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5화. 그냥 나왔는데요? (5)
콰앙!
윤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진다.
평소 같으면 날아가는 윤종을 얼른 받아 주었을 조걸이지만, 지금은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니, 그 독기 가득 찬 눈에는 지금 윤종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지도 모른다.
“으아아아아앗!”
조걸이 기합을 내지르며 청명을 향해 일직선으로 치고 들어갔다.
폭풍과도 같은 검기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더없이 쾌속하고 독랄하기까지 한 검기. 아무리 진검이 아니라 목검으로 일으킨 거라고 하지만, 어쨌든 사형제에게 쓸 만한 검기는 아니었다.
파아앗!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런 조걸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돕고 있었다.
유이설이 섬전처럼 몸을 날려 청명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 앞쪽은 조걸, 뒤쪽으론 유이설이 공격해 들어오는 상황.
살벌한 검기가 동시에 날아들었지만, 정작 청명의 눈빛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조걸의 폭풍 같은 검기가 청명의 앞쪽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채 매화로 화하기도 전에 청명의 검이 그 검기 사이로 파고들었다.
카강! 카가강!
삽시간에 밀고 들어간 검이 순간적으로 뒤틀리며 검기를 헤집었다.
따아아아악!
그리고 검을 전개하는 조걸의 팔꿈치를 정확하게 찔렀다.
눈부시게 흩뿌려지던 검기가 일순 사라지며 조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파앗!
이어지는 눈부신 쾌검.
“큭!”
조걸이 제 목으로 날아드는 검을 어찌어찌 막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그의 검이 화산에서 가장 빠른 축에 들기 때문이었다.
하나.
딱!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조걸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의 목으로 날아들던 검에는 힘이 조금도 실려 있지 않았다. 조걸의 검을 맞닥뜨리자 몽둥이에 부딪힌 젓가락처럼 맥없이 뒤로 튕겨 나갔다.
그 대신 검을 잡은 청명의 주먹이 조걸의 턱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콰앙!
턱을 직격당한 조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청명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던 유이설이 이를 악물었다.
적절하게 합공해 들어갔다고 생각했건만, 그녀가 채 검을 찔러 넣기도 전에 조걸이 무너진 것이다. 유이설은 경공에 박차를 가하며 빠르게 달려들어 일말의 주저도 없이 청명의 등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가공할 검기를 품은 검이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덥석.
청명이 쓰러지는 조걸의 멱살을 잡고 그의 다리를 차올렸다. 순간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며 조걸의 몸이 유이설의 검 앞에 불쑥 나타났다.
“허!”
기겁한 유이설이 황급히 검을 뒤틀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웬만해서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는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쇄액!
필사적으로 뒤튼 검이 조걸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조금만 늦었으면 목검이라 해도 몸에 바람구멍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도할 틈 따위는 없었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조걸의 몸이 유이설을 덮쳐 왔다. 유이설의 눈이 순간적으로 뒤흔들렸다. 의식을 잃은 조걸을 피하자니 조걸이 크게 다칠 것 같고 그렇다고 받아 내자니 조걸의 뒤에 있을 청명이 무슨 짓을 할지 두렵다.
하지만 고민은 길 필요가 없었다.
파앗!
조걸의 몸이 더 가까이 닿기도 전에 어느새 앞으로 돌진해 온 청명이 그녀의 명치를 걷어차 버렸기 때문이다.
콰앙!
유이설의 몸이 태풍 맞은 바람개비처럼 날아갔다.
“이…… 망할!”
그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달려든 이는 다름 아닌 혜연이었다. 불자답지 않게 두 눈에 핏발을 모조리 세운 혜연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는 악귀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소림의 나한권.
공명정대하고 무엇보다 기본에 충실한, 천하 모든 권학(拳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나한권이 살기를 싣고 청명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차가운 시선을 돌린 청명이 목검을 쭉 뻗고는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리고.
파아아아아앗!
순간적으로 검이 수십 개로 분열한다 싶더니, 무수한 검기가 혜연을 향해 쏟아졌다. 수십이 기백이 되고 기백이 더는 셀 수 없이 불어나기까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혜연이 두 눈을 부릅떴다.
나한권은 중(重)의 묘리를 담은 무학이다. 그 무거움만큼 변화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순간적으로 수많은 검기가 덮쳐 오니 손발이 어지러워진 것이다.
관음수(觀音手)라면 어렵지 않게 받아 낼 수 있었겠지만, 몸에 담은 나한권의 기운을 관음수로 전환할 여유가 없었다.
“큭!”
혜연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휘두른다.
‘막아 낼…….’
따악! 따악! 따악! 따악!
그 순간 날아든 검기가 내뻗은 그의 손목을 연이어 강타했다.
혜연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고통 때문이 아니다. 지금 그를 때린 것이 목검이 아니라 진검이었다면 지금쯤 그의 손목이 걸레짝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혜연은 내뻗은 주먹을 회수하고 진각을 내밟았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황금빛의 불광(佛光)으로 뒤덮였다.
하나.
빠아아아악!
혜연의 입에서 피가 울컥 솟구쳤다.
어느새 청명의 검이 그의 단전을 누르고 있었다. 혜연은 무감정한 청명의 눈이 저를 차갑게 힐난하는 것 같다 생각했다.
“쿨럭.”
혜연이 한쪽 무릎을 꿇으려는 순간, 몸을 빙글 돌린 청명의 발이 그의 턱에 작렬했다.
콰앙!
쏜화살처럼 날아간 혜연은 연무장을 넘어 담벼락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턱.
발을 내린 청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아직!”
들려오는 목소리에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백천이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쩔뚝대며 힘겹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이다. 아직…….”
목검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린다.
진검을 처음 잡은 이도 저리 손을 떨지는 않을 것이다. 퉁퉁 부은 얼굴과 흘러나오는 피, 건사하지 못해 떨리는 몸은 지금 백천이 한계를 넘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사정 따위는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파앗!
청명이 섬전이 되어 백천을 향해 쇄도했다.
동시에 백천의 두 눈이 새파란 살기를 머금었다.
“으아아아아아앗!”
그의 검이 붉은 매화를 줄기줄기 뿜어냈다. 대체 그 몸 어디에 아직 이런 기운이 남아 있는지 놀랄 만큼 선명한 매화.
하지만 뒤이어 백천이 본 광경은 그의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일직선으로 날아든 청명은 검을 휘두르는 대신, 검을 잡지 않은 좌수를 뻗어 냈다.
붉게 물든 그의 좌수가 허공에 선명한 매화의 문양을 그려 낸다 싶더니, 이내 백천이 그려 낸 매화를 단번에 위쪽으로 쳐올렸다.
“큭!”
순간 드러난 청명의 목을 향해, 백천이 반사적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청명은 그 광경을 빤히 지켜보다가 제 목에 검이 거의 닿을 지경이 된 순간 가볍게 고개를 틀었다.
덥석.
그러더니 검을 잡은 백천의 손목을 단번에 낚아채어 위로 뒤집었다.
“끄극!”
손목이 완전히 돌아가 버린 백천의 몸이 뒤틀렸다.
감정이라고는 없는 청명의 눈이 이를 악물고 있는 백천을 응시했다. 일그러진 백천의 두 눈엔 아직 항전에 대한 의지가 가득했다.
하나.
쾅!
이내 백천의 얼굴에 청명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콰앙!
또 한 번.
콰앙!
또 한 번.
백천의 몸이 썩은 짚단처럼 허물어지는 순간, 청명이 그의 가슴을 걷어차 날려 버렸다.
시체처럼 힘없이 날아간 백천이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연무장에 있는 이들 중 아무도 그런 백천을 돌봐 주러 가지 않았다.
“뭐 해, 이 새끼들아!”
청명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순간, 뒤쪽에서 검을 겨누고 있던 이들이 이를 악물고 우르르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
“죽어, 이 새끼야!”
청명의 눈빛이 차게 빛난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이들 사이로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순식간에 세 사람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제 머리를 향해 날아들던 검을 목을 뒤틀어 피해 낸 청명이 손을 뻗어 사형제의 목을 움켜잡았다.
“컥!”
그대로 들어 올린 채 앞으로 돌진하며, 잡은 이의 배를 연이어 목검으로 찔러 댔다. 단번에 십여 격을 얻어맞은 이가 눈을 까뒤집었다.
빙글.
몸을 돌려 낸 청명이 제 뒤를 쫓아오는 사형제들을 향해 들고 있던 이를 집어 던졌다.
달려들던 이들이 좌우로 몸을 날리는 순간 그의 검이 허공에 붉은 매화를 연이어 그려 냈다.
그 결과는 굳이 말할 이유도 없다.
“으아아아아아아!”
그때 호시탐탐 틈을 노리던 곽회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곧장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전개하려던 그의 어깨를 청명의 목검이 콱 틀어막았다.
콰득!
“끄윽…….”
곽회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하지만 청명은 곽회의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쾅!
그리고 곽회의 발등을 짓밟아 고정했다. 연이어 날아든 청명의 어깨가 곽회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콰앙!
발을 밟혀 튕겨나가지도 못한 곽회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의식을 잃어 가는 그의 귓가에 청명의 일갈이 매섭게 박혔다.
“의욕만으로 이길 수 있으면 누가 노력하냐, 이 머저리 새끼야!”
털썩.
끝내 쓰러진 곽회를 내려다보던 청명이 고개를 들었다.
“…….”
그런 그를 마주한 이들은 차마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청명이 강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는가?
하지만 그 강함을 아군으로서 실감하는 것과 적으로서 실감하는 것 사이에는 말도 안 되는 거리가 있었다.
눈을 마주하면 오금이 저리고, 빙굴에라도 떨어진 듯 심장이 싸늘해졌다.
“다음.”
청명의 입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항상 패기로 넘치던 화산의 제자들이지만, 누구도 쉽사리 그런 청명을 향해 달려들지 못한다. 마치 범을 둘러싼 들개들처럼 눈치만 보며 으르렁댈 뿐이었다.
어두운 눈빛으로 그 양을 보던 청명이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리고 막 이죽거리려는 찰나.
질질질.
누군가의 발이 끌리는 소리가 청명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목검을 지팡이 삼아 짚은 조걸이 힘겹게 걸어오는 모습이 청명의 두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조걸이 히죽 웃었다. 잔뜩 피에 젖은 그 이를 본 청명의 입꼬리도 살짝 말려 올라갔다.
“한참 멀었어, 이 새끼야.”
쓰러져 있던 유이설도 몸을 벌떡 일으킨다. 잠깐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지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이 청명에게 고정되었다.
화아아악!
이내 그녀의 몸에서 일순간 숨이 막힐 만큼 대단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어느새 일어선 조걸과 당소소, 윤종과 곽회도 이를 악물고 청명을 포위하며 걸어왔다.
그리고.
쿵!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퉁퉁 부어오른 백천 역시 검을 내리찍으며 일어났다.
백천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해가 중천이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군.’
그렇다는 건 앞으로 이 짓을 열댓 번은 더 할 수 있다는 소리다.
“흐…….”
목검을 부러지도록 부여잡은 백천이 기괴하게 웃으며 청명을 향해 발을 뗐다.
한 번으로 안 되면 열 번. 열 번으로 안 되면 백 번.
천 번, 만 번 싸우고 또 싸우면 그만이다. 그럼 언젠가는 그가 원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터.
“죽여 버려!”
백천의 고함과 함께 주춤대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악을 쓰며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흐아아아아아아!”
“죽어어어어어!”
자신을 향해 죽어라 달려드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청명의 눈이 가라앉았다.
“애송이들이…….”
목검을 돌려 잡은 청명의 눈이 싸늘해졌다. 그는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잠시 후 그의 몸이 빛살로 화해 백천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