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2화. 그냥 나왔는데요? (2)
“……봉문이라고 했느냐?”
“예.”
은하상단의 상단주인 황문약이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얼굴로 황종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화산이 봉문을 했다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듯 다시 묻고도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황종의 역시 제 아버지의 그런 반응을 십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양입니다.”
“지금 나더러 그걸 믿으라는 말이냐?”
“……저도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이미 확인을 해 보았습니다. 결코 닫히지 않을 화산의 산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황문약의 주름진 눈이 부릅떠졌다.
“그러니까…… 진짜로 화산이 봉문을 했다는 거지? 그 화산이? 내가 아는 그 화산이?”
목소리에 불신이 한가득했다. 황종의는 심각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섬서는 물론이고 천하에 그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확실하겠지. 확실할 텐데…….”
“…….”
“확실해야 하는데…….”
황문약은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안고 시선을 돌렸다.
촵촵촵촵촵촵촵.
“그럼…….”
촵촵촵촵촵촵촵.
“……이건 대체 뭔 일이냐?”
그는 거하게 차려진 밥상을 폭풍처럼 비우고 있는 한 사람을 떨리는 눈으로 보았다.
봉문이 사실이라면…… 그럼 이 양반은 여기 있을 수 없는 사람인데……?
‘귀신인가?’
촵촵촵촵촵촵촵!
커다란 오리 다리 하나를 씩씩하게 뜯고, 옆에 놓인 술까지 단숨에 비운 청명이 쿵 소리와 함께 술병을 내려놓았다.
“크으. 이제 좀 살겠네.”
“…….”
“역시 음식은 나와서 먹어야 한다니까. 쯧. 화산 조리장들을 바꾸든가 해야지. 밍밍해서 원.”
황문약은 청명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도장.”
떨떠름하게 부르자 청명이 왜 부르냐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네?”
“방금…… 제가 들은 말이 그…… 사실입니까?”
“어떤 거요? 봉문이요?”
“예. 그, 화산이 봉문을 했다는…….”
“맞아요. 이거저거 다 귀찮아서 그냥 봉문 해 버렸어요.”
그 순간 황문약이 어떤 의문을 품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요?”
아니…… 때로는 설명할 필요가 있는 인간도 있다.
“보, 봉문을 하셨는데, 도장께선 여기에 어떻게……?”
“아, 저요?”
“예.”
“그냥 나왔는데요?”
“…….”
황문약이 빙그레 웃었다.
‘그냥 이해를 하려고 하지 말자.’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하는데……. 왜 겪을 때마다 그러질 못해서 같은 일을 반복한단 말인가. 사람이면 적응할 줄도 알아야지.
하지만 황종의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보, 봉문 한 게 사실이라면 나와 계시면 안 되는 것 아니십니까?”
“저요?”
“예.”
“왜요?”
“…….”
그 왜요를 왜 댁이 저한테 묻습니까? 댁이 대답을 해야지!
다시 술을 꼴깍꼴깍 마셔 댄 청명이 크으 하고 입가를 닦은 뒤 입을 열었다.
“아니. 뭐 우리가 죄지어서 봉문 한 것도 아니고. 귀찮으니까 여기저기서 찾아오지 말라고 봉문 하는 건데, 못 나올 것도 없잖아요?”
“……아, 아니. 그래도 봉문이라는 게.”
“에이, 다 그런 거예요. 봉문 한 양반들 중에서 그거 죽어라 지키는 사람들 몇이나 된다고. 보나마나 저 종남 새끼들이나 이번에 봉문 한 무당 새끼들도 야밤에 대충 보자기 뒤집어쓰고 나와서 구석에서 술 처먹고 들어가고 할걸요? 내가 장담한다, 내가.”
“…….”
“그러니까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시고.”
“……예.”
그래. 차라리 그냥 넘어가는 게 속이 편하다.
“여하튼 그리됐으니까 화음에 있는 사업장 잘 관리해 주시고, 북해랑 통하는 무역로도 제대로 관리 좀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은하표행 문제는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땐 당가 쪽에서 나서 주기로 했으니 문제 생기면 도움 청하시면 돼요.”
“예.”
“그리고 화산에 식자재 넣으실 때, 고기 꽉꽉 채워 넣어 주시고……. 그, 음……. 그…….”
청명이 말끝을 질질 늘이며 뜸을 들이다 ‘굳이 내가 이걸 말로 해야겠냐?’ 하는 눈빛을 보냈다. 황종의가 처연한 얼굴로 입을 뗐다.
“……술은 계속 평소 숨겨 두던 곳에다가 채워 놓겠습니다.”
“하. 하. 하. 핫. 그러실 것까진 없는데, 이게 봉문 해서 밖에 나올 수 있는 몸도 아니니, 아이고. 술이 썩겠네, 썩겠어!”
“……그럼 좀 줄일까요?”
“예?”
“아, 아니, 썩는다고…….”
“예?”
“……더 많이 가져다 두겠습니다.”
“크으. 뭐 굳이 그러시겠다면야.”
청명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맛을 다시다 말했다.
“아, 그리고 당가에서 물건이 올 거예요. 북해에서도 화산에 전하는 물건이 올 거고요. 그 물건들이 당도하면 봉문 여부와 관련 없이 화산에 가져다주세요. 은하상단은 들어올 수 있게 해 둘 테니까요.”
“그리하겠습니다.”
이것저것 당부를 마친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종종 놀러오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사실은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봉문이 풀릴 때까지는 다시 들르기 어려울 거예요.”
“으으음.”
“벌여 놓은 일이 많아서 걱정이 되기는 하는데, 다들 잘해 주실 거라 믿어요.”
황문약이 빙그레 웃었다.
“도장께서는 염려 마십시오.”
“그런데…….”
청명이 신기하다는 듯 황문약을 바라보았다.
“왜 봉문 했는지는 안 물어보시네요? 보통은 그걸 궁금해할 것 같은데.”
황문약이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저희 같은 사람은 들어도 모릅니다. 이(利)를 좇는 이들이 도(道)를 좇는 분들의 속내를 어찌 알겠습니까.”
“…….”
“그저 도장께 대의(大意)가 있다고 여길 뿐입니다.”
“딱히 그런 건 없는데.”
청명이 뒷머리를 긁적거리자 황문약이 나지막이 웃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잘 처리하겠습니다. 서안에 있는 화영문과도 잘 협조하여 속가문파를 늘리는 데도 어려움이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아, 그러네요. 그것도 부탁드려야겠네.”
“그런 사소한 일은 도장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도장께서는 그저 뜻을 관철하시면 됩니다. 그 뒷수습을 하는 게 저희 같은 사람들이지요.”
“겸사겸사 돈도 벌고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잘 아시는군요. 하하하.”
황문약이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도장.”
“네?”
“도장께서 나타나신 후로 서안과 화음은 물론이고, 섬서 전체에 활기가 돌고 있습니다. 특히나 화음 사람들의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에이. 제가 뭘 했다고.”
“그리고 도장 덕분에 은하상단도 날개를 달았습니다.”
황문약이 청명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왜 이러세요, 갑자기!”
화들짝 놀란 청명이 얼른 황문약을 일으키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은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진정으로 감사를 표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감사는요, 뭘. 우리 사이에.”
황문약이 미소를 지으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래된 인연도 아니다. 불과 몇 년 본 사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몇 년이 황문약을 살렸고, 삶을 바꾸었으며, 심지어는 은하상단의 미래를 바꾸었다.
그게 다 저 사람이 나타나 준 덕분이다.
황문약의 따뜻한 시선을 받은 청명은 어색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하튼 그러니까 잘 부탁드릴게요. 특히나 서안 쪽 관리 잘해 주세요. 저 없는 동안 종남 새끼들이 봉문 풀고 나와서 패악질을 할지도 모르니까요.”
“물론입니다. 이제 은하상단의 힘도 약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서안에 있는 화산의 속가들과, 화산에 줄을 댄 문파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거면 충분해요. 그럼.”
청명이 술병을 달랑 들고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문고리를 잡고도 바로 열지 않고 살짝 주춤하며 뜸을 들였다.
“그…….”
“예, 도장.”
“걱정 마세요. 화산과 은하상단은 좋은 친구니까요.”
난데없는 말에 황종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황문약은 청명의 말뜻을 알아들은 듯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리 말씀해 주신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네, 그럼.”
황문약을 돌아보며 씨익 웃은 청명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나자 황종의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왜 오신 거랍니까?”
“왜라…….”
“무어라 말을 하고 가긴 했는데 딱히 알맹이가 없지 않습니까? 당부할 만한 일이기는 하나, 당부하지 않는다 해서 하지 않을 일도 아닙니다. 봉문까지 한 몸으로 굳이 밖으로 나와 할 말은…….”
“종의야. 사람의 말이라는 건…….”
“예, 아버님.”
황문약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하고 단단해지니 황종의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 껍데기보다는 안에 담긴 진의(眞意)가 중요한 법이다. 장사꾼이라면 더더욱 말에 숨어 있는 속뜻을 읽을 줄 알아야지.”
“…….”
“도장께서는 그저 인사를 하러 오신 것뿐이란다.”
“인사요? 봉문 하겠다는 인사, 말입니까?”
“아니.”
황문약이 고개를 저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다시 보지 못할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지.”
“……아, 아버님?”
황문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마음 따뜻한 분 아니더냐? 봉문을 하고 나니, 그게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이제 화산에 이 늙은이 같은 건 그리 대단한 사람도 아닐 터인데…….”
황문약은 알고 있다.
그는 아마 화산이 봉문을 풀 때까지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 이미 그는 천수를 누렸으니까.
그리고 청명도 그 사실을 미루어 짐작했던 모양이다.
“나는 더는 미련이 없다. 따지고 보면 벌써 죽었어야 할 목숨인데, 도장께서 살려 주신 덕분에 분에 넘치는 것을 많이도 보지 않았느냐.”
“아버님…….”
“걱정이 있다면, 그저 너와 상단뿐이란다. 도장께서도 짐작하신 게지. 화산이 난데없이 봉문을 한 와중에 눈을 감았으면, 내가 상단과 네 걱정 때문에 편히 가질 못했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일부러 찾아와 이리 말씀을 해 주시는구나.”
천천히 이야기하던 황문약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도기(道器)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
그는 안다.
행동이 거칠기 짝이 없는 청명의 안에, 사실은 더없이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도장이 걱정이구나.”
“……저분이 말입니까?”
“난세가 올 것이다. 세상은 벌써 바뀌고 있지.”
“…….”
“그 거친 세상에서 저 잔정 많은 분이 또 얼마나 상처를 받으실지.”
황문약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은혜를 모르면 짐승만도 못한 법이다. 종의야.”
“예.”
“은하상단의 상단주로도 물론이고, 사람으로서도 저분과 화산을 돕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걸로 됐다.”
황문약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화산과 은하상단이 천하를 호령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큰 미련이 남지 않는 것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 해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붕은 한 번을 날아오르기 위해 천년을 기다리는 법. 봉문을 풀고 나올 화산이 얼마나 높이 날아오를지 기대가 되는구나.”
“저 역시 그렇습니다, 아버님.”
“하하핫. 하지만 그 전에 도장께서 맡기신 일부터 똑바로 해야겠지. 바빠질 것이다. 서두르자꾸나.”
“예, 아버님.”
방을 나선 황문약은 청명이 나갔을 대문과, 그 위로 높이 솟은 화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고…… 꽃은 지는 게지.”
그럼에도 다시 피어날 날이 오리란 걸 알기에 지는 꽃을 슬프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보중하시길, 도장.”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남은 황문약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