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853화 (850/1,567)

853화. 그냥 나왔는데요? (3)

백천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그런 그의 건너편에는 청명이 서 있었다.

저놈은 백천의 맞은편에 설 때마다 언제나 느슨하게 반쯤 풀린 얼굴로 귀찮다는 기색을 팍팍 풍겨 대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중단세로 검을 잡은 청명의 몸에선 묵직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백천을 응시하는 두 눈은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심이라는 건가?’

백천이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맥없이 지고 싶지도 않았다.

땅을 움켜잡을 듯 발끝에 힘을 주고, 손목의 힘은 풀었다.

‘가진 바를 완전하게!’

그리고 그 순간 청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놀랄 틈도 없이 백천은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바닥을 모조리 쓸어 오는 검기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아앗!

청명은 서로 맞부딪히는 매화검기를 단숨에 뛰어넘어 백천을 향해 쇄도했다. 하늘을 향해 높이 치켜들어진 검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쇄애애애액!

검이 단숨에 내리쳐졌다.

자신의 머리를 갈라 오는 검의 기세에 백천이 기겁하며 검을 들어 가까스로 머리 위를 막아 냈다.

하나 그 순간.

검과 검이 맞닿기 바로 직전에 청명이 손목을 접으며 검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뭣?’

그 순간 백천의 눈에 허공을 가르는 제 검과, 그를 향해 겨누어진 암매검의 검파(劍把 : 검 손잡이 끝부분)가 화인처럼 새겨졌다.

파아아앗!

맹렬한 기세로 그의 눈을 향해 검파가 날아들었고, 이내 세상이 검게 변할 듯 뒤덮어 왔다.

우뚝.

“…….”

탁.

바닥에 내려선 백천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청명의 검파가 그의 눈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마지막에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내리찍었다면 지금쯤 그의 눈은 볼 것도 없이 터져 버렸을 것이다.

스르릉.

거둬들인 검을 납검하는 청명을 멍하니 보던 백천은 얼굴에 흐른 땀을 소매로 훔쳤다. 그리고 정중하게 포권 했다.

“……잘 배웠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가볍게 예를 표해 준 청명이 몸을 돌리며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제자들을 훑어보았다. 화산의 제자들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이곳을 에워싸고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봤어?”

“…….”

“느낀 점.”

화산의 제자들이 모호한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기는 했지만, 이 전투에서 무엇을 보았어야 하는지는 쉽게 그 답을 내놓기 어려웠다.

“그…… 우린 아직 멀었다?”

조걸이 짜낸 대답을 들은 청명이 피식 웃고 말았다.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어깨를 으쓱한 청명이 말을 이어 갔다.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방식의 문제야.”

“방식?”

“그래, 방식.”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청명이 백천을 돌아보았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싫지만, 사숙의 실력은 뛰어난 편이야. 이제 강호 어디에 가서도 일류 검수 취급은 받을 수 있지.”

무당의 이대제자를 상대로 승리하고, 저 장일소와의 싸움에서도 거들고 나섰던 백천이다. 이제는 백천에게도 후기지수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청명의 평가가 박한 편이다.

“하지만 그래서 강한가?”

질문을 던진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실력이 뛰어나지만 강하지는 않다니.

“이건 정파의 검이 가진, 그중에서도 도가의 검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지. 도가의 검은 도를 깨우치기 위한 목적일 뿐이야. 검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지.”

청명이 다시 검을 뽑는다.

“그렇기에 정직하다.”

위로 들렸던 검이 천천히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물론 도가의 검에도 상대를 이기기 위한 여러 가지 수법들이 들어가 있지. 하지만 저 사파 놈들이나 마도 놈들처럼 오직 그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야. 기본적으로 도가의 검은 수양의 방편이니까.”

“아…….”

조걸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면 조금 전 서로 매화를 마주 피워 냈을 때, 백천은 그 검 자체에 집중했던 데 반해 청명은 매화를 시선을 끄는 데 사용하고 아래로 검을 뿌려 다리를 노렸다.

마지막 순간 검이 맞부딪힐 때도 마찬가지다.

백천은 정정당당하게 검과 검의 힘으로 승부하려 했던 반면, 청명은 그 힘을 상대해 주지 않고 검 손잡이로 백천의 눈을 노렸다.

이건 화산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수법이다.

“실전은 가혹해.”

청명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물론 화산의 검은 그 자체로 훌륭하지. 하지만 화산의 검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것도 있어. 세상 어느 검문도 쓰러진 자가 다리를 잡고 늘어질 때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 등 뒤에서 제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찌르며 들어오는 이를 상대할 방법을 가르치지 않아.”

“…….”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검이 아니라, 수양을 위해 존재하는 검의 한계다.”

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번에 장일소를 상대하면서 똑똑히 느꼈다. 가진 바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적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내고 죽겠다고 달려드는 악의(惡意) 앞에서 무력감까지 느꼈으니까.

“그런 걸로는 만인방을, 사패련을 상대할 수 없어.”

그리고…… 훗날 이들이 싸워야 할 마교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화산은 자신이 수련한 검을 정직하게 사용했다. 심지어 마교와의 전쟁 초창기까지도.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전투와 전투가 쌓여 가면서 그들의 검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좀 더 실전적으로, 그리고 좀 더 과격하게 바뀌어 갔다.

만약 그 전쟁을 겪은 이들이 여럿 살아남았다면, 화산의 검은 어쩌면 크게 변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변한 화산의 검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후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그럼…….”

윤종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가 그걸 배워야 한다는 거냐?”

그 말을 들은 청명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겁을 먹었다라…….’

유이설의 말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다.

이건 냉정하게 말해 화산의 검이라기보다는 청명의 검이다. 숱한 실전 속에서 정립된 청명의 검. 그리고 후대로 전한다 해도 화산의 본질이 흐트러지진 않을 거란 검증이 없는, 사특한 검술이다.

그렇기에 내도록 망설였다.

그간 스스로 느낀 매화검법의 단점을 보완해 전하기는 했지만, 그건 원론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한 지독한 살기 품은 검을 전수한 건 아니다.

애초에 화산의 검이 그러하기에, 지난 화산의 장문인들은 제자들이 정도를 잃지 않게 해 왔다. 그 검 끝에 조금만 살기가 묻어나도 문파의 정기가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청명이 하려는 것은 그 반대의 일이다.

그토록 화산의 정기를 다시 세우기 위해 애썼던 청명이 지금에 와서 그 화산의 정기가 흐려질지도 모를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청명은 살짝 입술을 깨문 채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배워야 해.”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삼 년이라는 시간 안에 이들 모두가 극의(極意)에 오를 수 있다면 굳이 이런 검술을 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상황이 이토록 급박하게 흐르지 않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느긋하게 모두를 화산의 정도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도 달라졌다.

전화(戰火)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고, 그 전쟁을 완전하게 피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청명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

틀린 것은 언제고 바로잡을 수 있다. 정기가 쇠해도 다시 살려 낼 수 있다.

사람만 있다면.

그 뜻을 이어 갈 사람만 있다면, 언젠가 화산은 자신이 본디 있어야 할 곳을 찾아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도란 결국 물과 같은 것이니까.

청명이 해야 할 일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높은 도를 화산에 전수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의지를 가진 이들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 사형제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실전검술이라…….”

백천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 재밌겠네.”

청명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쉽게 생각하지 마. 실전 검술이 실전 검술로 불리는 이유는 혼자 검을 휘두르는 걸로는 익힐 수 없기 때문이야. 차라리 전장에 나가서 칼에 찔려 죽는 게 낫겠단 소리가 입에서 나오게 될걸?”

“그럼 더 재밌겠네.”

백천이 검을 들어 올렸다.

“이리저리 설명해 댈 것 없어. 어차피 각오는 충분하게 했으니까. 차라리 이럴 시간에 칼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청명이 말없이 백천을 바라본다.

백천은 조금 전 지독한 패배를 경험했다. 아마 검파가 제 눈을 향해 날아드는 순간에는 죽음과도 같은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청명이 그렇게 의도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백천의 두 눈에는 단 한 점의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는다.

“…….”

청명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괜한 걱정을 한 건지도 모르겠군.’

새삼 알게 된다.

이들은 청명이 아니다.

청명이 그 극한의 상황에서 악귀 같은 검을 익혀 냈다 한들, 이들이 그와 같을 이유는 없다.

이들은 청명보다는 훨씬 도사답고, 청명보다 훨씬 정도를 걷는 이들이니까.

자신이 화산의 미래를 잘못 결정할까 봐 걱정하는 건 그저 오만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화산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이들 모두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지?”

“……뭐, 간단해.”

백천의 물음에 청명이 피식 웃는다.

“오늘만 일단 한 백 번 정도 죽으면 돼.”

“…….”

“그럼 살고 싶어서라도 악착같이 검을 휘두르게 될 테니까.”

그극.

검으로 바닥을 긁은 청명이 악귀 같은 얼굴로 백천을 노려봤다.

“입으로 떠드는 건 쉽지. 어디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볼까?”

“해 봐, 이 새끼야.”

“오줌이나 지리지 말라고!”

청명이 과격한 살기를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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