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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57화 (854/1,567)

857화. 화산은 강해질 테니까. (2)

“끄으…….”

“어으…….”

“……으…….”

연무장에 널브러진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다 죽어 가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많은 이들이 모조리 바닥에 뻗어 있다.

“쯧.”

유일하게 홀로 서 있던 청명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게 물든 밤하늘을 보다 슬그머니 미간을 좁혔다.

계획대로라면 해가 질 때쯤 끝나야 했을 수련인데.

묘한 얼굴로 서 있던 청명이 이번엔 바닥에 뻗어 있는 사형제들을 훑었다. 혀 차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한참 멀었다. 한참!”

“…….”

“이래서 언제 강해져?”

“…….”

“내일까지 몸 회복해 놔. 내일은 더 강하게 갈 거니까.”

그 말을 남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멍한 눈으로 멀어지는 청명을 바라보던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둘씩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윽…….”

“끄응. 더럽게 아프네.”

바닥을 짚은 손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그 간단한 일조차도 숨이 가쁠 만큼 힘겨웠다. 몇몇은 아예 일어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몇몇은 겨우겨우 일어나다가 다시 엎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지만…….

“흔츰 믈읏드. 흔츰.”

“낄낄낄낄낄.”

“저 새끼 얼굴 봤습니까, 저거?”

“약 올라 죽으려고 하던데?”

화산에 제자들이 퉁퉁 부은 얼굴로 낄낄대며 웃었다. 심지어 평소 모두가 ‘쟤는 정말 표정이란 게 있나?’ 하고 의아해할 만큼 무표정한 유이설도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채 낄낄대며 웃었다.

한 대.

결국 오늘 그들이 성공한 건 윤종의 공격 한 번이 전부였다. 그 이후로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들었지만, 늘씬하게 얻어맞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패배감이나 아쉬움을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 번 벌어진 일은 반드시 두 번 벌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바닥에 누워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던 백천이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쥐었다.

‘좁혀지고 있다.’

힘겨운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정말 힘든 것은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도 되레 거리가 벌어질 때라는 것을, 그들은 이미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는가.

“사형. 괜찮으십니까?”

백상이 다가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백천은 그 손을 맞잡고 힘겹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먼저 일어나 앉아 있던 제자들이 하나같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슨 말이라도 하라는 듯이 말이다.

백천이 작게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힘들다.”

“…….”

“하지만 그때만큼 힘들지는 않다. 아무것도 못 하고 앞에서 사형제가 싸우는 걸 구경만 할 때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잖아?”

“맞습니다, 사형!”

“예! 사숙!”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확신했다. 이 수련을 이겨 낼 수만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강해진다. 그리고 그때는 두 번 다시 그런 굴욕 따위 겪지 않게 될 거다.”

사형제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이 씩 웃었다.

“내일은 내가 저 새끼 목을 딸 거다.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거.”

“아니, 제가 딴다니까요!”

공연한 입씨름을 하던 화산의 제자들이 동시에 낄낄대며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 모두가 도로 그 자리에 뻗듯이 드러누웠다. 웃어 댔더니 몸을 세우고 있을 힘마저 빠져 버린 것이다.

‘숙소로…… 가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연무장에 드러누운 백천은 멍한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달이 오늘따라 이상할 만큼 밝다.

‘나는 강해질 거다.’

그리고 언젠가는…….

멍하니 달을 바라보던 백천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무장에 누운 이들이 대부분 죽은 듯한 잠에 빠져들었다.

히죽거리며 곤히도 잠든 그들을 향해, 잠시 후 몇몇 이들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끄응. 놈들도 참…….”

“조용히 해라.”

현상이 운검에게 엄히 주의를 주고 명했다.

“애들 깨지 않게 조심해서 숙소로 옮겨라.”

“예.”

“근육이 많이 뭉친 애들과 내상이 깊은 애들은 추궁과혈 해 주고.”

“예, 장로님.”

운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도 자기는 글렀군.”

“아까 낮에 조신 거 알고 있습니다, 사형.”

“그건 존 거지.”

백천을 안아 든 현종이 조용히 그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엉망이 된 얼굴에 시체처럼 늘어져 있지만, 표정만큼은 편안해 보였다.

‘……녀석들.’

안아 든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서 옮기자꾸나. 밤바람이 차다.”

“예, 장문인.”

백매관에 제자들을 눕힌 장로와 운자 배들이 이곳저곳을 돌며 제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현종도 바쁘게 움직이다가 손이 빌 때가 되어서야 백매관을 나섰다.

백매관 정문에 선 그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뒤따라 나온 현영의 물음에 현종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작게 말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어떤 생각 말씀이십니까?”

“달은 외롭겠구나, 하고.”

하늘 가운데 뜬 밝은 달을 담은 현종의 눈에 얼핏 쓸쓸함이 스쳤다.

“밤길을 걷는 나그네도 저 달빛 덕에 길을 잃지 않을 수 있고, 달은 참 고맙지. 한데 정작 그 고마운 달은 세상을 비추기 위해 저 어두운 밤하늘에 홀로 떠 있지 않으냐.”

“장문인…….”

“누군가를 비춰 준다는 것은 참으로 고독한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뒷짐을 진 현종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던 현영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장문인.”

“……음?”

“달이 왜 외롭겠습니까. 저리 별이 많은데요.”

마침 구름이 걷히고, 하늘을 가득 뒤덮은 별들이 현종의 눈에 환히 들어왔다.

“물론 달과 별은 다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함께 뜨지 못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달도 별에게 위안을 받을 것이고, 별도 달에게 위안을 받을 것입니다.”

“…….”

“그리고 여기선 우리가 그 달을 바라봐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겁니다.”

현종은 뒷짐 진 손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그렇구나.”

“…….”

“그러면…….”

현종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그래……. 그러면 좋겠구나.”

* * *

“으…….”

청명이 어깨를 움켜잡고 신음했다.

“……망할 놈들이.”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안 아픈 곳이 없다.

물론 오늘 제대로 얻어맞은 건 딱 한 번뿐이다. 하지만 무인의 싸움이라는 건 검이 닿았느냐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검기를 일으켜 휘둘러 대는 싸움은 기파만으로 살이 뭉개지고 내부가 진탕한다.

검기와 검기가 맞닿는 전투를 해 뜨기 전부터 새벽까지 반복했더니, 전신이 으스러진 것처럼 아팠다.

‘그때 같군. 베인 상처만 없을 뿐이지…….’

생각하기도 싫은 옛 전쟁의 기억을 떠올린 청명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예전이었다면 고개를 내저어 기억을 떨쳐 버리려 했겠지만, 이제는 굳이 그러지 않는다.

직시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으니까.

‘아직 멀었어.’

이 모든 수련은 저들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저 저들만 강하게 만들 것이었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화산이 강해지는 것. 그리고 그 화산 안에는 당연히 청명도 포함되어 있다.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도 화산의 일원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화산을 강하게 만들고 싶다면, 한 발 떨어져서 후손들을 이끌 것이 아니라 그 역시 화산의 일원으로서 함께 강해져야 한다.

전보다 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더!

청명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하여튼 진짜.’

잔챙이들이지만 그럭저럭 도움이 된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무지막지하게 도움이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 어디를 간다 한들, 맹렬한 살기를 띤 이들이 백여 명 넘게 그에게 달려들어 주지는 않을 테니까. 그것도 저렇게,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몇 번이고 일어나 다시 달려들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수련은 과거의 화산에서도 불가능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지금 같은 수준에 오르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었을 수련. 이제야 의미를 가지게 된 수련이다.

거칠게 말하고 비웃었지만, 한마음으로 달려드는 화산 제자들은 그에게 확실한 위협이 되어 주었다. 잠시나마 과거의 전쟁을 떠올릴 정도로 말이다.

덕분에 지금 청명은 옛 감각을 빠르게 되찾아 가고 있다. 그가 가장 날이 서 있었던 그때의 감각을.

그런데…….

“그런 나보다 더 빨리 강해진단 말이지?”

청명이 옆구리를 문질렀다.

윤종의 목검이 남긴 둔통이 아직 옆구리에 남아 있다.

청명조차도 사실 그들이 정말로 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 다만 해야 하니 묵묵히 했다. 그런데 지금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분명 할 수 있다고 그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애송이들 주제에.”

청명은 그들의 면면을 하나씩 떠올리다 피식 웃었다.

자꾸 기대를 하게 된다.

청명의 예상조차 뒤틀 만큼 저 말도 안 되는 끈기로, 이 지독한 수련을 모두가 버텨 낸다면.

저들은 대체 어디까지 강해질까?

그리고 그런 저들을 끝까지 버텨 낼 수 있다면,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얼마나 더 다가갈 수 있을까?

“하여튼 황당한 놈들이라니까.”

은근한 기대감과 기분 좋은 충족감이 전신을 감고 돌았다.

“읏차.”

청명은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야야. 아야. 아이고.”

바닥에 닿자마자 등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몸이야 고통을 호소하지만, 마음은 되레 편해졌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서 조금이라도 화산에 이득을 가져오려 애를 쓰던 때에 비하면 훨씬 더.

그러니까…….

“그렇게 애처로운 얼굴로 있지 좀 말라고요, 망할 사형.”

청명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화산은 내가 반드시 강하게 만들 거예요. 아무도 죽지 않게 만들 거고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 지금 사형이 있다고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요. 약해 빠져 가지고는.”

청명이 히죽 웃었다.

“사형은 모를 겁니다. 저 병아리 같은 놈들이 어떻게든 나를 따라오겠다고 악착같이 구는 걸 지켜보는 게 어떤 심정인지.”

그는 은은하게 그를 비추는 달을 보다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야 내가 사형보다 더 아는 게 하나는 생겼네요.”

아직도 많이 그립다.

예전 화산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그의 안에 짙게 남았다.

하지만…….

“지금 저놈들도 진짜 끝내주거든요?”

청명은 누운 채로 손을 뻗어 활을 잡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허공의 시위를 느긋하게 당겼다.

“슈웅.”

달을 향해 활을 쏘는 시늉을 한 청명이 빙긋 웃었다.

“이제 화산을 예전처럼 만들겠다는 말은 안 해요.”

그럴 수도 없으니까.

“대신 옛날보다 더 대단한 화산을 만들어 줄 테니까 잘 지켜나 보세요.”

청명이 천천히 눈을 감는다.

산 위에서 불어온 바람이 어깨를 스쳐 지나간다. 시간은 많이도 흘렀지만, 사람도 바뀌었지만, 화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달라진 게 없다.

‘화산은…… 강해질 테니까.’

이내 청명의 입술 새로 낮은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새어 나왔다.

쌔액. 쌔액.

기진맥진하여 잠든 청명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과거 그가 매화검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때엔 지어 본 적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가.

깊은 잠에 빠진 그를,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매화향이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어둠이 물러가면 해가 뜨고, 해가 지면 다시 달이 떠오른다.

봄의 끝자락을 지나 여름이 다가오고, 겨울이 다시 돌아온다. 계절이 순환한다.

그렇게,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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