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8화. 너희가 없는 화산은 화산이 아니다. (3)
“그…….”
모두가 한마음으로 봉문을 결정할 때까지는 좋았다.
물론 청명이 놈이 이를 가는 걸 보고 다소 섬뜩해지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다들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결정을 끝낸 화산의 제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눈앞의 이 사람에게 결정된 사항을 설명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게…….”
백천은 그답지 않게 굉장히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됐습니다, 스님.”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고 귀에 선했다.
혜연이 법계에게 자신은 소림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이 말이다.
“……봉문이요?”
“…….”
“봉문?”
“…….”
혜연의 사슴같이 커다란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럼…… 저는요?”
“어…….”
백천이 어색하게 어물어물 대답했다.
“글쎄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
“하…….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그의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 좀 해 보십시오!’
‘울잖아요!’
‘아니, 나보고 뭘 어쩌라고?’
그 분위기에서 혜연의 거취 같은 걸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때 혜연이 입을 열었다.
“그……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쭙습니다만.”
“……예.”
“봉문을 하면…… 외인은?”
“그야…….”
백천이 빙긋 웃으며 친절히 답해 주었다.
“봉문 하면 외부인은 못 들어오죠. 그게 봉문 아닙니까. 새삼스러운 걸 물어보시는군요. 아실 만한 분이.”
“야, 이!”
“아니, 대답을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등 뒤에서 항의가 빗발치자 백천이 왜 그러냐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게 사실인데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
“와…….”
“혹시 장강 건너편에 인성 두고 오셨습니까?”
혜연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인간 같지도 않은 화산 놈들.’
차라리 사파가 낫지. 사파가 나아.
아니, 이건 애초에 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혜연의 잘못이다.
화산 놈들이 이렇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거늘, 대체 뭘 기대하고 화산에 머물겠다고 선언해 가지고 이 꼴을 당한단 말인가?
슬금슬금 혜연의 눈치를 살피던 조걸이 어색한 얼굴로 짐짓 호탕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스, 스님! 이게 꼭 그렇게 침울해하실 일만은 아닙니다.”
“……예?”
“그러지 마시고 이 기회에 그냥 차라리 화산에 입문하시지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스님께서 입문하신다고 하면 장문인께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하실 겁니다.”
“…….”
“잘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 대머리로 사느니 차라리 화산에 입문하셔서 머리도 기르고, 고기도 드시…….”
윤종이 냅다 조걸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확 당기고 입을 때렸다.
“요 조동아리! 요 조동아리!”
“아악! 악! 읍! 퉤! 왜 때려요! 왜! 아악!”
재빠르게 조걸을 제압하는 윤종을 보던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장문인과 한번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님.”
“…….”
혜연이 답이 없자 백천은 어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불가에서도 말하듯,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혜연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오, 시주.”
“예? 뭐라고요?”
“……가.”
“……예?”
“나가 뒈지십시오, 시주.”
“…….”
* * *
“봉문이라고 하셨습니까?”
임소병의 눈은 너무 커지다 못해 눈알이 툭 튀어나올 듯했다.
“봉문이요?”
“응.”
“그러니까 봉문?”
“그렇다니까.”
“봉문이라고 하신 거죠?”
“…….”
“이게 실례가 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는데…….”
“응?”
“혹시 뭘 잘못 처드셨습니까?”
오…….
굉장하다. 그게 실례인지 아닌지 구분을 못 하다니. 역시 산적 두목이다.
그 순간 임소병이 돌연 고함을 빽 내질렀다.
“아니, 제정신이시냐고!”
“이게 얻다 대고 소리를 꽥꽥 질러 대!”
청명이 임소병을 뻥 걷어차 버렸다. 하지만 평소 같았으면 죽는다고 엄살을 부려 댔을 임소병이 이번에는 나가떨어지자마자 획 몸을 일으켜 제자리로 용수철처럼 돌아왔다.
“엄마야?”
거의 나는 듯한 그 기세에 되레 청명이 놀라 몸을 움츠렸다. 임소병이 눈에 불을 켜고 외쳤다.
“아니,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돈! 돈! 돈이란 말입니다! 돈이라고!”
지금까지 병약했던 건 다 거짓이었던 것처럼 이마에 핏대까지 세운 임소병이 삿대질을 해 댔다.
“아니! 돈뿐만이 아니지! 도장쯤 되시는 분이 지금 여기에 얼마나 많은 게 걸려 있는지 몰라서 그러시는 게 아닐 텐데! 봉문이라니! 이게 무슨 개소립니까!”
소리를 지르던 임소병의 태도가 다시 획 바뀌었다.
그는 청명의 손을 덥석 잡고 간절하디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농담이시죠? 저 놀리시는 거죠? 농담이었다고 하십시오. 네?”
“사실인데?”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은 임소병이 풀린 다리를 아무렇게나 널부러뜨린 채 영혼이 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어쩌자고 저 못 믿을 도사 놈들이랑 일을 벌여 가지고는……. 세상에 믿을 놈이 따로 있지.”
“……그게 산적이 도사한테 할 말이냐?”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당군악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나도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갑작스레 봉문이라니. 자네가 하려던 것들이 이제야 그 결실을 보고 있는데.”
“뭐, 그렇긴 한데…….”
청명이 살짝 답하기 곤란한 기색을 보이자 당군악이 그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으로는 안 된다는 거로군.”
“……이해하시네요.”
“장일소는 무서운 자였으니까. 심지어 사패련을 손에 넣었으니 더욱 무시무시해지겠지.”
문파를 이끌어 나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얼마나 큰 이득을 얻느냐가 아니다. 다가올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가이다.
당가를 이끄는 입장이다 보니 그런 청명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작은 것에 정신이 팔려 정작 중요한 것을 대비하지 못한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수도 없이 지켜본 경험이 있으니까.
“아니, 이해는 하는데…….”
하지만 임소병은 여전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천우맹이 있는 것 아닙니까! 화산 혼자서 할 필요는 없는 거잖습니까!”
“그것도 한계가 있어.”
“한계라니요! 제 기기묘묘한 책략이 합쳐지면…….”
“제갈량도 위를 못 막았는데, 네가 무슨 수로?”
“아니, 그건…….”
“힘에서 밀리면 전략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야.”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네.”
그리고 부연했다.
“어쨌거나 시간을 얻어 낸 것은 사실이지. 장일소가 삼 년의 시간을 모두 지킬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네. 상호 불가침을 강남 불침으로 바꾼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럼 주어진 시간은 길어 봐야 이 년.”
“맞아요.”
“그 이 년의 시간으로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건 냉정하게 말해서 화산뿐이라 할 수 있지. 화산에는 젊고 재능 있는 인재들이 넘쳐나니까. 그사이 가장 극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이가 청명이라면 분명 당군악이 상상하는 이상의 결과를 보여 줄 것이다.
하지만 임소병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당장 장강을 안정화시키는 것도 화산이 없으면 힘듭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네. 자네가 말했던 그걸 위해 천우맹이 있는 것이니까. 당가가 나서겠네. 부족하다면 야수궁에도 지원을 요청하지.”
“끄응…….”
임소병은 앓는 소리를 내며 부채로 제 머리를 쿡쿡 찔렀다.
“게다가 사천과 섬서, 그리고 장강 유역의 중소 문파들이 천우맹과의 관계 결성을 희망하는 상황이니, 그들을 받아들여 도움을 받는다면 화산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을 걸세.”
“그렇긴 합니다만…….”
사패련이 직접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웬만한 사파 정도는 당가 선에서 처리할 수 있다. 사파가 강해서 문제인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이 장강으로 오지 못하는 게 문제니까.
“그리고 매화도는 사패련에서 건드리지 않기로 했으니…… 사실 화산이 크게 할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 언제까지 섬서를 비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거, 정말 맞는 말만 하십니다.”
임소병이 뚱한 얼굴로 우는소리를 하자 당군악이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불안한가?”
“…….”
임소병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녹림이 천우맹을 보고 우리와 함께하려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네. 녹림은 오직 화산과 화산신룡……. 아니, 화산검협을 보고 천우맹에 적을 두려 하는 거겠지.”
임소병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우가 되었든, 동료가 되었든, 한쪽만 일방적으로 수혜를 입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자네가 화산의 친구가 되고 싶다면, 스스로 화산의 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
“우선은 화산이 자리를 비운 동안 천우맹을 안정시키고, 장강을 확고히 하는 것부터겠지. 그렇지 않은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임소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당군악을 쏘아보았다.
평소 가벼이 주접을 떨어 대던 모습이 아닌, 녹림의 왕다운 기세였다.
“하나는 이해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해 보게.”
“녹림은 아직 천우맹에 적을 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설사 적을 두었다 한들, 맹주가 있는 화산이 아닌 당가가 녹림에 명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야 당연한 말이지.”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서로 팽팽하게 얽혀 들었다.
“끙.”
하지만 이내 그 기세를 날려 버린 임소병이 어깨를 떨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덕 좀 보나 했더니, 발바닥에 땀나도록 달리게 생겼네. 아이고, 내 팔자야.”
넋두리를 하던 임소병이 청명을 획 돌아보았다.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있는 거겠죠?”
“뭐 뻔한 소리를.”
“끄응. 장기투자는 취향이 아닌데. 인생은 단타거늘.”
머릿속에서 주판알을 굴려 보던 임소병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무리 말해 봐야, 한번 정한 걸 바꿀 사람도 아니시고.”
“잘 아네.”
“뭘 정할 때, 계산 없이 대충 들이받을 양반도 아니니.”
결국 결론은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임소병이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장강과 상권은 제가 어떻게든 해 보지요. 양민들이야 당가에서 알아서 지킬 테니까.”
“안 돼.”
“……예?”
“그것도 네가 해야 돼. 사파를 처리하고 양민을 구휼하는 건 최대한 녹림에서 한다.”
“…….”
청명을 빤히 보던 임소병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진짜 무리한 거 바라시네. 상권을 지키면서 사파라는 인식도 벗으라는 겁니까?”
“좋은 기회잖아.”
“끄으으응.”
하여튼 이 사람은 항상 가혹하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를 리도 없을 텐데.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지요. 하지만!”
임소병은 단호함이 서린 눈으로 청명을 응시했다.
“본인과 화산이 가진 영향력을 직시하십시오.”
“…….”
“화산이 없는 천우맹은 절대 삼 년이나 버티지 못합니다. 정파인 당가와 사파였던 녹림이 함께 일을 하는 게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상황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화산이 있는 자리에서는 별것도 아니었던 일이 화산이 없는 곳에서는 칼부림이 날 이유가 됩니다.”
그 말에 동의하는 듯 당군악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임소병이 말을 이었다.
“저와 당가주가 막아 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도장의 복귀가 너무 늦어 버리면 천우맹의 결속 이전에 저와 당가주가 실각할 위험도 있습니다.”
“거 애새끼들 하나 못 다스려서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어디서 소리를 질러! 확 마!”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임소병이 찔끔하여 목을 움츠렸다.
“여하튼…….”
당군악이 임소병을 거들고 나섰다.
“나도 녹림왕의 말에 동의하네. 당가와 녹림이야 그렇다 치고, 당장 자네가 없으면 북해빙궁과는 교류가 완전히 끊어질 수밖에 없네. 그들의 중원에 대한 적대감은 상상을 초월하니까.”
“으음.”
“아무리 협조를 구하려 한다 해도 화산이 봉문 하는 동안은 중원에 어떠한 손도 내밀지 않을 확률이 높네. 그들은 천우맹을 돕는 게 아니라 화산을 돕는 걸세.”
당군악이 조금 더 가라앉은 어조로 말한다.
“그리고 그건 야수궁도 마찬가지겠지. 당장에야 손길을 내밀지 몰라도 그 기간이 길어지면 같을 걸세.”
“네? 두 분 친하시잖아요.”
“우리의 친분은 자네가 있어서 유지되는 거라네. 그리고 야수궁주가 나를 좋게 여기는 것과 당가를 좋게 여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
“…….”
“이 말을 하는 이유는 하나일세. 천우맹은 오직 화산이 있기에 가능했던 연합일세. 화산이 없다면 천우맹은 존속이 불가능하네. 그러니…….”
잠깐 말을 줄인 당군악이 단호한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게.”
“…….”
“물론 최대한의 성과 역시 이루고 돌아오게나.”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거 무리한 걸 바라시네.”
“…….”
“하지만…….”
청명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의 두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깜짝 놀랄 성과를 보여 드릴 테니까.”
“후후. 그래야 화산신룡이지. 아니……. 화산검협인가. 아직 영 입에 안 붙는군.”
“끄응. 썩을 별호 같으니.”
당군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안다. 청명이 하는 모든 일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그러니 그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청명과 화산을 최대한 지원하는 것이다.
“뒤는 내게 맡기게.”
“끙. 한 손 거들겠습니다.”
청명이 빙그레 웃었다.
과거였다면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뒤를 맡길 수 있는 이들이 있다.
지금의 화산이 과거의 화산보다 확연히 나은 점 하나만 꼽으라면 그건 이들의 존재일 것이다.
청명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임소병과 당군악이 맞잡았다.
강하게 얽힌 손으로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부탁할게요.”
청명의 짧은 말을, 당군악은 부드러운 미소로, 그리고 임소병은 앓는 얼굴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