제대로 창을 휘둘러 볼 수도 없다.

“미적지근하군.”

피가 달아오르다 만 느낌이었다.

‘……서안에는 좀 더 상대할 만한 놈들이 있겠지.’

회선창귀는 치미는 살심을 내리누르는 동안,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일소일살 담해가 갈천립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대형?”

“뭐가?”

“정파 놈들은 모조리 위선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 구파일방 놈들도 사패련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구파일방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놈들이 그래도 제 주둥이로 지껄인 말은 지키며 죽지 않았습니까? 이런 놈들이 중소 문파라는 게 참 웃겨서 그럽니다.”

“거꾸로다.”

“예?”

갈천립이 피식 웃는다.

“그렇기에 중소 문파인 것이지. 이득이 되는 일에 눈을 돌리지 않고, 득을 볼 수 있는 일을 마다하니 문파가 무슨 수로 커지겠느냐?”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요.”

“커 가는 문파는 이익에 민감해야 하는 법이지. 협의니 뭐니 하는 말을 진심으로 믿는 문파는 저 모양 저 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대단하지 않습니까?”

“대단하지. 저들은 분명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적어도 네가 아는 그 위선자 놈들처럼 한입으로 두말하는 건 아니니까. 다만…….”

갈천립의 시선이 비명을 지르며 처참히 죽어 가는 벽호문도들에게로 향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과는 달리, 그의 시선엔 일말의 존중마저 엿보이지 않았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지. 의미도 없는 일에 제 목숨을 던지니. 짐승도 위협을 느끼면 피하는데…… 저건 짐승만도 못한 것 아니겠느냐?”

“쿡쿡. 그렇습니다, 대형.”

갈천립은 슬슬 마무리되는 살육의 현장에서 시선을 뗐다.

저들에게 벽호문은 소일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목이 타 죽어 가는 이의 목에 겨우 한 방울의 수분을 흘려 넣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 애를 태웠다가는 주인을 물겠다고 달려들 수도 있겠군.’

갈천립이 서쪽을 향해 턱짓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군. 슬슬 다들 독이 오른 것 같은데, 이제는 서안으로 곧장 향해도 괜찮겠지.”

“예, 대형. 그렇게 하겠습니다.”

갈천립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완벽해.’

준비는 이제 끝났다.

* * *

“분타주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거지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무슨 일이냐?”

“마을이 불탔습니다.”

“……뭐?”

“사파 놈들이 서관촌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마을에 불을 질렀습니다.”

우득.

홍대광의 손에 들려 있던 붓이 부러져 나갔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홍대광이 핏발이 선 눈으로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서관촌?”

“예.”

“그것뿐이냐?”

“……서관촌을 몰살하고 서범촌(西凡村)으로 이동했다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벽호문에서 막기 위해 서범촌으로 향했다고는 합니다만…….”

“……벽력노호인가.”

홍대광이 참담한 얼굴로 눈을 딱 감았다.

어리석은 짓이다. 벽호문 정도로 그들을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마주치는 순간 한 사람이라도 살 수 있다면 다행일 정도로 전력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양민들의 비명을 듣고 제 목숨을 내던지며 달려간 이들을 어찌 어리석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이름을 기억해라.”

“예!”

“지원은? 지원 요청은 어떻게 되었느냐?”

“천리비응(千里飛鷹)에 매달아 보냈으니 지금쯤 답신이 올 때가 되었습니다.”

“빌어먹을, 너무 늦어!”

홍대광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전서구가 이곳에 도달하기 전에 연락을 받은 그들이 먼저 움직였어야 할 텐데.’

생각대로라면, 지금쯤은 다들 이 섬서를 향해 발에 불이 나게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부디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그들이 도달해야…….

“분타주! 분타주! 답신이 왔습니다!”

“어디냐?”

“본문입니다!”

“빨리 가지고 와라! 이리로!”

홍대광이 거지가 가져온 적첩을 낚아채 뜯고는 단숨에 펼쳐 들었다.

이내 그의 두 눈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이…….”

“분타주! 소림에서도 답신이 왔습니다!”

“……열어 봐.”

“예? 하지만 제 권한으로는…….”

“알았으니 열어서 읽어 보라고, 이 새끼야!”

홍대광의 입에서 터져 나온 살기 넘치는 고함에 화들짝 놀란 거지가 그 자리에서 봉투를 뜯었다.

서찰을 펼쳐 낸 거지는 그 안에 적힌 글귀를 보고 움찔하여 홍대광을 바라보았다.

“……읽어 봐.”

“그…….”

“읽어 보라고!”

거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망연함 어린 두 눈이 흔들렸다.

“……지원……불가.”

“하핫…….”

홍대광이 피식 웃더니 제 손에 들린 서찰을 책상 위로 흘리듯이 내려놓았다.

그의 손을 빠져나온 종이에는 지원난망(支援難望)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지원이 어렵다고?”

콰아아아아앙!

홍대광이 단숨에 책상을 내려쳐 산산조각을 내 버린다.

“이 개 같은 새끼들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 수백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지원이 어렵다고? 이……. 이러고도 너희가…… 이…… 이 개 같은 놈들아아아아아!”

홍대광의 입에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욕설들이 터져 나왔다.

그 대상은 개방의 본단이고, 천하북두인 소림이다. 개방의 일개 분타주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지만, 이곳의 그 누구도 그런 홍대광을 탓하지 못했다.

“분타주……. 이제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떻게 해?”

“본단에서는 저희라도 철수하라고…….”

순간 홍대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퍼억!

바닥에 떨어진 벼루를 걷어차 입을 연 거지에게 날려 버린 그가 이를 갈아붙였다.

“이 새끼야. 우리가 구걸도 제대로 못 하는 병신 같은 거지새끼임에도 굶어 뒈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건, 이 동네 사람들이 우릴 믿고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험하니까 제일 먼저 발을 빼자고? 네가 그러고도 오의지문(汚衣之門)의 거지냐!”

“하, 하지만…… 이건 본단의 명령…….”

“그 늙어서 노망난 미친 거지새끼들 말 같은 건 무시해! 빌어처먹을!”

홍대광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역정을 내다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너희는 지금 당장 저 새끼들의 이동 경로에 있는 촌락들로 달려가서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켜라.”

“그, 그게 가능한 일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어떻게든! 서안 사람들도 지금 당장 대피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움직여!”

“예!”

거지들이 달려 나가자 홍대광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찢긴 그의 입술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러고도…….”

핏기가 가시도록 주먹을 움켜쥐고 덜덜 떨어 대던 홍대광은 이를 악물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핏발 선 시선이 구름에 가려진 화산으로 향했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그가 드높은 화산으로 향하는 등산로로 단숨에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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