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9화. 너희가 없는 화산은 화산이 아니다. (4)
“어…….”
현종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정으로 앞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그…….”
사실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저 아기 사슴 같은 커다란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아니…….”
마음을 먹고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저 초롱초롱한 눈이 물기를 가득 머금는 바람에 말문이 막혔다.
차마 그 눈빛을 마주할 수 없었던 현종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게……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뭔가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그, 봉문이라는 게…… 원칙이 있는 법인데, 외인을 들인다는 게…….”
시무룩해진 얼굴이 푹 수그러들었다. 고개를 숙이니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머리가 너무 잘 보여서 현종은 또 한차례 움찔했다.
혜연이 풀이 죽자, 뒤쪽에 있던 제자들이 재빠르게 백천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 기세에 등 떠밀린 백천이 작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 장문인. 물론 원칙상으로는 봉문 한 문파에 외인이 들어올 수 없는 것이 사실이나…….”
시무룩하게 앉은 혜연을 슬쩍 보고 말을 이었다.
“혜연 스님은 그…… 화산에서는 외인이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맞습니다! 장문인! 저희도 혜연 스님을 외인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같이 수련을 하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혜연 스님만큼 강한 분을 구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제자들이 합심하여 한목소리로 외쳤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화산 제자들의 목소리에 혜연이 감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매도 같이 맞는 게 낫다고!”
“저 사람 맷집이면 나한테 올 주먹이 한 대는 줄겠지.”
“혼자만 밖에서 편히 사는 꼴 못 봅니다.”
……그럼 그렇지. 이 마귀 새끼들.
어쨌거나 호의든 악의든, 화산의 제자들이 그를 돕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장문인.”
백천이 지원을 받아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혜연 스님은 소림에 돌아가지 않기로 선언한 상태입니다. 물론 그 기한이 영원히는 아니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소림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장문인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혜연 스님은 평생을 소림에서 살아오신 분입니다. 소림에도 화산에도 머물지 못한다면 딱히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을 고려하시어 이번만 사정을 봐주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훌륭한 논리와 반듯한 자세였다.
‘역시 사숙이다.’
‘이럴 때는 정말 쓸모 있다니까.’
고뇌하는 듯한 장문인의 표정과 당당한 백천의 등, 거기에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불쌍한 혜연의 뒷모습까지. 제자들은 이 말이 먹힐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측은지심이 뭔지 모르는 한 남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주…….”
삐딱한 목소리가 울렸다.
듣는 이를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그 목소리에, 제자들이 일제히 목을 움츠렸다.
“문파 꼴 자알 돌아간다.”
“…….”
제자들을 서글프게 만든 것은, 이 말을 한 사람이 청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차라리 청명이 말을 하면 대거리라도 해 보겠는데, 대거리가 아예 불가능한 이가 도끼눈을 뜨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 장로님…….”
현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봉문이라는 것은 한 문파의 장문인이 결정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큰 중대사라고 할 수 있다.”
“그,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이 감히 장문인에게 봉문에 이리저리 예외를 두라고 말을 늘어놓아? 장문인께서 오냐오냐해 주시니 이것들이 선을 넘는구나! 어디 우르르 몰려와서 장문인께 이래라저래라 하고 있어?”
화산 제자들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처박혔다.
사실 저 말이 그리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문파 같았으면 감히 봉문이라는 중대사를 두고 제자들이 무언가 요구를 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잘해 주면 당연한 줄 안다더니!”
현영이 도끼눈을 뜨고 몰아붙이자 제자들은 납작 수그리다 못해 거의 엎드린 자세가 되어 버렸다.
‘누가 단체로 장문인한테 오자고 했냐?’
‘조걸 사형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 새끼 끝나고 남으라고 해라. 뭐? 단체로 몰려가면 무시 못 하실 거다? 죽인다, 진짜!’
단체로 몰려왔더니 그냥 단체로 처맞고 있다.
모두가 체념하며 한숨만 내쉬던 그때.
믿을 수 없는 말이 이어졌다.
“그런 건 너희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할 말이다!”
“…….”
“장문인.”
믿을 수 없게도 현영이 깊게 포권 하며 말했다.
“문파에는 법도가 있으나 예외 역시 존재합니다. 혜연 스님 역시 화산과 함께 수차례 목숨을 걸고 싸워 온 이. 화산의 친우이자 빈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으음.”
“그러니 이번만은 예외로 하여 함께 봉문에 드는 것이 어떤가 합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세상에……. 장로님이?”
“밥만 축내는 입은 하나라도 더 줄이는 게 낫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물론 풀만 먹어서 돈이 별로 안 들기는 하지만…….”
“아니. 혜연 스님 고기 드시잖아?”
“조용히 해, 인마!”
제자들이 놀라 수군거리다 서서히 현종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현종은 뭔가 떨떠름한 얼굴로 현영을 바라보았다.
“그럴 거면 그냥 나서지 않았으면 될 일이 아니더냐?”
“절차란 중요한 법입니다. 응당 도리는 따져야지요.”
“……끄응.”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쉬고 현상을 향해 말했다.
“무각주.”
“예, 장문인.”
“화산의 역사에 빈객이나 외인을 데리고 봉문을 한 적이 있더냐?”
“……화산은 봉문을 한 역사 자체가 없습니다. 장문인.”
“…….”
좋네. 그래야 우리 선조님들이시지. 심심하면 봉문 해 대는 저 소림 놈들과는 다르구나!
아,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럼 다른 문파의 경우는 어떻더냐?”
“그것까지는 제가 잘…….”
“……그렇더냐?”
참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청명아.”
“네?”
머리 아플 때는 역시 청명이 놈을 쓰는 게 최고였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흐음.”
청명이 잠깐 고민하더니 혀를 차며 혜연을 돌아보았다.
“원칙대로라면 안 되겠지만…….”
“…….”
“쯧. 딱 봐도 밖에다 내놓으면 구걸도 못 해서 굶어 죽을 판이니 그냥 데리고 가죠. 그냥 두고 가면 거지 아저씨가 좋다고 달려들어 거둬 먹이게 생겼는데 죽 쒀서 개……. 아니, 거지 줄 수는 없잖아요.”
“…….”
“그리고 혹시 저 줏대 없는 놈이 배고프다고 소림으로 쭐레쭐레 돌아가 버리면 배 아프기는 마찬가지예요. 남 잘되는 꼴은 못 보죠. 암.”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어찌 저리 한결같이 마음보가 고약할꼬. 한결같이…….
“그래도 봉문인데…….”
“우리가 뭐 잘못해서 봉문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산문 걸어 잠그고 수련이나 하겠다는 건데 그걸 가지고 누가 꼬투리를 잡겠어요?”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고.”
“그리고!”
그 순간 청명이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꼬투리 잡으면 구파 새끼들일 텐데, 그 새끼들이 양심이라는 게 터럭만큼이라도 남아 있으면 화산에 꼬투리를 잡으면 안 되지. 어디 한번 해 보라고 해요. 내가 그날로 달려가서 기름 붓고 불 싸질러 버릴 테니까! 생각하니 또 빡치네! 이 새끼들도 불 앞에선 모두 공평하다는 걸 느껴 봐야…….”
“워워, 청명아 진정해라.”
“자, 착하지.”
“착한 생각. 착한 생각.”
“후욱! 후욱! 후욱!”
청명이 몇 번이고 애써 심호흡을 했다.
“후. 이제 좀 진정이 되네.”
“그래. 참 다행이…….”
“딴죽 거는 놈 있으면 봉문 풀고 가서 그 새끼들부터 조져 버리면 됩니다, 장문인. 이왕이면 딴죽 좀 걸어 주면 좋겠네요.”
그래, 청명아.
그게 진정한 거라니 이 장문인은 참 기쁘기 한량없구나.
어쩌면 이번 봉문은 강호에 있어서는 홍복일지도 모른다. 저 고삐 풀린 망아지……. 아니, 아수라가 스스로를 우리에 가두는 형상이니까.
“어쨌든, 그렇다면…….”
현종이 한숨을 쉬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모두 찬성하는 것 같으니, 혜연 스님은 함께 화산으로 가는 것으로 하자.”
“가, 감사합니다, 장문인!”
“잘됐습니다, 스님! 이제 같이 굴러 봅시다!”
“……좋아해야 할 일인지를 좀…….”
“에이. 당연히 좋아하셔야죠!”
“……아미타불.”
현종이 짧게 웃고는 당부했다.
“그럼 중요한 사항은 모두 결정했으니, 다들 준비하거라. 출발하겠다.”
“예?”
“지금 바로요?”
현종이 고개를 끄덕인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괜히 시간을 더 끌어서 좋을 일이 없다. 내친 김에 출발하자꾸나. 이제는 하루하루가 중요하니 말이다.”
“예, 장문인!”
화산의 제자들이 주저 없이 일어나 우르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짐을 정리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종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 * *
“그럼 가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화산의 제자들이 모여든 당가의 식솔들과 녹림도들, 그리고 저 멀리서 배웅하는 수적들에게까지 인사를 건넸다.
“당가주님.”
현종이 송구하다는 얼굴로 당군악을 바라보았다.
“일이 이리되어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마십시오, 맹주님. 이건 화산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선택임을 알고 있습니다.”
“…….”
“뒷일은 저희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친우란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현종이 살짝 눈을 감았다.
과거에는 화산이 망할 위기에 처했어도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렇게 선뜻 먼저 나서서 짐을 나누어 지겠다는 이들이 있다. 친우가 있다.
옆에서는 현영이 임소병에게 매화도 관련 일을 당부했다.
“모쪼록 잘 부탁하네.”
“걱정 마십시오, 장로님. 장부는 석 달에 한 번씩 화산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가 없네만.”
“뭐든 확실한 게 좋은 거지요. 산적에게 돈을 맡겨 놓은 사람의 심정이 편할 리가 있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동전 한 문 틀릴 일 없을 테니.”
“……신경 써 줘서 고맙네.”
임소병이 현영에게 슬쩍 다가서며 작게 속삭인다.
“……동전 한 문만 틀려도 죽이겠다고 쫓아올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도 그렇지. 끌끌끌.”
미소를 나눈 이들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현종이 앞에서 포권 하자 모두가 일제히 남는 이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꼭 다시 뵙겠습니다!”
“장강을 잘 부탁드립니다!”
“못 알아볼 정도로 강해지겠습니다!”
“힘내십시오!”
화산 제자들이 씩씩한 인사를 우렁우렁 전하자 남는 이들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걸로 화답했다.
“그럼!”
화산 제자들이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린다.
그들이 장강에서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하자 당군악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응?”
화산 제자들이 뒤를 돌아보자 당군악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와 보조를 맞춰 장강에 남은 모두가 일제히 포권 했다.
“무운을!”
우렁찬 외침에 뜨거움이 실려 있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입술을 꾹 닫았다.
대답은 필요하지 않다. 인사는 이미 했으니까.
그저 다시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갔군.”
“그러네요.”
고개를 끄덕인 임소병이 슬쩍 당군악을 보더니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입가를 실룩이던 당군악이 짧게 헛기침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니 말이네.”
“예?”
그의 시선은 멀어져 가는 화산의 제자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들이 봉문을 깨고 나올 때 대체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를 생각하면 자꾸만 기대가 되는군.”
임소병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말에는 그도 동감이었다.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봉문을 깨고 나온 마귀가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는 꼴을 보지 않으려면. 지금도 감당이 안 되는데, 그때는 얼마나…….”
“……그건 나도 좀 무섭군.”
당군악은 웃으며 화산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기다리고 있겠네.’
더 성장한 저들이 다시 돌아올 그날.
세상은 진정으로 새기게 될 것이다.
화산과 천우맹이라는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