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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47화 (844/1,567)

847화. 너희가 없는 화산은 화산이 아니다. (2)

죽는다.

사실 낯선 말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꽤 익숙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청명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모두의 가슴에 천근 거암처럼 얹혔다.

“……아니…….”

백상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도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청명이 피식 웃었다.

“운이 좋았지, 그렇지?”

“…….”

“허도가 나서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면.”

“…….”

“아니, 그 전쟁을 멈추는 시기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모두가 차마 청명의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만인방이 그 자리에서 버티며 시간을 끄는 게 아니라, 정말로 전쟁을 할 각오로 달려들었다면.”

“…….”

“정말 모두가 이곳에서 이렇게 앉아서 명성과 이득에 대해 논할 수 있었을까?”

백상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하지만 그건…….”

“그래.”

청명이 백상의 말을 끊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인인 이상 언제든 죽을 각오는 해야 하는 게 맞아. 칼을 휘두르며 사는 놈이 나는 칼 맞고 죽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그게 바로 오만이고 역겨운 거지.”

“…….”

“하지만 그게 죽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야.”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세상은 이미 달라졌어. 다음부터 우리가 서게 될 전장은 지금까지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연습하듯, 경험하듯 싸울 수 있는 시절은 이제 끝났어. 그리고 이제 두 번 다시 오지 않아. 다음부터는 정말 죽고 죽여야 해.”

사패련이 세상을 바꿔 버렸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은 이 자리에 앉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하지만 백상은 여전히 모두 납득하진 못한 눈치였다.

“그래서 문파들을 연합하고 세를 더 키우고 있는 것 아니냐? 천우맹의 힘이라면…….”

“사숙.”

청명이 백상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백상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청명이 말했다.

“나도 돈 좋아해. 명성도 좋아하고, 명예도 좋아한다니까?”

“……그런데?”

“하지만 그 대가로 여기에 있는 누군가의 목숨을 내어 놔야 한다면 그딴 건 필요 없어.”

청명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굳건했다.

“사람을 정말 지옥에 빠뜨리는 게 뭔지 알아?”

“……사형제의 죽음을 눈으로 보는 것?”

“아니. 그건 아무것도 아냐.”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지옥은 살아남는 거야. 그리고 살아남은 내가 사실은 사형제들이 죽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 버리는 거지.”

“…….”

“사람을 진정 지옥으로 끌고 가는 건 후회야.”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듣는 이들은 알 수 없는 서글픔에 가슴이 내려앉는 걸 느껴야 했다.

“누군가가 죽을 거야. 이건 피할 수 없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평소처럼 굴고 있지만, 사실은 다들 알고 있잖아. 언젠가는 여기에 있는 이들 중 누군가는 죽어. 그것도 멀지 않은 시기에.”

“…….”

“그때…….”

청명이 시선을 위로 던졌다.

“어깨에 걸린 찬란한 명성이.”

“…….”

“손에 쥔 커다란 재력이.”

“…….”

“세상을 구해 냈다는 드높은 명예가.”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잠시간 천장을 올려다보던 청명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모든 게 한 푼의 값어치라도 있을 것 같아?”

백천은 말없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백천은 안다.

저건 청명이 사형제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저건 청명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아.”

“…….”

“누군가의 죽음을 보는 걸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게 나의 안일함으로 인한 죽음이 되지는 않게 해야 해. 내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개죽음은 아니어야 해. 피할 수 있었던 죽음은 아니어야 한다고.”

유이설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담담하게, 하지만 확고하게.

“화산은 더 강해져야 해. 지금으로는 안 돼. 만인방 때문만이 아니야. 사패련 때문도 아니고, 장일소 때문도 아니야.”

무서워서다.

잃는 것이 지독하게 두려워서.

이번 전투에서 단 한사람의 희생자라도 나왔다면 화산은 결코 지금 같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 알고 있다. 이번 결과는 실력으로 쟁취한 게 아니라 그저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걸.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어.’

청명이 입술을 깨물었다.

장일소에게 화산에게 시간을 준 것을 후회하게 해 준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독기에 찬 발악이었을 뿐이다.

청명은 그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만인방을 이긴다고?

수많은 제자들을 희생시켜 따낸 승리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승리는 지겹도록 겪었다. 지금 세상을 다 뒤져도 청명보다 더 많은 승리를, 더 영광스러운 승리를 경험한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청명에게 뭐가 남았는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 무엇도.

그때, 청명을 응시하던 백천이 입을 뗐다.

“그래서…….”

제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순간 화산의 제자들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백천이니까.

“네가 말한 대로 봉문을 하고 죽어라고 수련을 하면 누구도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거냐?”

“그럴 리야 있겠어? 다만…….”

청명이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확고해진 얼굴로 말했다.

“적어도 그 죽음 앞에서 산 자가 부끄럽지는 않게 되겠지.”

백천이 피식 웃었다.

“뭐 그리 대단할 것도 없구만.”

“…….”

“나는 찬성이다.”

“사숙!”

“사형!”

사형제들이 놀라 소리쳤지만, 백천은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청명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욕심쟁이 놈한테 욕심 좀 그만 부리라고 했더니, 더한 짓을 하고 있네. 너답다고 해야 할지.”

한편 백상의 눈에는 당혹감이 어렸다. 백천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대사형이 한번 저렇게 뜻을 정해 버리면 결코 말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도움을 청하듯 윤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라 말 좀 해 보아라.”

“저 말입니까?”

“그래.”

윤종은 잠깐 말을 정리하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저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뭐?”

“애초에 저는 상권이니, 명예니, 명성이니 그런 건 잘 모릅니다. 저는 그저 검을 익힐 뿐입니다. 화산은 검을 통해 도를 이루는 곳.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살짝 어깨를 으쓱한 그가 말을 이었다.

“사숙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어느 쪽이 되었든 그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백상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조걸이 윤종을 향해 혀를 찼다.

“하여튼 벽창호 같은 양반…….”

“왜? 너는 생각이 다르더냐?”

“다르다고 하면 때릴 거 아닙니까. 제가 뭔 말을 하겠습니까?”

“안 때리마.”

“그 말을 어떻게 믿고.”

“안 때린다니까.”

“예이, 예이. 하늘 같은 사형의 말씀인데 제가 따라야……. 아악! 안 때린다면서요!”

저긴 텄다 생각한 백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유이설을 보았는데, 그녀야 애초에 봉문을 하는 데 찬성해 버렸으니 물어도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태연히 앉은 양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냥 포기하십시오, 사숙.”

곽회가 쓰게 웃었다.

“솔직히 저 말을 듣고 뭔 소리를 하겠습니까. 사숙도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래, 아는데…….”

백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아까워서 그런다. 너무! 청명아. 정말 양립은 안 되는 거냐?”

“나는 그렇게 요령 좋은 사람이 아니야.”

“…….”

“여력 하나 남기지 않고 몰아붙이기 위해서 봉문까지 하는 거야. 양립이 가능하면 봉문까진 안 했겠지.”

백상의 입에서 한숨을 푹 새어 나왔다.

돌아보니 어느새 다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진짜 이 새끼들.’

그렇게 반발하더니 몇 마디 듣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들 수긍해 버린 눈치다. 아니, 수긍 정도가 아니라 저들이 먼저 나서서 하루라도 빨리 봉문 하고 수련하자고 소리칠 기세였다.

속이야 갑갑하지만…… 어쨌든 백상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백상 역시 마찬가지니까.

어쩌면 우겨 댈 수 있을지 모른다. 발악하고 박박 소리를 질러서 저 뜻을 틀게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만약 그 대가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백상이 쓰러진 백천의 시체를 마주하는 날이 온다면?

백상은 절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절대로.

그걸 알기에 차마 반대를 할 수가 없다.

“대충…… 정리가 된 것 같구나.”

그때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현종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청명이가 나를 찾아와서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도 고민이 많았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장문인.”

“화산에는 수많은 기회가 있다. 그리고 화산의 어깨에는 무거운 책임이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현종은 더욱 그럴 것이다.

다른 이들은 화산이 잃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현종은 천우맹의 맹주로서 짊어져야 할 것도 있다. 설령 그저 화산으로 국한한다 해도 그는 제자들보다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머리로는 답이 나오지 않더구나. 그래서 처음으로 내 마음에 물어보았다. 내가 원하는 길은 무엇인지.”

모두가 주목하자 현종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내 마음이 말하더구나. 천금도, 세상에 울려 퍼지는 명성도, 화산의 이름을 빛나게 만들 명예도…….”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의 제자와도 바꿀 가치가 없다.”

“……장문인.”

현종이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한 문파를 이끄는 장문인으로서는 해선 안 될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또 동시에 장문인이 가져야 할 온당한 마음이기도 했다.

현종의 마음은 지금 분명 그리 말하고 있었다.

지금 화산이 쥔 기회는 과거의 그가 너무도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현종은 안다.

“나는 화산이 천하제일 문파가 되지 않아도 좋다.”

“…….”

“그 이름이 없더라도 화산은 화산이다. 강하고 위대하기에 화산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현종의 두 눈에 따뜻한 온기가 담겼다.

“너희가 없는 화산은 화산이 아니다.”

모두가 주먹을 꽉 쥐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말이 있지만, 이보다 그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나는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화산을 지키려 한다.”

“…….”

“반대하는 이 있더냐?”

고요하다.

모두가 말없이 현종을 바라보았다. 잠시의 침묵이 지나고, 가장 먼저 누군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백상.

그가 대답을 하자 모두가 뒤따르듯 대답한다.

“없습니다.”

“없습니다, 장문인!”

“장문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의 모든 제자는 들어라.”

“예, 장문인!”

“화산 장문인의 이름으로 지금 이 순간부터 봉문을 명한다. 그 기한은 정하지 않을 것이다.”

“예!”

현종이 온화한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무리한 요구일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 반발하지 않고, 더 이상 불만 어린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 속이야 어찌 되었든 그의 말을 따르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어찌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돌아가자꾸나. 화산으로.”

“예! 장문인!”

그렇게 화산의 섬서행이 결정되었다.

모두가 현종을 보며 훈훈하게 웃던 바로 그때,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결정이 난 거지?”

우득. 우득.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어 대었다. 그의 목에서 들리는 뼈 소리가 어쩐지 섬뜩했다.

“아, 내가 하나는 이야기를 안 했는데.”

“……응?”

“곧 누구 하난 죽는다는 게 꼭 전쟁 때문만은 아닐 거야.”

“…….”

“나도 이번에는 진짜 전력을 다해 볼 테니까. 어차피 뒈질 거면 남의 손에 죽는 것보다 내 손에 죽는 게 낫잖아? 안 그래?”

“…….”

“그냥 그렇다고. 그렇게 알아 둬.”

화산 제자들의 눈에서 의기가 빠져나갔다. 그들이 겁먹은 사슴 같은 눈으로 일제히 현종을 바라보자, 현종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시간 끌 것 없이 어서어서 돌아가자고. 이제 바빠질 테니까.”

“…….”

지옥으로 가는 문은 더없이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는 법.

제 발로 지옥에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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