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4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4)
낙양의 환락가.
이제는 과거의 찬란했던 명성을 잃은 고도(古都)이지만, 그렇다 해도 낙양은 낙양이다. 화려하게 밝혀진 밤거리가 삶에 지친 수많은 부나방을 잡아끌고 있었다.
“으……. 취한다.”
“낄낄. 자네 많이 약해졌구먼! 뭐 얼마나 마셨다고.”
“흥. 아직 멀었네. 나는 날이 새도록 마실 수 있어.”
“쯧쯧. 허세는 주머니가 가볍……. 윽! 뭐야!”
휘청이던 취객이 쿵 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옆을 지나던 이와 어깨가 부딪힌 것이다.
“이놈이 미쳤……!”
반사적으로 고함을 내지르려던 사내의 입이 순간 조개처럼 다물렸다.
“…….”
부딪힌 이가 흘끗 그를 내려다보았다. 딱히 험악한 얼굴은 아니다. 게다가 덩치가 우락부락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넘어진 사내는 숨도 쉬지 못하고 덜덜 떨어 댈 수밖에 없었다.
담이 작기 때문이 아니다. 얼굴에 그어진 십여 개의 칼자국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내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어……. 어어…….”
술이 번쩍 깬 그의 친구가 재빨리 달려와 격하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술이 많이 취해서…….”
“…….”
“제,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대인!”
차가운 눈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던 이의 어깨가 살짝 움직이려는 찰나, 옆에 서 있던 이가 그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세.”
“…….”
그러자 칼자국 가득한 사내가 입술을 한차례 실룩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로 그들을 빤히 응시하던 그는 이내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사내를 만류했던 이가 킥킥 웃으며 취객들에게 말했다.
“저 앞에 도박장이 있는 것 같으니 한번 들러 보게. 내가 보기에 자네들은 오늘 정말 운이 좋거든.”
“…….”
“아니, 아니지. 평생 쓸 운을 다 쓴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혈도살(血刀煞)을 만나고도 살아서 갈 수 있다니 말이야.”
혼잣말로 중얼대던 사내는 곧 앞서 걸어간 이에게 따라붙어 걸음을 재촉했다.
“…….”
술이 단번에 깨 버린 취객들은 어느새 이마에 흘러내린 식은땀을 훔쳤다.
“뭔…… 사람 얼굴이…….”
“눈빛 봤는가?”
“가, 강호인이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양민들이 강호인을 만난다는 건 생각보다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여기에 왜 강호인이……. 응?”
멍하니 중얼거리던 이가 움찔하여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바로 옆으로 지나간 이의 허리춤에 보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할 만큼 커다란 도가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
도뿐만이 아니다.
저 앞쪽에 걸어가는 이의 등 위로는 삐죽한 창이 솟아 있고, 한눈에 봐도 힘이 남달라 보이는 거대한 체구의 장한도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 무슨 일이 있나?”
지나친 이들이 하나같이 섬뜩한 기세를 흘려 대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그걸 감지했는지 숨을 죽이며 길가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전쟁이라도 났나.”
“저 많은 강호인들이 대체 어디서 온 거지?”
험악한 인상의 이들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하니, 양민들이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그들을 힐끔댔다.
하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혈도살에, 철귀(鐵鬼), 회선창귀(廻旋槍鬼), 구유검객(九幽劍客)? 빌어먹을,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쟁쟁하기 짝이 없는 사파의 고수들이 몰려가는 모습에, 개방 낙양 지부장 곽병(藿倂)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면,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 자체도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사파인들은 기본적으로 정파보다 같은 사파를 더 경계하고 싫어하니까.
‘지, 지원을 요청해야 해.’
하지만 그걸 거꾸로 말하자면, 서로 으르렁대는 이들이 한곳에 모일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기겁하여 몸을 돌리려던 곽병은 순간 눈에 걸리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어…… 으……?”
저쪽에서 걸어오는 한 사내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다, 다, 단혼…… 단혼혈수(斷魂血手)…….”
곽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지금까지 그가 봤던 게 강남의 사파 중 이름깨나 날린 이들이었다면, 단혼혈수는 그들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물’이다.
삐쩍 말라 보기에 위태로워 보이는 그 중년인은 저벅저벅 걸어가다가 시선을 살짝 틀어 곽병을 응시했다.
“…….”
눈빛이 마주친 순간, 곽병의 전신이 얼음 굴에라도 떨어진 듯 싸늘하게 식었다.
‘나, 나를 알아채…….’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분명 그가 개방도임을 알아보았을 텐데도 단혼혈수는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지나쳐 갔다.
“…….”
다리에 힘이 풀린 곽병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 지부장님.”
“괜찮으십니까?”
뒤쪽에 있던 거지들이 재빨리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곽병은 대답 대신 사파인들의 등을 눈으로 쫓았다.
대로를 걸어가는 그들의 앞으로 화화루의 망루가 드높이 솟아 있었다.
무릇 기루의 최상층은 가장 돈 많은 손님들만을 받는 곳이고, 한 기루의 격은 그 최상층을 얼마나 화려하게 꾸며 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화루의 최상층 역시 낙양제일루라는 명성에 걸맞게 더없이 화려한 장식품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금을 타는 소리와 기녀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해야 할 화화루의 최상층이 지금은 쥐 죽은 듯한 침묵만 고여 있었다.
“…….”
한눈에 보아도 값비싸 보이는 의자에 앉은 이들이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지금 화화루에 최상층에는 못해도 스물이 넘는 이들이 앉아 있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고, 그들 중 누구도 서로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들은 알고 있다.
사파라는 이름하에 묶여 불리기는 하지만, 애초에 그들은 서로 사이가 좋을 수 없는 이들이다. 서로 칼을 휘두르고,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등에 칼을 꽂기조차 주저하지 않던 이들이 사이좋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만한 이들이 한곳에 모였는데도 칼부림이 나지 않는 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그들은 오늘 이유가 있어서 이곳에 모였고, 불필요한 충돌을 피해야 하므로 최대한 서로를 자극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침묵이 이토록 길게 이어지니 결국 버티지 못하는 이가 나타났다.
“빌어먹을!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벽사도(碧蛇刀) 진량(眞自)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들이 이곳에 든 지 벌써 반 시진 가량이 지났건만, 그들을 불러 모은 이들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다.
당연히 화가 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지 않는 이도 있는 모양이었다.
“소란 피우지 마라, 애송이.”
“……뭐라?”
“네 허리에 찬 칼을 주둥아리에 틀어박아 버리기 전에 입 다물라는 뜻이다.”
벽사도의 두 눈에 실핏줄이 서기 시작했다.
“네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 적괴(赤怪)?”
벽사도가 으르렁대듯 말하자 적괴라 불린 이가 피식 웃었다.
“나 혼자서 네 벽사도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잘 아는군.”
“하지만 여기서 네 주둥아리에 칼을 박을 수 있는 사람은 대충 열 명도 넘을 것 같은데? 주제를 알고 지껄여라.”
“이 개 같은…….”
벽사도가 막 발작하려는 찰나였다.
“시끄럽군.”
“…….”
벽사도가 입을 닫았다.
그의 시선이 가장 뒤쪽에 앉은 단혼혈수에게 가 닿았다.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본 벽사도는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군말 없이 제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가 아무리 절강에서 그 이름만으로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할 만큼 악명 높다지만, 감히 저 단혼혈수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강호는 강자존(强者尊).
그리고 그 강자존의 법칙은 사파의 세계에서 더욱더 철저하게 지켜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때 단혼혈수가 조금 짜증을 담아 입을 열었다.
“지루한 것도 사실이지. 강서칠살은 손님 대접이 영 시원치 않군.”
“손님이라면 대접을 했겠지.”
그 순간 그들의 뒤쪽 문이 활짝 열리더니 일곱 명의 사내들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그쪽을 향해 쏠렸다.
‘저들이…….’
‘……과연.’
천하는 넓고 넓다.
명성을 날리던 이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면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 별호를 알고 그 명성을 안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서 강서칠살을 처음 본 이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철귀가 입가를 비틀었다.
‘소문이 과장된 건 아니었군.’
손끝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기파다.
강서칠살. 강서성의 사신이라 불리는 일곱 의형제.
저 하나하나가 모두 악명으로 탑을 쌓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맞붙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다. 한 산에 두 마리 범은 살 수 없는 법일진대, 한 산에 일곱 마리의 범이 산다면 당연히 지옥도가 펼쳐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강서칠살은 서로 맞붙어 죽고 죽이는 대신, 의형제를 맺었다.
그 수는 일곱에 불과하지만, 천하의 어떤 세력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집단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특히나…….
‘저자가 일살. 귀도무정 갈천립인가?’
선두에서 느른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이를 본 순간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다. 몸이 본능적으로 저자의 위험성을 알고 경고를 해 대는 것이다.
저벅. 저벅.
앞쪽으로 휘적휘적 나선 갈천립이 몸을 획 돌리더니 모두를 향해 히죽 웃었다.
“잘 왔다, 쓰레기들. 아니……. 꽁지를 말고 도망친 개새끼들이라 불러야 할까?”
“이…….”
갑작스레 쏟아진 욕설에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누워서 침 뱉기가 취미인 줄은 몰랐는데?”
철귀가 차게 이죽거리며 말하자 갈천립이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그도 맞는 말이군. 인사하지. 강서칠견(江西七見)의 일견(一犬) 갈천립이라고 한다.”
팔짱을 낀 이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듣지 않아도 그가 갈천립이라는 건 이미 모두가 짐작하고 있던 바다. 일단 기세부터 다르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지.”
굳이 예의를 차릴 것도 없다는 듯 갈천립이 입을 열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 여기까지 그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는 건, 뱃가죽이 등가죽에 들러붙어 있다는 의미겠지? 늑대를 피해서 강북으로 도망 왔더니, 여긴 범들이 사는 곳이라 이 말이지.”
이곳에 있는 모두는 사패련의 휘하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강북으로 이주한 이들이다.
장일소는 오직 굴복이 아니면 죽음만을 선택지로 제공했으니까.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을 리 없었다.
강남처럼 살벌하지는 않지만, 강북은 그보다 더욱 숨쉬기 어려운 곳이었다.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할 때마다 저 빌어먹을 소림과 당가, 개방이 미친 듯이 달려와 감시하고 있으니까.
딱히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이 현실에 깊은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그렇기에 갈천립의 부름에 이렇게 응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면 이만한 이들이 한곳에 얼굴 맞대고 모이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무리 짓는 것을 싫어해 강북으로 온 이들이니 더욱더.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말해라. 왜 우릴 불렀지?”
단혼혈수의 말에 갈천립이 눈을 빛냈다.
“천하의 단혼혈수가 묻는다면 대답을 해 드려야지. 부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돈이 떨어졌거든.”
그 말에 여기저기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적선이라도 해 달라는 건가?”
“나도 거지지만, 너희도 거지일 텐데? 거지에게 적선을 받을 수는 없지. 그럴 바에는…….”
갈천립의 두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쏟아졌다.
“차라리 죽이고 빼앗는 것이 낫지.”
그 차가운 목소리에, 실내의 공기까지 싸늘히 식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