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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62화 (859/1,567)

862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2)

“후우.”

“아이고, 상단주님. 이러지 마십시오. 저희가 들겠습니다.”

“아닐세. 길이 이리 가파른데 한 사람이라도 더 도와야지.”

“저희는 원래 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하. 이 사람아. 나는 그럼 놀고먹는 사람인가?”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괜찮네. 내가 이래야 마음이 편해서 그러니, 그냥 들게 해 주게나.”

“……그러시다면야…….”

인부는 불안이 채 다 가시지 않은 눈으로 황종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황종의는 등짐을 내려놓을 생각은 조금도 없이 묵묵히 걸었다.

‘가파르구나.’

벌써 몇 번이나 올랐지만, 이 산은 오를 때마다 새로이 입에서 헉 소리가 나게 만든다. 드높은 산세와 험준한 절벽들은 마치 사람의 출입을 일절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처음 이 산에 올랐을 때는 정말이지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몇 번 오른 다음에는 똑같이 힘들어도 마음만은 꽤 즐거웠다.

그 정상에 반가운 이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황종의의 마음은 처음 산을 오르던 그때보다 오히려 더 무거웠다.

‘화산…….’

구름 위로 뻗어 있어 가려진 봉우리 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더 멀게만 느껴졌다.

“끄응.”

“도착했다.”

정상에 오른 인부들이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헐떡거렸다.

오른 횟수만 따져도 벌써 몇십 회는 넘었을 텐데, 이놈의 산은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자자. 마저 해 놓고 쉽시다.”

“예.”

인부들이 등에 멘 짐을 풀어 조심스럽게 산문 앞쪽에 내려놓았다.

황종의는 그들이 짐을 옮기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봉문을 한다고 해서 사람이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아니, 되레 봉문을 했기 때문에 먹을 것이 더욱 필요하다. 봉문을 하지 않았다면 드넓은 산을 오가며 먹을 것들을 나름 구할 수 있겠지만, 문파 밖으로 나올 수 없다면 음식은 전적으로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은하상단은 한 달에 한 번씩, 화산 제자들이 먹을 양식을 화산으로 나르고 있었다.

“후.”

황종의도 등에 진 봇짐을 내려놓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상단주님.”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날라 온 짐의 양에 비하면야 그가 짊어진 봇짐 정도야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부들은 천하에 이름 높은 은하상단의 상단주가 그들과 함께 짐을 들고 산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에 감격하고 있었다.

짐을 내려놓은 황종의는 말없이 화산의 산문 앞에 섰다.

늘 활짝 열려 손님들을 받던 문은 언제 그랬었냐는 듯 여지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언제나 깨끗하게 닦여 있던 현판에도 먼지가 빼곡하게 쌓였다.

그 광경을 잠시간 보던 황종의는 산문을 가볍게 문질러 보았다. 쌓여 있던 흰 먼지가 손끝에 닦여 나왔다.

“유 행수.”

“예, 상단주님.”

“혹 짐을 옮기던 이들이 화산의 제자들을 마주한 적은 없다던가?”

“예. 제가 알기로는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걸로 압니다.”

“……그렇군.”

황종의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 아니, 뭐 우리가 죄지어서 봉문 한 것도 아니고. 귀찮으니까 여기저기서 찾아오지 말라고 봉문 하는 건데, 못 나올 것도 없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셔 놓고.”

야속하기만 했다.

“평소에도 여기에 짐을 쌓았는가?”

“예. 딱히 산을 오르는 사람도 없으니 가지고 들어가시기 쉽게 산문 앞에다가 짐을 놓고 가고 있습니다.”

“그렇군.”

“한 번씩 필요한 물품이 있으시면 사람이 올 때에 맞춰 산문에다가 서찰을 걸어 두십니다. 그럼 다음 방문에 그 물품을 전달해 드리고 있습니다.”

황종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아는 내용들이다.

‘약재와 목검들이 많이 들어갔지.’

둘 다 걱정되는 물건들이다.

약재가 많이 필요한 것은 다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고, 목검을 주문하는 것은 이 나무가 넘치는 산에서 직접 목검을 깎을 시간조차 낭비하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화산으로 그 두 가지 물품이 많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휴우.”

한 발 물러선 황종의는 화산의 산문과 그 옆으로 이어진 담벼락을 보았다.

봉문이란 참 웃기는 일이다.

이 작은 담으로 세상과 문파를 단절하는 건 불가능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라도 이 담을 넘어 이 안에 있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봉문을 완성하는 것은 저 낮은 담이 아니라, 봉문을 선언한 문파에 대한 존중이니까. 저 담을 넘는다는 것은 화산의 의지를 무시하는 행위다.

그렇기에 천하의 황종의조차 저 담을 넘을 수 없다.

“혹…….”

“예, 상단주님.”

“닦을 만한 천을 가져온 게 있는가?”

“천이요? 그…… 그런 건 딱히 들고 오지 않았습니다. 봇짐을 질 때 쓰는 천이라면 있습니다만.”

“가져와 보게.”

“예.”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지만, 누구도 황종의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일일이 행동의 연유를 묻기에는 그가 너무도 높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 있습니다, 상단주님.”

인부 하나가 부리나케 천을 들고 와 내밀자 황종의가 받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그리고 천을 잘 접어 화산의 대문을 닦기 시작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대문이 깨끗하게 닦이며 차츰 본래의 색을 드러냈다.

“사, 상단주님. 저희가 하겠습니다. 이리 주십시오.”

“아닐세.”

황종의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 괘념치 말게나.”

“아이고. 상단주님. 이런 일을 귀하신 분께서…….”

“나는 귀한 사람이 아닐세.”

황종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친우의 집을 남을 시켜 닦는 사람은 없네. 그냥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니 도와주게나.”

“……예. 상단주님.”

인부들은 그제야 뒤로 물러났다.

화산의 대문을 깨끗하게 닦은 황종의는 짐을 가져와 그 위에 오른 뒤 현판마저 말끔히 닦았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잠시 후에야 황종의는 짐 아래로 내려와 이마를 훔치며 깨끗해진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뒤따라 올라온 총관이 숨을 몰아쉬다가 황종의의 뒷모습을 보고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소단주……. 아니, 상단주님.”

“음?”

아직 상단주라는 호칭이 입에 잘 붙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황종의를 소단주라는 이름으로 불러온 세월이 몇 해던가?

황문약이 조용히 숨을 거두고, 은하상단을 이어받은 황종의는 무척 훌륭하게 상단을 운영해 냈다. 지켜보던 그가 다 감탄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황종의의 뒷모습이 너무도 외로워 보일 때가 있었다.

‘그렇겠지.’

가장 의지하던 아버지를 잃고, 가장 신뢰하던 이들이 문을 걸어 잠근 채 칩거에 들어갔는데 어찌 외롭지 않겠는가?

“한번 불러 보기라도 할까요?”

“그만두게.”

안쓰러움에 말을 꺼냈으나 황종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상단주님. 이건 아주 사적인 일은 아니잖습니까.”

“그렇기에 더 안 된다네.”

“예?”

황종의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지금 은하상단의 상황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황종의가 훌륭하게 운영한 덕에 겉으로야 큰 문제가 없지만, 황문약이 죽기 전까지는 힘찬 기세로 확장되던 사업이 최근에는 암초에 부딪혔다.

아니, 설사 황문약이 살아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혼란한 시기니까.

“유령문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는가?”

“예.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은하표행이었다. 아무리 강남불침의 조약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만 적용된다고는 하나, 사패련이 지배하는 강남에 고가의 물품을 들고 움직일 간 큰 이가 어디 있겠는가?

특히나 화산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유령문이다 보니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은하표행은 강남을 제외한 다른 곳으로만 물건을 나르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유령문이 그들에게 영 협조적이질 않았다.

교대로 보내 주던 표사의 수가 점점 줄어들다 보니 요즘은 인력이 모자라 의뢰를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하다 여길 것 없네.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한낱 상인일 뿐이네. 애초에 그저 거래하는 관계일 뿐 아니었는가?”

“하지만…….”

“화산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그들을 표사로 부릴 수 있었을 리가 없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니 원망하지 말게.”

“……예.”

황종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북해는 여전히 소식이 없고?”

“예. 준비가 끝나면 연통을 준다고 했습니다만…… 작년에 화산에 물품을 댄 이후로는 벌써 일 년 동안 연락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으음.”

“그러지 마시고 사람을 보내 보심이……?”

“놔두게나. 그들의 중원에 대한 적개심은 아직 사라진 게 아닐세. 괜히 재촉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어.”

“……하지만 운남으로 차를 가지러 간 표행도 운남 사람들과 문제를 일으켜 차를 받아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단의 가장 큰 자금줄 셋이 모두 막혔습니다. 상단주님. 지금이야 벌어 놓은 돈으로 운영한다지만…….”

“알고 있네.”

황종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화산의 존재가 은하상단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고 생각한 적 있었다.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으나 운이 나빠 뻗어나가지 못하였는데, 함께 걸을 수 있는 좋은 친구를 만났다고 말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의 능력이라 생각했던 것은 그저 화산의 후광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아버님의 말씀이 맞았어.’

왜 황문약이 그토록 화산을 공경하고 조심스러워했는지 알 것 같다. 황문약은 아들이 보지 못하는 깊은 곳까지 앞서 봤던 것이다.

모든 상황을 체감하고 나니 화산에 대한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화산이 얼마나 이득이 되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자신이 화산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황종의에게 알려 주었다. 화산이 그동안 얼마나 낮은 자세로 은하상단을 대해 주었는지 말이다.

그만한 이득을 안겨 주면서도 단 한 번도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사람을 내려다본 적이 없다. 동료로서, 친구로서 예의를 잃지 않고 웃음으로 그들을 대했다.

“사람은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된다더니.”

“……상단주님.”

말없이 화산의 산문을 응시하던 황종의가 고개를 내저었다.

“돌아가자꾸나. 도장께서 세 해를 넘기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이제 곧 문을 열고 나오시겠지. 그때 왜 이리 상단을 막 굴렸냐고 혼이 나지 않으려면 쉴 시간이 있겠나?”

“……예.”

“가세.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해 봐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황종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도장.’

자꾸만 그리웠다.

갑작스레 쳐들어와 문을 박차고 술을 내놓으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던 청명의 모습이 말이다.

그때는 그저 무례하게 느꼈지만…… 이제는 안다. 서로 거리낄 것 없는 친구로 여겼기에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무례한 게 아니라 격의가 없는 것이었는데.’

이제야 청명이 찾아올 때마다 황문약이 짓던 웃음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많은 것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나서야 말이다.

“이보게, 총관.”

“예. 상단주님.”

“술을 몇 병 더 구해 주게나. 좋은 것으로.”

“예? 이미 화산이 봉문을 풀면 도장께 드린다고 열 병 넘게 챙겨 두지 않았습니까? 모두 중원에서 보기 드문 명주인데…….”

“그건 도장이 마실 술이지.”

“……하면 이번엔……?”

황종의는 대답하기 전에 이제는 조금 멀어진 산문을 돌아보았다.

“그 앞에 앉은 내가 마실 술이네.”

“…….”

“부탁하네.”

“그리하겠습니다, 상단주님.”

황종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

빈자리는 더없이 크지만 황종의는 청명을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황종의는 안다. 과거의 청명이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청명의 빈자리를 채워야 할 때라는 것을 말이다.

‘부디 대공을 이루고 나오십시오. 축하주는 얼마든지 준비해 놓겠습니다.’

한참 동안 그렇게 굳게 닫힌 산문을 바라보던 황종의가 미련이 남은 몸을 억지로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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