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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67화 (915/1,567)

867화. 이곳은 화산의 땅이다. (2)

“끄응. 쉴 틈이 없네.”

홍대광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숨 쉬듯이 사고를 쳐 대는 화산신룡이 봉문 했으니, 사는 게 조금은 편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정말이지 크나큰 착각이었다.

중앙에서 몰아치는 거대한 폭풍이 사라지니, 여기저기서 자잘한 돌풍이 자꾸 불어온다. 하나하나는 별것 없지만, 그 모든 것을 감당하려니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할 듯했다.

홍대광이 슬쩍 주위를 살피며 두리번거렸다.

‘없지?’

당연히 지금 이곳에는 그 외에는 아무도 없다. 다 무너져 가는 전각이지만, 어쨌든 이곳은 분타주의 집무실이니까.

그럼에도 뭔가 찔리는 모양새로 연신 좌우를 살핀 그는 곧 쓰러질 듯한 책상 아래에서 호리병 하나를 슬쩍 꺼내 들었다.

뽀옥.

마개를 따고 호리병에 코를 박은 채 킁킁대었다.

“크으……. 죽인다.”

워낙 바쁘다 보니 느긋하게 술 한잔할 시간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술 냄새를 맡아 본 게 대체 언제야?’

못해도 한 달은 된 것 같았다. 밑에 있는 새끼 거지 놈들이 하나같이 눈이 벌게져 있다 보니, 시간을 쪼개 술을 먹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그렇다고 일하는 중에 술 먹겠다는 소리를 할 수도 없고.

그러니 이럴 때라도…….

홍대광이 군침을 질질 흘리며 막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대려던 바로 그때였다.

쾅!

“으아아아악!”

문이 부서질 듯 격하게 열리는 소리에 놀란 홍대광이 술병을 머리 위로 냅다 집어 던졌다.

“분타주님!”

안으로 정신없이 뛰어 들어온 거지가 홍대광의 머리를 타고 줄줄 흐르는 술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니, 무슨…….”

“……그, 그게…….”

알 만하다는 듯 홍대광의 꼴을 흐린 눈으로 보던 거지가 이내 움찔하더니 후다닥 다가왔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화 안 내냐?”

분명 자기들 눈을 속이고 업무 중에 술을 먹으려 했냐고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본단에서 적첩이 날아왔습니다!”

“뭐? 본단에서?”

홍대광의 소소한 우려는 순식간에 날아갔다.

적첩이면 본단에서 특급 전서응에 매달아 날리는 비상 연락이다. 최근 몇 년간 하남과 호북, 그리고 섬서에서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음에도 적첩이 날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지금 도착한 거냐?!”

“예, 분타주님! 방금 막!”

뭔가 커다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홍대광은 책상 위로 날 듯 몸을 던져 새끼 거지가 들고 있는 붉은 서찰을 뺏어 들었다.

단숨에 봉인을 뜯어낸 후 그 안의 내용을 읽었다.

“……이…… 이거?”

홍대광은 말까지 더듬으며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철귀? 회산창귀? 구유검객? 무비문(無悲門)에 척살방(刺殺房)? 구…… 구유당(九幽黨)이라고? 자, 잠깐? 누구? 단혼혈수? 이, 이 빌어처먹을! 단혼혈수?”

심지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가, 가, 강…… 강서칠살?!”

홍대광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하나하나가 쟁쟁하다 못해 두려운 이름들이다. 그런데 이만한 이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서 이동하고 있다고?

“어디? 대체 어디로?”

이 적첩에는 이들의 이동 방향은 나와 있지 않았다.

사색이 된 홍대광이 막 무어라 고함을 내지르려는 순간, 또 한 명의 거지가 안으로 박차고 들어왔다.

“부, 분타주! 적첩입니다! 적첩이 또 왔습니다!”

“이리 가져와, 당장!”

홍대광은 새로 온 적첩을 빼앗아 들고는 거의 찢듯 열어젖혔다.

“어으…….”

그 안에 쓰여 있는 아주 간명한 글귀를 보는 순간, 그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말았다.

- 向去陕西(섬서로 가다).

“……서, 섬서?”

“서, 섬서로 온다고요?”

“왜?”

새끼 거지들의 안색도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 이런 미친…….”

적첩을 쥔 홍대광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 하나하나의 이름은 모두 들어 봤다. 그들이 저 극악무도한 사패련을 피해서 강북으로 이주했다는 것 역시 정보를 다루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을 모아 놓고 나열하는 순간, 홍대광은 자신이 이 이름들을 얼마나 안일하게 대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강북이라는 드넓은 곳에 흩뿌려 놓는다면 적은 수다. 그 하나하나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큰 힘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들이 한곳에 모인다면?

‘문파 하나 정도는 일시에 무너뜨리고도 남는다.’

사파 특유의 폭급한 성정을 감안하면, 피해는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이, 이 빌어먹을 이 미친놈들이 왜 섬서로 오고 지랄이야!”

악을 쓰듯 고함을 내지른 홍대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의 의도는 아직 밝혀진 게 없지만, 상황을 보면 세 살짜리 아이라고 해도 그들의 목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원? 지원은 어떻게 됐느냐? 당장 본단에 지원을 요청해라!”

“부, 분타주. 본단에는 여력이…….”

“뭔 개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이게 보통 상황으로 보이냐? 다른 일 다 제쳐 두고 이리로 달려와야 할 것 아냐! 당장 지원 요청해! 당장!”

“예!”

홍대광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사색이 된 거지 하나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순간에도 홍대광의 머리는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어디지? 어디를 노리는 거지? 섬서 전체는 아닐 테고!’

홍대광의 뭉툭한 손끝이 갈 곳을 모르고 어지러이 책상 위를 누볐다.

“이 빌어먹을 뭘 알 수가…….”

그때 밖으로 뛰쳐나갔던 거지가 나갈 때보다 배는 더 희게 질린 얼굴로 다시 박차고 들어왔다.

“부, 분타주! 적첩이 또 왔습니다.”

“뭐?”

홍대광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하루에 세 장의 적첩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 했다.

“가, 가져와 봐!”

홍대광이 서둘러 받아 든 적첩을 뜯었다.

“…….”

이번엔 지금까지와 같은 서찰이 아니었다.

지도.

중원의 모습이 간략하게 그려진 작은 지도에 선명한 붉은 직선이 그어져 있다.

낙양에서 시작한 불길한 선은 서쪽으로 번져 나갔다. 눈으로 따라가다 보니 선이 중간에 뚝 끊겼지만, 홍대광의 시선은 그 선이 향하던 왼쪽으로, 또 왼쪽으로 이동했다.

마침내 그 끝에 놓인 한 도시의 이름을 보는 순간 홍대광의 입에서 어찌할 수 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서안.”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어쩌면 이 소식은 당연하다.

저들이 노리는 것이야 너무 뻔하니까. 저만한 인원이 모여 섬서로 산보를 나오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그들의 목적이 재물이든, 난동이든, 처음으로 노릴 것은 섬서 최대의 도시인 서안일 수밖에 없다.

“아, 안 돼.”

종남과 화산이 둘 다 건재했다면 감히 사파들이 서안에 침범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서안은 남과 동으로 종남과 화산을 둔 도시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두 문파가 모두 봉문 한 상황. 다시 말하자면 지금의 섬서는 제대로 된 대문파가 존재하지 않는 무주공산이라는 소리다.

그런 와중에 저들이 서안을 침략해 살육을 벌인다면?

“왜! 왜 이 미친놈들아! 왜!”

홍대광의 입에서 온갖 욕설이 터져 나왔다.

“부, 분타주님! 어떻게 합니까?”

“…….”

주먹을 움켜쥔 채 허공을 노려보던 홍대광이 이를 갈고는 말했다.

“본단에 지원을 요청해라! 그리고 소림에도 지금 당장 지원을 요청해! 당장!”

“본단을 통하지 않고 말입니까?”

“그럴 시간 없다! 본단에 요청하는 동시에 소림에도 곧장 전갈을 보내라!”

“예!”

“아소(兒昭)!”

“예!”

“당장 종남으로 달려가! 종남 놈들더러 봉문을 풀고 나오라고 해라! 어서!”

“보, 봉문 한 곳인데……!”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야! 가서 문을 두드려!”

“예!”

“오명(吳明)!”

“예!”

“지금 당장 서안의 화영문으로 가라! 상황을 알리고 서안의 문파들을 규합하라고 해! 이놈들은 전에 서안을 침공했던 만인방과는 다른 놈들이야! 단 한 놈도 서안으로 발을 들이게 해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너는 지금 당장 서안 주변의 문파들에게 전서를 띄워라! 다들 서안으로 가라고 해! 서안의 문파들을 지원해야 한다!”

“예!”

“움직여! 지금 당장!”

“예!”

홍대광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서 발로 뛰어다니고 싶지만, 그는 이곳에서 본단과 연락을 해야 한다. 화산과 종남이 없다면 서안 주변의 문파들로는 절대 저들을 막을 수 없을 테니, 소림이나 개방의 지원이 절실하다.

‘제발, 제발!’

사실은 이미 늦었다.

낙양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불과 오백 리, 절정의 무인이라면 반나절에 충분히 주파하고도 남는 거리다. 지금 당장 소림이 출발한다고 해도 저들보다 먼저 서안에 당도할 수는 없다.

그렇다는 건, 지금 있는 전력만으로 저들을 막아 내며 소림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발 조금이라도 빨리!’

홍대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을 벌컥 열고 나가 고개가 꺾어지도록 위로 쳐드니 화산이 눈에 들어왔다. 봉우리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잠시간 아프도록 그 광경을 보던 그는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시 바쁘게 몸을 돌렸다.

* * *

시뻘건 화마가 주위의 모든 것을 휩쓸고 있다.

한 마을이 통째로 불타오르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제아무리 앞뒤를 가리지 않는 이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붉은 화마가 뿜어낸 시커먼 연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올라 퍼져 나가는 광경은 마치 지옥의 광경을 현세로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검은 연기, 붉은 화염.

그리고…….

그 불꽃보다 훨씬 더 짙고 붉은 피가 땅을 흠뻑 적신다.

“끄으…….”

피 웅덩이 위에 엎어져 경련하던 이가 덜덜 떨리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처…… 천벌을……. 천벌을 받을…….”

“쯧쯧.”

원독에 찬 눈으로 노려봐 오는 노인을 보며 갈천립이 피식 웃었다.

“천벌은 이미 받았어, 영감. 그러니 이런 곳에 있는 거겠지.”

“……화, 화산이 너희를…….”

푸욱.

갈천립의 도가 노인의 몸을 꿰뚫고 땅에 콱 박혔다.

부르르 경련하던 노인은 그대로 절명하여 축 늘어졌다. 도를 뽑아낸 갈천립은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동네 놈들은 아주 화산이 입버릇이군. 이놈이고 저놈이고 화산, 화산.”

괴이한 것은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종남이 아니라 화산이라는 점이다.

‘참으로 기이해.’

아무리 화산의 명성이 드높아졌다고는 하나, 섬서는 종남이 지배하는 땅이나 다름없을 텐데. 왜 이들의 입에선 하나같이 종남이 아닌 화산의 이름이 나오는 것일까?

“뭐 아무래도 좋아.”

갈천립이 고개를 들어 불타고 있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진득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사파 놈들도 두 눈에 똑똑히 담았다.

그들의 손을 적신 피를 본 순간 갈천립의 입가에 어찌할 수 없는 웃음이 환히 걸렸다.

‘슬슬 위험해지는군.’

그는 혀로 느리게 입술을 핥았다. 모두가 흘리는 진득한 살기가 그조차 전율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눌러 두었던 흉악한 본성이 점점 터져 나오고 있다.

술을 오래도록 참아 온 주당이 술을 다시 입에 대는 날에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셔 대듯, 한동안 살육을 참아 온 이들이 피 맛을 보았으니 오늘 하루는 누구도 이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대형.”

“안다. 이동하지.”

갈천립의 시선이 서쪽으로 향했다.

“서안에 도착하기 전에 두어 개 정도 마을을 더 정리하고 간다.”

그때쯤이면 정말로 광기에 찬 군세가 만들어질 것이다.

저 대도시를 피로 흠뻑 물들일 군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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