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6화. 이곳은 화산의 땅이다. (1)
“괜찮겠습니까, 대형?”
“뭐가?”
모여들었던 이들이 돌아간 뒤, 강서칠살의 막내인 일소일살(一笑一殺) 담해(談諧)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무 일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만.”
“막내야.”
“예, 대형.”
“일은 작게 벌이면 오히려 문제가 된다.”
갈천립이 빙그레 웃었다.
“사람들은 작은 환란을 두고 보지 못한다. 집에 불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끄려 하지. 그 집 주인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은 우물로 달려가 보는 게 습성이다.”
“예.”
“하지만 산에 불이 번져 모조리 태우기 시작하면 손을 놓고 구경하는 것 역시 사람이다. 제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보면 물바가지를 들고도 엄두를 내지 못하지.”
담해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됩니다. 같은 정파가 아닙니까? 섬서와 하남은 그리 멀지 않은데, 소림이나 개방에서 달려오기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다.”
“예?”
갈천립이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 구파 놈들이 저리 날뛰는 이유는 독이 바짝 올라 있기 때문이지. 제 얼굴에 오물이 묻은 판이니,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숨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굴 수밖에 없지 않으냐?”
“예. 형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부끄러움이 가시는 게 아니다. 수치를 입은 이들이 바라는 건 둘 중 하나지. 그 수치를 씻을 만큼의 활약을 할 기회를 찾거나 그게 아니면…….”
강서일살의 둘째, 염왕부(閻王斧) 고송(庫頌)이 알 만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다른 놈들도 같은 꼴을 당하거나.”
“그렇지.”
갈천립이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놈들이 화산이 피해를 보는 걸 막으려 들 것 같으냐? 겉으로는 안타까워할지 몰라도, 속으로는 오히려 박수를 쳐 댈걸?”
“……그래도 명색이 정파인데.”
“쯧쯧.”
정파, 읊조리던 갈천립이 손가락을 까딱댔다.
“정파니 어쩌니 해 봐야 어차피 사람이다. 정파 놈들이라고 날 때부터 불경이나 도경을 외며 태어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지. 뱃속이 시커먼 건 우리나 그놈들이나 다를 게 없어.”
그가 낄낄대며 하는 말에 일소일살 담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갈천립이 이 정도까지 말을 했다면 더 따져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형제지간이라고는 하지만, 갈천립은 그들 사이에서도 무서운 사람이다. 그를 화나게 해서 좋을 게 없다.
“하지만 대형.”
그때 염왕부 고송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일을 크게 벌이는 건 좋지만, 저놈들에게 정말 배분을 해 주실 겁니까?”
“물론이지.”
“……정말로 말입니까?”
“그렇다지 않느냐. 계산은 확실한 게 좋다. 단……!”
염왕부와 일소일살이 기대에 찬 눈으로 갈천립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일이 끝나고도 우리를 따르겠다고 하는 놈들이라면 말이야.”
갈천립이 비릿하게 웃자 고송의 눈에 의혹이 들어찼다.
“따르다니요. 설마 저놈들을 거두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지금까지 저희 형제는 수하를 거두지 않고도 잘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 굳이……?”
“잘 살았다?”
순간 갈천립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렇게 잘 살아서 이 먼 강북 땅까지 와 허송세월이나 하고 있느냐?”
“…….”
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뿜어지자 고송과 담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저 개 같은 장일소 놈이 강남의 패자가 될 동안 나는 강북의 버러지가 되었다. 내가 대체 그놈보다 뭐가 모자라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이냐?”
“……형님.”
갈천립이 이를 갈아붙였다.
“그게 다 세력의 차이다. 나는 장일소를 상대할 수 있지만, 우리는 만인방을 상대할 수 없다. 사패련은 말할 것도 없고.”
고송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저희에게 세력이 있었다면 지금 저 구파 놈들에게 핍박받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 전에 강북으로 달아날 일도 없었겠지.”
사파라고 해서 자존심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대의를 위해 자존심을 굽힐 수 있는 정파에 비해, 사파는 굳이 자존심을 꺾을 일이 없는 편이다.
“나는 내게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굳이 골치 아프게 수하들을 관리하고 세력을 키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내가 틀렸다. 놈이 옳았어. 나는 저놈들을 모조리 내 휘하에 끌어들일 것이다.”
“하지만 저놈들이…….”
고송이 막 부정적인 말을 하려는 찰나, 담해가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일을 오히려 더 키워 버릴 생각이시군요.”
“흐음?”
갈천립이 재미있다는 듯 담해를 지그시 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적당히 돈을 털어 청해로 달아난다면 저들도 뿔뿔이 흩어져 추적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큰일을 벌여 버리면 지옥 끝까지 쫓아올 추적자들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처마가 필요하겠지요.”
“하하하핫. 역시 막내로구나. 맞다.”
갈천립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우선은 은하상단을 털어 돈을 마련한다. 그리고 바로 청해로 갈 것이 아니라 섬서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섬서를…….”
“그럼 종남이 결국 봉문을 풀고 나오겠지. 종남은 집요한 면이 있으니 이 일에 관련된 이를 모두 찾아 처단하려 들 것이다. 그럼 저들도 막아 줄 그늘이 필요하게 되지.”
“흩어져 있다면 집요한 추적에 목숨을 잃겠지만, 아무리 종남이라 해도 청해에 모든 전력을 끌고 들어올 수는 없을 테지요. 저 사패련이 거슬릴 테니.”
“그렇지. 망할 장일소 놈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꼴이지.”
갈천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장일소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다시 중원으로 돌아올 길이 막막해진 놈들을 복속시키면 그만이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굶주린 짐승처럼 이를 드러냈다.
“사패련과 정파 놈들이 서로 상잔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강남에 입성할 것이다. 금의환향이라는 건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거지.”
고송이 감탄한 얼굴로 갈천립을 보았다. 기녀 끼고 허송세월만 하는 줄 알았더니, 머릿속으로 이런 걸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저놈들도 눈치가 있을 텐데…….”
“경계하겠지. 그리고 계획대로만 움직이려 할 것이다. 하지만…….”
갈천립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래 봐야 잠시일 뿐이야. 개가 먹이를 코앞에 두고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등을 떠밀 것도 없다. 우리가 나서서 두어 명 베어 넘기기 시작하면 저들이 더 흥분해 날뛸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다 끝나 있겠지.”
“하긴…….”
사파란 그런 족속들이니까.
일소일살 담해가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대형……. 저 사패련의 말도 듣지 않았던 이들이 저희 말을 듣겠습니까? 저희가 만인방에 비해 모자라단 의미가 아니라, 애초에 이놈들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놈들입니다.”
“그건 내게 맡기면 된다. 나는 귀도무정이다.”
“예, 형님.”
이제 조율은 끝났다.
“우리가 강서칠살로 불린 지가 몇 해쯤 되었지?”
“못해도 십오 년은 넘었습니다.”
“그래. 그렇지. 이제는 이 이름이 지겨울 때도 되었지. 슬슬 이름을 바꿔야겠다. 강서칠살이 아니라 청해칠마(靑海七魔) 정도는 되어야 고향으로 돌아갈 때 면이 서지 않겠느냐?”
자리에서 일어난 갈천립이 휘적휘적 창가로 다가가 섰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낙양의 거리를 내려다보던 그는 입가를 뒤틀며 웃었다.
“세상이 불타고 있으면 우리도 불씨 하나 정도는 던져야지. 세상에 사파가 사패련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려 주자꾸나.”
* * *
다음 날 아침.
낙양의 성문 밖, 인적 없는 마른 들판에 철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들판에는 그 외에는 단 한 사람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주변에 은신하고 있는 이가 있나 기감을 펼쳐 보았지만 마찬가지다.
초조한 얼굴로 연신 두리번거리던 철귀는 이내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그냥 말뿐이었나?”
조금 일찍 나오기는 했지만, 설마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 줄이야.
혹 장소를 잘못 안 것 아닌가 잠시 고민에 빠졌던 철귀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제길. 강서칠살은 얼어 죽을.”
괜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에 막 발을 돌리려던 그때였다.
“음?”
저 멀리서 걸어오는 몇몇 이들의 모습이 눈에 걸렸다.
“……모조리 겁쟁이는 아닌 모양이로군.”
하지만 이 정도로는 은하상단은 고사하고, 동네 노점도 털기 어려울…….
하지만 속으로 욕을 짓씹던 철귀가 입을 천천히 벌렸다.
하나. 또 하나.
떠오르는 해를 배경으로 수많은 이들의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수가 많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내뿜는 흉흉한 살기에 철귀마저 긴장해 식은땀을 흘렸을 정도다.
‘이, 이건 예상보다도 더 많지 않은가?’
많아 봐야 오십 명 정도나 모일 거라 생각했는데…….
“휘유.”
그 순간 철귀의 옆에서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었다. 화들짝 놀란 철귀가 돌아보니 어느새 다가온 갈천립이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더 많이 모였는데?”
“……이렇게까지 모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대형.”
“그렇지?”
그뿐만 아니라 강서칠살이 어느새 모두 나타나 다가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행히 내 이름값이 그리 초라하지는 않은 모양이로군. 안 그런가, 철귀?”
“…….”
철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놈이 얼마나 잔인한 인간인지 모르는 이가 누가 있는가? 이렇게 지척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갈천립은 더 이상 철귀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가오는 이들을 보며 마음에 든다는 듯 씩 웃었다.
아무래도 그가 사파 놈들을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피를 보겠다고 모여든 이들이 이만큼이나 되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 미친놈들 같으니.”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이나 저 구파의 압박에 시달리던 사파가 많다는 의미다.
일소일살 담해가 어깨를 으쓱했다.
“댓바람부터 이 정도나 모이는 걸 보니 아직 도착하지 못한 놈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상관없다. 합류하겠지.”
방향이야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굳이 그들 모두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이 첨예한 살기가 무뎌지기 전에 움직이는 게 낫다.
모여든 이들이 핏발이 선 눈으로 갈천립을 노려보았다.
그 흉흉한 기세가 마음에 든 갈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왔다, 쓰레기들.”
그는 뭔가 할 말이 조금 더 있을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지금은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할 때다.
“바로 출발하지.”
그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섬서를 불지옥으로 만들어 버리자. 재물도, 피도, 원하는 대로 손에 넣게 해 주겠다!”
그 말에 모여든 사파인들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곧 벌어질 일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가자.”
잔뜩 굶주린 이리 떼가 서쪽으로 무리 지어 달리기 시작했다.
낙양의 서쪽, 화산이 있는 섬서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