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5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5)
“죽이고 빼앗는다.”
딱히 대단한 말은 아니다.
그건 스스로 사(邪)를 표방하는 자들에게 너무도 당연하니까.
사란 허울이라 할 수 있는 예(禮)를 거부하고, 사람을 속박하는 법(法)을 벗어던진 자들이 사용하는 글귀니까 말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강탈해서라도 손에 넣는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죽여서라도 빼앗는다. 그걸 껄끄러워하는 이는 스스로 사(邪)에 속하지 않을 터.
하지만 지금 갈천립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듣는 이는 없었다.
“이 강북에서 말인가?”
“그렇다.”
“……말이 쉽지!”
여기저기서 바로 부정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죽이고 빼앗는 것에 어떠한 거부감도 없는 이들의 입에서 이런 반응이 흘러나온 이유야 아주 간단하다.
그들이 밟고 있는 이 강북 땅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이었다면, 오히려 신경이 덜 쓰였을 것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기세가 대단하다 해도, 어차피 일을 벌이고 문제가 커지면 장강을 넘어 강남으로 향하면 그만이니까.
천하는 더없이 넓다.
그렇기에 아무리 구파일방이라고 한들 세상 끝까지 그들을 쫓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강남 땅을 밟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강남에 발을 들이는 순간, 사패련의 칼날이 그들을 노릴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우리라고 속이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성미대로 구는 순간, 저 구파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게 뻔한데, 무슨 수로 죽이고 빼앗자는 거냐?”
“설마 구파와 싸우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여기가 강북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일살.”
“……괜히 왔군. 머저리 같은 소리나 들으러 온 것이 아닌데.”
여기저기서 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도 일살, 갈천립은 되레 키득대며 웃었다. 그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모두를 다시 침묵으로 내몰았다.
“……뭐가 그렇게 우습나?”
단혼혈수의 물음에 일살이 키득대는 걸 멈추고 입을 열었다.
“우습지. 당연히 우습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꼬리를 비틀었다.
“굶어 뒈져 가는 놈들이 바로 앞에 진수성찬을 놓고도, 침만 줄줄 흘리고 있는 꼴을 보고 있는데 어찌 우습지 않겠냐고.”
고요하던 실내에 순식간에 진득한 살기가 몰아쳤다.
장내에 자리한 이들이 하나같이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갈천립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갈천립의 뒤를 지키고 있던 강서칠살이 이를 드러내며 앞으로 한 걸음씩 걸어 나왔다.
“주제도 모르…….”
그때 갈천립이 손을 들어 나서는 이들을 막았다.
“조용히.”
“……예, 대형.”
그리고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
“당장 어쩔 수 없어 숨을 죽였겠지. 제 영역 안에서 피를 본 구파 놈들은 돈을 뺏긴 사파보다 더 지독하게 구니까. 그러니 조금 상황을 지켜보자 했겠지. 그런데…… 그래서 뭐가 나아졌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무려 이 년이다.
그들은 이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달했다는 건 모두가 느끼고 있던 바.
“결국 너희가 맞을 운명이야 뻔한 거지. 버티고 버티다가 굶어 뒈지든가. 아니면…… 결국 못 참아서 혼자 일을 벌이고 구파 놈들에게 잡혀서 단근참맥을 당하든가.”
단근참맥(斷筋斬脈).
사지의 근육을 끊어 무공을 폐하는 형벌이다. 단전을 파하게 되면, 내공을 쓸 수 없지만 몸으로 익힌 무학은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단근참맥을 당한 이는 손발을 제대로 쓸 수가 없어서 평범한 양민 하나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구파는 끔찍한 죄를 저지른 사파인들에게 이 형벌을 내린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의 얼굴에 진득한 불쾌감이 어렸다. 그렇지만 크게 반발하는 이가 없는 건, 그들 역시 어쩌면 그 뻔한 미래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지? 변죽만 울리지 말고 말해 봐라.”
“말했잖아.”
갈천립이 조소했다.
“소소하게 모여 봐야 작은 곳을 털 뿐이지. 이왕 털 거라면 제대로 된 것을 털어야지. 모인 이들이 모두 나눠 먹어도 평생 걱정 없이 살 만한 돈이 있는 곳을 말이야.”
“추격은?”
“돈만 있으면 별 걱정할 일도 아니지. 그리고 과거라면 몰라도 지금은 저들도 길게 쫓아오지 못해. 적당히 청해나 신강으로 나가 있다가 잠잠해지면 신분을 속이고 돌아오면 그만.”
“흐음.”
그 말을 들은 이들의 머릿속에 각기 다른 생각이 펼쳐졌다.
‘어차피 그놈들이 나를 쫓지는 않을 테지.’
‘청해로 나가기만 하면 그만이야.’
‘강서칠살의 이름값이면 우리야 조무래기 취급을 받을 테니.’
잠시 잠깐 손을 잡은 이들은 일이 끝나면 뿔뿔이 흩어지는 법이다. 추격자들이 아무리 득달같이 달려든다고 해도, 이 일에 참여한 모두를 쫓지는 못할 터.
그렇다면 명성 높은 이들을 우선해 쫓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이는 누가 뭐라 해도 강서칠살이다.
“나쁘지는 않군.”
“확실히. 이대로 손가락만 빨고 있기는 지겹지.”
“빌어먹을.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저 구파 새끼들이 대놓고 감시해 대는데, 언제까지 입을 처닫고 있어야 하느냔 말이야!”
“……지금도 이런데 저 무당과 종남이 봉문을 풀면…….”
애초에 사파들이 강남에 모여 있었던 이유가 있다. 구파일방이 대거 자리한 강북에서는 일을 벌이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강북의 중심을 지키는 문파는 소림과 무당, 개방, 종남, 남궁이다.
그 다섯 문파 중 둘씩이나 봉문을 했는데도 압박감에 숨을 쉬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저 두 문파가 봉문을 풀고 나오면 어찌 될지야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그래서?”
갈천립이 고개를 든다.
단혼혈수가 팔짱을 낀 채 그를 차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만한 이들을 모아서 어딜 털 생각이지? 평범한 곳은 아니어야 할 거야.”
“물론 아니지. 중원십대상단 중 하나를 털 테니까.”
“십대상단?”
“제정신인가?”
십대상단이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단혼혈수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한 곳이라면 당연히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중 한 곳과는 관련이 있을 터. 제 창고를 털린 구파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추격을 하려 들 것이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내가 털려는 곳은 추적이 따라붙을 확률이 별로 없는 곳이니까.”
“으음?”
“지키는 개는 없고, 창고는 어디보다 두둑한 곳이 딱 한 곳 있지.”
“……그게 어디지?”
“은하상단.”
갈천립의 말에 모인 이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수군거렸다.
“은하상단?”
“……그런 데가 있나?”
“아. 은하특급표행이라면 이해가 쉬우려나?”
“……거길 털겠다고?”
“최근 몇 해 들어 새로이 중원 십대상단의 끝자락에 이름을 올린 곳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버는 돈이 십대상단의 끝자락은 아니야. 말 그대로 돈을 갈퀴로 쓸어 담고 있는 곳이지.”
“그런 곳에 뒷배가 없을 리가 있나?”
“물론 있지. 하지만 지금은 없어. 은하상단의 뒷배는 다름 아닌 화산이거든.”
“…….”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 이들이 눈을 번쩍였다.
“……봉문 한 화산이 뒷배라.”
“그거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그리고…….”
그때,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철귀가 입을 열었다.
“지금 섬서는 무주공산이지. 종남도 봉문을 했으니까.”
“……심지어 청해에서도 가깝군. 섬서만 벗어나면 바로 청해지.”
대충 상황을 짐작한 이들이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호위무사들이야 있겠지만, 그래 봐야 어중이떠중이.”
“주인이 없는 십대상가는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보물창고나 다름없지.”
“주인이 없다고?”
하지만 단혼혈수는 아직도 영 마음이 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봉문이라는 게 사슬에 묶여서 갇히는 것쯤 된다고 생각하나? 칩거를 한다 해도 제 앞마당에 불이 붙으면 끄러 나오는 게 사람이다.”
“아아. 알고 있다. 당연히 봉문을 풀겠지.”
갈천립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지만…… 그래 봐야 마찬가지 아닌가? 설마…….”
그가 실내에 있는 이들을 쭉 훑어보았다.
“이만한 이들이 모여서 화산 하나 감당 못 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 말을 들은 이들이 저마다 나지막이 웃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이 전부가 아니다.
물론 단독으로 움직이는 이들도 있지만, 반수쯤은 각기 작은 세력 하나 정도는 이끌고 있는 이들이다. 그 인원을 모조리 끌어모을 수 있다면 웬만한 문파 하나 처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구파일방급이면 부담이 되겠지만…… 구파에도 속하지 못하는 화산 정도야.”
“얕보지 마라. 화산은 천우맹의 수장이다.”
“그저 명목상의 수장일 뿐이지. 저 화산이 사천당가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멍청이가 하나라도 있나?”
화산은 먼 과거에 명문이었고, 몇 해 전에는 세상을 휩쓴 사건의 중심에 서며 명성을 드높였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화산은 구파나 오대세가의 급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중소문파에 지나지 않는다. 명성과 실력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니까.
봉문 한 동안 이름의 빛이 바래 버린 화산검협이 사패련주 장일소와 맞서며 명성을 올리기는 했으나, 냉정하게 말한다면 그건 화산검협의 실적일 뿐, 화산의 실적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천우맹의 소속인 건 분명할 텐데?”
“천우맹이니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천우맹의 주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당가는 장강에 묶여 있으니 다른 추적을 우려할 필요가 없거든. 나머지 새외 놈들이야 중원에서 한참 떨어져 있고.”
대충 계산을 끝낸 이들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럼 화산만 처리할 수 있다면 다른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로군.”
갈천립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들 이해를 한 모양이로군.”
“정말 괜찮은 건가?”
“겁이 나면 지금이라도 빠져.”
“…….”
모인 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기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것도 아니다.
눈치를 보던 이 중 하나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나는 빠지겠네.”
“음?”
갈천립이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든 이를 바라보았다.
“무영투살(無影鬪殺)이 겁쟁이란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겁이 나서 그러는 게 아니다. 청해로 빠져나간다고 해도 결국은 중원으로 돌아와야 할 터. 평생을 쫓기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좋아.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다만…….”
그 순간 갈천립의 허리춤에서 도가 빛살처럼 뽑혀 나왔다.
서걱!
동시에 들려 있던 무영투살의 팔이 깔끔하게 잘려 허공으로 솟구쳤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무영투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잘려나간 팔의 단면을 움켜잡은 그는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저벅. 저벅.
태연한 얼굴로 다가온 갈천립이 무영투살의 얼굴을 짓밟았다.
“끄, 끄윽…….”
“그런 걸 겁쟁이라고 하는 거다. 그리고 나는 겁쟁이를 싫어하지.”
“그, 그만…….”
서걱!
단숨에 목이 잘린 무영투살의 몸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침묵했다.
무영투살이라면 이곳의 대부분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였다. 그런 이가 변변한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단번에 뒷골목 파리처럼 죽어 나간 것이다.
‘귀도무정.’
어째서 그가 강서칠살의 일살이며, 귀도무정이라는 별호로 천하를 떨게 하는지 이 광경이 증명했다.
“쯧.”
도에 묻은 피를 털어 낸 갈천립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또 빠질 사람 있나?”
대답은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이들은 갈천립이 일을 벌이지 않았다고 해도 곧 뭔가를 저질렀을 이들이다. 거기에 이런 광경까지 두 눈으로 봤으니 더더욱 빠질 수가 없었다.
“빠질 일은 없지.”
단혼혈수가 팔짱을 낀 채 갈천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다만 하나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이만한 이들을 모아서 움직이면 통제 따위는 바라지 않아야겠지. 아마 지옥도가 펼쳐질 거다.”
“좋지. 아주 좋아.”
갈천립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강서칠살의 이름으로 허락하지. 마음대로 날뛰어라. 어차피 뒷감당은 내가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단혼혈수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모든 것은 결정 났다.
“우리가 이곳에 모였다는 건 이미 거지새끼들을 통해 구파 놈들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여력이 없어서 막을 수는 없겠지만, 시간을 끌어 좋을 건 없겠지.”
“그럼 언제 움직일 건가?”
“내일.”
“……하루 만에?”
“왜? 안 될 이유라도 있나?”
그 말을 들은 혈도살이 혀로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환영이지. 안 그래도 지루해 미칠 것 같았거든.”
“너희뿐만이 아니다. 관심이 있는 이들은 모조리 끌고 와라. 화려하게 한번 저질러 줄 테니까.”
굶주림을 오래도록 참은 이리들이 풍겨 오는 피 냄새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