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863화 (860/1,567)

863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3)

“죽여!”

“이 더러운 사파 놈들!”

행인들이 오가는 거대한 대로. 그 한가운데서 보기만 해도 섬뜩한 병기를 든 이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맞붙었다.

채앵! 챙!

병기와 병기가 부딪히고, 순식간에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졌다.

“아이고야! 이게 뭔 일이야!”

“히이익!”

백주 대낮에 벌어진 칼부림에 양민들이 기겁을 하며 달아났다. 하지만 난전을 펴 두었던 상인들은 물건을 놓고 달아날 수가 없어 전전긍긍이었다.

그들은 결국 구석으로 물러나 몸을 옹송그린 채 살벌하게 칼을 휘둘러 대는 강호인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뭔 난리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길 한복판에서 싸움을 벌이는 강호인들의 모습을 보는 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이런 일은 이곳 하남뿐 아니라 강북 곳곳에서 심심찮게 벌어졌다.

“아아아악!”

격렬히 싸우던 이들 중 하나가 가슴에 칼을 맞아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그 끔찍한 모습에 상인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사람의 뜨끈한 피가 여기저기 튀는 모습을 두 눈 뜨고 지켜본다는 건 평생을 순박하게 살아온 이들에게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콰당탕탕!

나가떨어진 이의 몸뚱이가 노점을 덮쳤다. 단숨에 좌판이 박살나며 쌓아 두었던 과일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이고!”

물건을 팔던 상인에게는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지만 그깟 과일보다야 제 목숨이 중하다는 걸 모를 사람이 있겠는가?

“이 개 같은 새끼들이!”

“어디 오늘 끝장을 보자!”

한눈에 봐도 거칠게 생긴 이들이 두 눈에 원독을 품었다. 그 흉흉한 기세를 마주한 이들도 지지 않고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멈추시오!”

콰앙!

웅혼한 목소리와 함께, 바윗덩어리가 절벽에서 떨어진 듯한 둔중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격렬하게 싸우던 이들이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한 무리의 무인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본 그들의 얼굴에는 각양각색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강호에서 저 누런 황포를 보고도 평온할 수 있는 이들은 몇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천하에 수많은 절이 있고, 수많은 승려가 있지만, 저 황포를 입는 곳은 오직 한 곳뿐이다.

소림.

구파일방의 수장이자 강호의 북두인 소림이 바로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저벅. 저벅.

제자들을 이끌고 온 소림의 혜방이 눈살을 찌푸리며 엉망이 된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치대로라면 이 순간 그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은 ‘이게 무슨 일이오?’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 말을 입에 담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미 어찌 돌아가는 사정인지를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들어라.”

“예!”

“소란을 피운 이들을 모두 제압하여 소림으로 압송하라!”

“예!”

“대사!”

그 말을 들은 이 중 하나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먼지로 더럽혀진 백의의 왼쪽 가슴에 의(義)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저는 의혈문(義血門)의 곽소종입니다! 저 망할 사파 놈들이 시비를 걸어와 벌어진 일이거늘, 어찌 시시비비도 따지지 않고 우리를 저 사파와 같이 취급한단 말씀이십니까?”

의혈문은 하남을 기반으로 자리한 중소 정파 중 한 곳이다. 소림의 속가는 아니나 예전부터 속가와 깊은 관계를 맺어 온 곳이기도 하다.

그 의혈문의 문주인 곽소종이 대놓고 따져 묻자 혜방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스쳤다.

“……문주. 하남 내에서 소란을 피우는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방장의 전언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이런, 빌어먹을. 그럼 의혈문이 있는 곳에서 양민들을 털어 대려는 저 망할 사파 놈들을 손가락 빨며 구경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곽소종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항변하자 혜방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 일이 있을 경우에는 소림에 말을 해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대체 언제 올 줄 알고 소림을 기다리라는 겁니까! 어디 한두 번 말을 한 것도 아니고!”

혜방이 고개를 내저었다.

“시시비비는 본산의 호법들께서 따지실 것입니다. 저는 그저 방장의 명을 따르는 것이니 문주께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길!”

곽소종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소림이 빠르게 당도하여 싸움이 짧게 끝났으니 피해가 크지야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 몇이 피를 흘리는 모습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그런 상황에서 칼을 놓고 물러나는 것이 쉬울 리 없다. 특히나 스스로가 정당하다고 믿을 수 있는 이런 경우라면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하남에서 소림의 뜻은 절대적인 법.

“무기를 거두고 물러나라. 일단은 소림에 협조한다.”

“……예.”

명을 들은 제자들이 불만 가득 실린 눈으로 혜방을 힐끔대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혜방은 순간 가슴에 짙은 먹구름이 들어차는 것 같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하남에서 소림이 이런 눈빛을 받을 일이 있었겠는가?

그는 짧게 불호를 외었다. 어쨌든 지금은 이런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곳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대들도 본산으로 같이 가 주셔야겠소.”

혜방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한다.

불만을 내비칠지언정 그래도 협조적이라 할 수 있었던 의혈문과는 달리, 반대쪽 무리가 혜방을 바라보는 눈빛은 살벌하기만 했다.

“빌어먹을 중놈이 잘도 지껄여 대는구나. 우리가 왜 네놈 말에 협조해야 한단 말이냐?”

혜방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방장의 뜻을 내 작은 수양으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구나. 방장께서는 어찌하여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말인가?’

이를 드러낸 이들은 당연히 사파인들이다.

물론 혜방에게 사파인들은 그리 낯설지 않은 존재였다. 이 소림의 영향력이 강한 하남에조차 사파는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파라기보다는 흑도라 불러야 마땅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응당 어두운 구석이 있고, 그런 곳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무리를 짓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이들은 혜방이 알던 그런 사파들과는 결이 달랐다. 사패련을 피해 강북으로 넘어온 이들은 거칠기가 야차와도 같았고, 소림과 구파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보여 주지 않았다.

“하면 어찌 하시겠소?”

정중하지만 거친 말이다. 상황에 대한 피로뿐만 아니라, 혜방이 이들에게 느끼는 짜증과 적개심도 포함되어 있어서였다.

“흐흐. 중놈 주제에 화도 낼 줄 아는군. 본디 낯짝이 두꺼운 놈들은 화를 잘 안 낸다던데.”

“낯짝?”

“그래, 낯짝! 이 중놈 새끼야! 우리가 여기서 이 발악을 하고 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다 너희 소림 놈들 때문이 아니더냐! 네놈들이 사패련의 고삐를 풀어 주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그 개 같은 놈들을 피해 이곳까지 올 일은 없었다!”

“…….”

“타지에 왔으면 먹고살 길을 찾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 아무것도 하지 말고 굶어 죽으라는 말이냐? 개소리 마라! 그럴 거면 목숨을 걸고 이 강북까지 달아나지도 않았다. 손가락만 빨다 굶어 죽느니 싸움박질이라도 하다 죽을 것이다!”

그럴싸하지만 따지고 보면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말이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한 도적질이라고 해서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아니, 애초에 사람다운 사람이라면 타인의 것을 빼앗아 먹고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소림의 엄격한 훈육을 받아 온 혜방에게 그런 말이 변명이 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따르지 않으시겠다?”

“흐흐. 소림 놈들 몸에는 칼이 안 박힌다더냐?”

혜방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공무.”

“예, 사숙!”

“저들을 제압하여 모조리 압송해라!”

“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림의 제자들이 단숨에 병기를 쥔 사파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자비를 설파해야 할 중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얼굴이었다.

“이 개 같은 중놈들!”

“껍데기를 벗겨 버리겠다!”

“단번에 제압하라!”

끝내 다시 벌어진 싸움을 보며 혜방이 짧게 불호를 외었다.

“아미타불…….”

그와 소림의 제자들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지만, 하남의 혼란은 점점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강북에서 넘어온 사파들만 날뛴다 싶더니, 이제는 애초부터 하남에 자리하던 사파들은 물론이고,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정파들마저 소림의 뜻을 어기고 난장을 피워 댄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기분이다. 최선을 다해 하남을 안정시키려 노력하고 있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만 있다.

시름에 잠겨 있던 혜방이 이내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하지 말지어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소림의 명성이 과거와 같지 못하여 벌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억지로 털어 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지난한 일이라 해도 결국 언젠가는 끝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수밖에.

* * *

벌컥!

문이 과격하게 열렸다.

“대형!”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얼굴을 구겼다. 지독한 술 냄새에 순간 머리가 다 아뜩할 지경이었다.

“대형! 일어나 보십시오, 대형!”

고도(古都)에서 가장 화려한 기루, 화화루(花花樓)의 최상층.

가장 값비싼 방을 차지한 사내가 커다란 고급 침상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 대형! 좀 일어나 보시라니까요!”

죽은 듯 잠을 자던 사내가 눈가를 꿈틀하더니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빌어먹을.”

그는 골이 울린다는 듯 머리를 움켜잡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뭐냐? 아침부터.”

“대형. 의혈문인가 뭔가 하는 놈들을 정리하러 갔던 적마방(赤馬房)이 소림 놈들에게 끌려갔습니다.”

“…….”

“어떻게 합니까?”

“하…….”

사내가 손을 뻗어 침상 위에 놓인 술병을 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집어 탈탈 털어 봐도 술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짜증이 치민 그는 술병을 집어 던지고는 보고하러 온 이를 바라보았다.

“아소(兒疎).”

“예?”

“너 돈 좀 있냐?”

“제가 돈이 어디 있습니까? 대형이 여기서 논다고 제 남은 비상금까지 다 털어 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 적마방 놈들이 일만 제대로 했어도 지금쯤 상납금을 두둑이 챙겼을 텐데, 다 틀렸습니다. 이제 돈 나올 구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남으로는 오지 말자고 했잖습니까!”

“쯧.”

사내가 혀를 차 댔다.

“멍청한 소리 작작 지껄여라,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이 강북에 어디 만만한 곳이 있더냐? 저 온갖 놈들이 날뛰는 호북으로 갈까? 아니면 황제가 있는 하북으로 갈까? 그게 아니면 용담호혈 같은 사천으로?”

“…….”

“어디든 마찬가지다, 어디든.”

그 말에 보고를 하러 온 이가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래서야 하남에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가 없는데.”

“뻔한 소리를 하는구나.”

사내는 낄낄대며 웃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자리를 못 잡을 것 같으면 그냥 포기해 버리면 그만이지.”

“예?”

“대충 파악은 끝났으니 크게 한 탕 해 보자꾸나.”

“한 탕이요?”

사내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 은퇴할 때도 되었지. 아직 비만 오면 장일소 그놈에게 얻어맞은 허리가 아프단 말이야…….”

“그래서, 도적질이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도적질이다. 끌어모을 수 있는 놈들을 모두 끌어모아라.”

“얼마나요?”

“모조리!”

그 말을 들은 이가 눈을 찌푸렸다.

“……아니. 대형의 말이면 안 그래도 눈이 시뻘게진 놈들이 구름처럼 모여들 텐데, 그들을 이끌고 어딜 터시겠다는 말입니까? 웬만한 곳을 털어서는 개평도 안 떨어질 텐데.”

“큰 곳이지. 아주 큰 곳.”

사내의 눈이 서쪽으로 향했다.

“천하십대상단 중 하나 정도는 털어 줘야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을 벌지 않겠느냐?”

“시, 십대상단이요?”

“그래. 내게 계획이 있다. 내 이름으로 관심 있는 놈들을 모조리 끌어모아라.”

“아, 알겠습니다. 대형!”

제대로 된 계획 하나 없이 사람을 모으는 게 쉬울 리 없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이는 가타부타 따져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뛰어나갔다.

당연한 일이다.

이 말을 한 이가 다름 아닌 강서칠살(江西七殺) 중 일살(一殺)인 귀도무정(鬼刀無情) 갈천립(葛千立)이니까.

과거 저 장일소와도 호각으로 다투었다고 명성이 자자한 갈천립의 말이라면, 굶주린 이리 떼가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모여들 것이다.

고도(古都) 낙양.

그 낙양의 하늘로 검은 먹구름이 밀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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