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0화. 너희가 없는 화산은 화산이 아니다. (5)
“……화산이네.”
“어, 화산이야…….”
“……도착했네.”
화산의 제자들은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구름 위로 까마득하게 솟아오른 화산의 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과거 섬서를 떠났다가 돌아와 이 높은 봉우리를 보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뭉클함이 피어났다. 결국 그들의 뿌리는 저 척박한 봉우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드높은 화산의 절벽을 바라보는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뭉클함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도 볼 수가 없다.
그저 한없는 절망감만이 내려앉아 있을 뿐이었다.
“……저걸 올라가라고?”
“이 몸으로?”
“……그냥 죽여라. 그냥…… 죽여.”
화산 제자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처음 장강에서 출발했을 때, 그들의 가슴은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청명이 그들에게 한 말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만인방을 상대하며 화산의 제자들은 제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대로라면 바로 옆에서 사형제가 죽어 나가는 꼴을 두 눈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확실하게 그들을 자극했다.
덕분에 의욕은 넘쳐났고, 각오는 확실했다.
그렇기에 청명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몰아붙여 하루 만에 어마어마한 거리를 주파했을 때도 그들은 불만 한마디 입에 담지 않았다.
하지만 몸에 수분 한 방울 남지 않도록 짜내진 몸으로 숙영할 곳을 찾자마자 수련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는 두 눈이 흔들렸고…….
수련을 빙자한 구타가 시작되었을 때는 피눈물이 흘렀다.
새벽 늦게까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가 겨우 잠이 들 때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잠이 든 지 불과 한 시진 만에 걷어차여 강제 기상 하던 때엔 입에서 절로 쌍욕이 튀어나왔다.
그러기를 며칠째.
“사형……. 입에서 피 흐릅니다. 좀 닦으십쇼.”
“입술이 갈라져서 그래. 그런데 넌 얼굴이 허옇게 떴다?”
“곧 죽을 거라 그렇습니다.”
“…….”
개방 거지 새끼들이 불쌍하다고 엽전을 던져 줄 꼬락서니로 화산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눈동자에는 영혼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순간 그들은 근본적인 의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저기다 자리를 잡은 거지?”
“생각이 없나? 어? 생각이 없냐고!”
“후손들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건가? 사조께서 청명이 같은 놈이었나?”
기사멸조가 폭풍처럼 쏟아졌지만, 그 누구도 무례하다 탓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다리가 후들거리다 못해 돌부리에만 걸려도 또각 부러질 판인데, 저 말도 안 되는 절벽을 당장에 올라야 하니 입에서 욕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모두가 절망에 빠진 와중에 딱 한 사람 화색이 도는 이가 있었다.
“크으! 화산이네!”
“…….”
뒤쪽에 있던 청명의 입에서 기운 찬 목소리가 시원하게 터져 나왔다.
“길바닥에서 수련 제대로 못 해서 속이 터지던 판이었는데. 이제 좀 제대로 해 볼 수 있겠다! 벌써 군침이 싹 도네! 낄낄낄낄.”
“……저 미친 새끼.”
“…….”
이 욕이 화산의 제자의 입에서 나온 게 아니라 무려 ‘현종’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지금 이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간결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청명은 욕을 먹건 말건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화산을 가리키며 턱짓할 뿐이었다.
“뭐 해?”
“…….”
“올라가.”
“…….”
“참고로 중간에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형 놈은 밑에서부터 다시 시작이다. 제일 늦게 도착하는 서른 명도 처음부터 다시야.”
“…….”
“크으! 진즉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속이 다 씨워언하다!”
“……제발 좀 죽어라, 청명아. 제발 좀!”
“자! 출발!”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욕지거리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청명이 시원하게 앞에 있는 사형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댔다.
차라리…… 만인방에 입문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뒤늦게 해 보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철푸덕.
산문을 겨우 통과한 조걸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땅이 반갑다며 그의 얼굴을 맞아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조걸에게는 손으로 바닥을 짚을 만한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온 얼굴로 바닥과 반갑게 인사한 조걸이 움찔움찔 경련하며 입을 열었다.
“……사형.”
“…….”
“살아 계십니까?”
그러자 그의 옆에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던 윤종의 입에서 개미 소리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죽었어.”
보통 ‘세심하다’라는 말은 칭찬으로 쓰인다.
하지만 지금 화산의 제자들은 청명의 세심함에 ‘망할’, ‘개 같은’ 등의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저 망할 새끼가 어찌나 세심한지 하나하나의 수준에 맞춰서 수련의 강도를 달리했다. 덕분에 다른 제자들보다 확연히 더 강한 오검들 역시 마찬가지로 초주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 씨……. 쓸데없이 꼼꼼한 새끼.”
“……남 괴롭히는 데엔 천재적이지…….”
심지어 윤종과 조걸은 절벽에서 떨어져서 화산 아래부터 다시 기어 올라오기를 두 번이나 반복했다.
떨어질 때 누군가의 발이 얼굴을 밟은 듯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이제 와서 그걸 따져 무엇 하겠는가?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쿠우우우웅!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에, 엎어져 있던 윤종과 조걸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화산의 산문이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닫히는 모습이 두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잠가.”
쿠웅! 쿠웅!
커다란 빗장이 문을 단단히 틀어 잠갔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이 오늘따라 마치 지옥문이 닫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
“자. 이걸로 봉문은 끝났고.”
“……그걸로?”
백천의 물음에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봉문이 대단할 거 있나. 문 닫고 밖에 안 나가고 방문객 안 받으면 그게 봉문이지.”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어 댔다.
“자, 다들 기상.”
“…….”
“어쭈? 안 일어나?”
인간의 몸은 솔직하다.
머리로야 제각각 다른 의견을 품었을지 모르지만, 구르고 얻어맞고 혹사당한 몸뚱이는 들려온 목소리에 재빠르게 반응했다.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화산의 제자들이 쭈욱 도열했다.
걸레짝이 된 화산의 제자들을 둘러보며 청명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봉문이니, 미래를 대비하니…….”
자세만큼 목소리도 삐딱했다.
“뭐 그런 말 듣고는 이게 뭐 엄청 낭만적인 일인 것처럼 생각하시는 사형 분들이 계신 모양인데.”
청명이 뱀 같은 눈으로 바라보자 제자들이 움찔하며 슬쩍 청명의 시선을 피한다.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해 주셨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저기 보입니까?”
청명이 턱짓으로 닫힌 문을 가리켰다.
“……문은 왜?”
백천이 꺼져 가는 목소리로 묻자 청명이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 중에…….”
“…….”
“단 한 사람이라도 내가 원하는 수준에 오르지 못할 시에는.”
“…….”
“여러분은 이제 화산 밖을 볼 일이 없습니다. 평생 그냥 산문 안에서 저랑 오붓하게 살다 뒈지는 거예요. 예?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
“똑바로 하라고, 똑바로.”
이쯤 되면 다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생각했던 봉문과 청명이 생각한 봉문에는 중원을 가로지를 만큼의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제 안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청명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그래도 짬이 있으니 도열에 제외된 운자 배들이 앉아서 쉬고 있다가 청명의 시선을 받고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뼈마디가 굳으신 분들은 그래도 체면 문제도 있으니까, 나중에 저랑 따로 좀 이야기하시고.”
그 말을 들은 운검이 흐뭇한 표정으로 운암을 향해 말했다.
“사형.”
“응?”
“그래도 청명이가 많이 착해지지 않았습니까? 사숙조들 체면도 다 생각해 주고.”
“뭘 잘못 처먹었냐?”
“…….”
운검은 말을 잃었다. 어느새 운암이 참 많이도 거칠어졌다.
스르릉.
청명이 천천히 암매검을 뽑아 냈다. 그리고 그 검을 바닥에 찔러 넣고는 모두를 바라보았다.
“농담은 여기까지.”
“…….”
청명이 모두를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나라고 해도 실력을…….”
“아아. 빨리 늘려 줄 방법 같은 건 없다고?”
“…….”
청명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백천의 옆에 서 있던 조걸이 혀를 찼다.
“보나마나 ‘무학은 빌어먹게 정직하다. 편법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뭐 이런 말이나 해 대겠죠.”
“…….”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윤종이 근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자는 시간을 줄이고, 쉬는 시간을 줄이고, 오로지 수련하고 또 수련해야 한다고 하겠지. 지겹다. 지겨워.”
“…….”
할 말을 고스란히 빼앗겨 버린 청명이 멍한 얼굴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때 유이설이 깔끔하게 결정타를 날렸다.
“꼰대.”
“…….”
당소소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여하튼 입만 열면 사람 겁주려고 한다니까. 여기서 그런 거 모르는 사람 있어요?”
몸은 충분히 지쳤다.
하지만 몸이 지치면 지칠수록 살아나는 게 독기이리라, 독기 빼면 시체인 게 또 화산 아니던가?
“뻔한 소리를 주야장천 해 대기는.”
백천이 피식 웃었다.
“네 걱정이나 하는 게 좋을 거다. 아무리 너라고 한들 우리 전부를 감당하는 건 힘들 테니까.”
조걸 역시 맞장구치며 낄낄거렸다.
“발바닥에 땀 좀 흘려야 할 걸? 나중에 못 해 먹겠다고 울지나 마라.”
윤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도망가고 싶어도 저 문은 안 열려.”
“몸에 바람구멍 뚫어 준다. 꼭.”
유이설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도열한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눈을 부라리고 그 말에 동조했다.
“너나 조심해, 이 새끼야! 우리가 세지면 너는 무사할 것 같아?”
“지금이야 네가 하고픈 대로 하고 살지! 봉문 풀릴 때 두고 보자.”
“지금까지 쌓은 원한! 한 방에 다 갚아 줄 테니까!”
“……난 아니다, 청명아. 난 항상 고마운 마음뿐이야.”
“방금 어떤 새끼야?”
독기를 넘어 살기까지 쏟아지니 청명은 허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종이 빙그레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현종이 중앙으로 걸어오자 화산의 제자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독기 품었던 눈을 순하게 누그러뜨리고 조용히 섰다.
“과거에는…….”
고요해진 가운데 현종이 입을 열었다.
“화산의 검을 극성까지 연마한 이를 ‘매화검수’라 불렀단다.”
“……매화검수.”
“그 이름은 다름 아닌 화산이 제자에게 내리는 호칭. 매화검수의 이름을 받은 이는 천하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검이 화산의 검을 대표한다고 당당히 선언할 수 있었다 하더구나.”
화산 제자들의 눈에 선명한 빛이 어렸다.
“힘겨울 것이다. 본산 안에 갇힌 채 수련을 한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겠지. 다만…….”
현종이 모든 제자들을 한 눈에 담으며 미소 지었다.
“저 닫힌 문이 다시 열릴 때, 나는 너희 모두가 당당히 스스로를 매화검수라 칭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리될 수만 있다면, 천하의 누구도 화산의 이름을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
“예! 장문인!”
“해내겠습니다!”
들려오는 커다란 대답을 들은 청명이 혀를 찼다.
“그게 뭐 의욕만 있다고 되나.”
“저 새끼가 근데…….”
“그래도 뭐, 걱정할 건 없어.”
청명이 암매검을 움켜잡고 입가를 뒤틀었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시간이 촉박하다. 저 노란 병아리들을 독수리로 만들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해낸다.’
과거의 화산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천하 모든 곳에 이들이 피워 낸 매화가 만발하도록 만들 것이다.
“시작하자고. 우는소리 해도 안 봐줄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
청명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정상에서 봉우리를 타고 내려온 선선한 바람이 화산을 부드럽게 감싸고 다시 산 아래로 퍼져 나간다.
매화나무는 꽃을 피우기 위해 긴긴 겨울을 버텨 낸다.
혹독하고 지난한 인고의 시간을 지나야 피어나는 매화는 더없이 붉고 또 화려하게 언젠가 찾아올 화산의 봄을 물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