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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44화 (841/1,567)

844화. 사람을 엿 먹여도 정도가 있지! (4)

검이 빛살처럼 쾌속하게, 하지만 또 유려하게 날아들었다. 바람이 칼날이 된다면 이럴 것이다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 검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쾌속함도 유려함도 아니었다. 그 검에 진득하게 담긴 농밀한 살기였다.

카각!

날아들던 검이 청명의 검에 부딪히며 튕겨 나갔다. 하지만 밀려난 매화검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부드럽게 방향을 바꾸더니 이내 수십 개의 검기를 허공에 흩뿌려 대었다.

청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검이란 손끝에 닿아 있는 것. 하지만 검기는 손끝을 떠난 것이다. 그렇기에 활로는 비무를 할 수가 없다. 활을 떠난 화살을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초장부터 검기를 뿌려 댄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다치게 하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나 다를 게 없다.

“이게……!”

이를 갈아붙인 청명이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 수십 개의 검영을 만들어 내어 날아드는 붉은 검기를 일일이 깨뜨렸다.

“대체 뭐 하자는 짓거리야!”

청명을 화나게 하는 것은 그녀가 뿜는 살기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 검기도 아니었다.

그 검기 뒤에서 그를 노려보는 유이설의 눈빛이다.

무감정하면서도 은근히 힐난하는 것 같은 저 눈빛.

파앗!

유이설의 몸이 땅을 박차고 올랐다.

청명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땅과는 달리 허공에서는 움직임이 제한되니까. 스스로 움직임을 제약할 필요는 없다.

쇄애액!

허공에서 휘둘러진 유이설의 검이 수십 송이의 매화를 피워 낸다. 과하지 않게, 딱 자신의 몸을 가릴 만큼만.

하지만 그 수가 적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허공에 흩날린 꽃잎은 하나하나 생생하게 휘날리며 청명을 노려 왔다.

파아아앗!

그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붉은 검기를 머금은 검이 독사처럼 고개를 쳐들고 청명을 물어뜯을 듯 쇄도했다. 매화가 만발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독사가 지나는 이를 기습하는 것처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날아든 검이 청명의 목 줄기로 직행했다.

카각!

청명이 검 날을 세우며 그녀의 검을 옆으로 흘려 냈다. 동시에 뒤로 몸을 날려 날아드는 꽃잎을 피했다.

하지만 유이설은 그를 이대로 놓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타악!

땅을 박찬 그녀는 뒤로 멀어지려는 청명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그리고 흰 종이에 난을 치듯 유려하게 허공을 가로 그었다.

“흐음.”

이번엔 청명의 검이 날아드는 유이설의 검 옆면에 달라붙으며 살짝 밀어 내었다.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너무도 쉽사리 검의 궤적을 틀어 냈다.

휘잉!

유이설의 검은 청명의 머리 바로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덕에 완전히 비어 버린 옆구리에 청명의 발이 직격했다.

퍼억!

내장이 뒤틀리는 충격이 쏟아졌지만, 유이설은 옆구리를 얻어맞은 순간 오히려 몸을 앞으로 내밀며 충격을 분산시키고 되레 앞으로 달려들어 검을 내리그었다.

청명의 몸이 횡으로 이동했다.

카각!

강력한 힘을 담은 검이 땅에 상흔을 남겼다. 부상을 감수하면서도 상대를 집요하게 노리는 이런 검격은 사형제간의 비무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수다.

“하아아압!”

유이설에게서는 웬만해서 들을 수 없었던 커다란 기합성이 터졌다. 동시에 그녀의 검이 폭풍 같은 검기를 뿜었다. 닿는 모든 것을 부숴 버리겠다는 듯 강한 내공을 실은 검기가 청명을 향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유이설이 만들어 낸 붉은 검기가 검은 밤을 수놓았다.

우둑!

일순 검을 잡은 청명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에 이전과는 다른 흉맹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콰아아아앙!

날아들던 검기가 세차게 휘둘러진 암매검을 뚫지 못하고 파훼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유이설의 검이 다시금 허공에서 세차게 흔들렸다.

끝이 흐릿하게 보일 만큼 흔들린 검이 허공에 붉은 매화를 피웠고, 순식간에 수십 송이로 화하며 불어나기 시작했다.

매화점점(梅花漸漸).

유이설이 만들어 낸 매화가 바람과 함께 비산했다. 환상처럼 날아오른 꽃잎이 청명의 전신을 노리고 들었다.

더없이 치명적인 꽃.

자신을 향해 이토록 살기를 품고 날아드는 매화검법은 청명도 처음 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휘릭.

검을 한차례 휘둘러 고쳐 잡은 그는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파아아아아앙!

그의 검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더없이 세차게 날아들던 꽃잎들 가운데 붉은 선이 생겨났다. 선에 닿은 꽃잎이 이지러지며 커다란 틈이 생겨났다.

쾅!

순간 폭발적인 힘으로 땅을 박찬 청명이 빛살처럼 그 틈을 파고들었다.

유이설 역시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목을 향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하나 청명도 이번만큼은 그 검을 피하지도, 흘리지도 않았다.

콰아아아앙!

청명의 검이 가공할 거력을 싣고 정면으로 유이설의 검과 맞부딪쳤다. 유이설의 입에서 붉은 피가 울컥 솟구쳤다.

퍼억!

그녀의 검을 날려 버린 청명이 어깨로 명치를 콱 들이받았다. 유이설의 몸뚱이가 걷어차인 돌멩이처럼 날다 추락했다.

쿵!

“…….”

쓰러진 유이설을 보며 청명이 작게 숨을 고르며 나직이 말했다.

“장난이 과해.”

무슨 사정에서든 사형제를 상대로 살기를 뿜고 살수를 써 대는 짓이 용납될 리가 없다. 물론 그렇게 해도 청명을 이기지 못하리란 걸 알고 한 일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때, 유이설이 검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잖아도 흰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고, 입가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장난…….”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유이설은 중얼거리며 빤히 청명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물었다.

“어때?”

“뭐가?”

“나.”

“…….”

질문의 저의를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청명이 이내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검이 가벼워. 하지만 그것만 보완하면 훌륭해. 그 나이에는 비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어때?”

“…….”

하지만 돌아온 건 또 같은 질문이었다.

청명은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유이설을 보았다. 그가 대답이 없으니 유이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약해.”

“…….”

“지독하게.”

너무하리만치 담담한 목소리에, 청명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고는 약하지 않아.”

“약해.”

“아니, 사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사고는…….”

“약해.”

“…….”

“약해 빠졌어. 신물이 날 정도로.”

청명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유이설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이게 그저 치기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했지. 우리는 네 검이라고.”

장일소와 싸울 때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정말? 우리가?”

“…….”

유이설은 고개를 내저었다.

“너는 더 잘 싸웠어. 우리가 없을 때, 오히려 더. 그때 우리는 방해만 됐어. 거추장스러운…… 싸우면서도 지켜 줘야 하는.”

“사고.”

“아니야?”

청명을 똑바로 응시하는 유이설의 눈이 어두웠다.

“이번 싸움에서 나는 아무것도 못 했어.”

“그야…….”

아직 사고의 수준에는 어울리지 않는 전투였으니까.

하지만 청명은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검수에게 그 말이 얼마나 치욕스럽게 들릴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고는 충분히 빨리 강해지고 있어. 과할 정도로.”

이건 한 치의 거짓도, 숨김도 없는 청명의 본심이었다.

이들은 이미 과거 매화검존이 그 나이였을 때보다 더 강하다. 홀로 길을 열던 매화검존에 비한다면 비할 바 없이 훌륭한 토대를 쌓았다.

가진 것을 완전히 풀어내지 못해 확연한 강함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유이설은 쉬이 납득하지 않았다.

“부족해.”

“과욕이 좋은 건 아니야.”

그 말에 유이설은 청명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 눈빛을 마주한 청명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음에도 청명은 아직 때때로 이 무표정한 사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럼 나는 언제 강해지지?”

“…….”

“먼 훗날? 네가 피 흘리고 고통받으며 만들어 놓은 화산에서 느긋하게?”

청명은 입술이 굳은 것처럼 말이 없었다.

스릉.

유이설이 검을 회수해 검 집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의미 없어, 그건.”

“…….”

“필요할 때 못 쓰는 명검은 제때 쓰이는 무딘 칼보다 못해. 그건 장식품이야.”

유이설은 무표정한 얼굴로 청명을 보며 물었다.

“왜 겁을 먹어?”

“겁이라니?”

“왜 우릴 가르치지 않아?”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검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매화검법도 매화검결도…….”

“그럼.”

유이설이 청명의 말을 끊었다. 뻔한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왜 네가 쓰는 검과 우리가 쓰는 검이 달라?”

“…….”

청명이 입을 다물었다.

유이설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그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싸우는 법, 의지를 잃지 않는 법, 맞서는 법, 다 배웠어. 하지만…….”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검은 아니야.”

“…….”

청명은 안다. 저 이상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같은 매화검법이라 해도 청명의 검과 저들의 검은 다르다. 그의 검은 실전 속에서 스스로 체득하고 체화한 검. 때문에 더없이 살기 짙고 잔혹하다.

하지만 이들의 검법은 실전성을 보강하긴 했어도 화산의 매화검법의 원형과 닿아 있다.

그렇기에 청명은 이들을 다그치면서도 그 검법의 방향을 뒤틀지는 않았다.

“단 한 번도 네가 가진 것을 준 적이 없어.”

“……주지 않은 게 아냐.”

“나는 매화를 피우고 싶어.”

“…….”

“그림 같은 매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매화.”

유이설의 시선이 먼 밤하늘로 향했다. 말없이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윽고 다시 투명한 시선으로 청명을 응시했다.

“모르겠어.”

“뭐가?”

“왜 네가 겁을 내는지.”

청명의 눈꼬리가 사나워졌다.

그런 청명의 반응을 본 유이설은 작게 한숨을 흘렸다.

“우리는 우리일 뿐이야. 네가 우리에게 뭘 바라는지 모르겠어.”

“…….”

청명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뗐는데, 그 순간 유이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

그녀는 청명을 향해 사과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어. 알아, 나도.”

“…….”

“……하지만 네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라도 해. 전쟁 끝난 뒤에 홀로 빛나는 명검이 될 생각 따위 없어. 그건 아무런 가치 없는 장식품이야. 내가 원하는 건 진짜 검이야. 날이 나가고 금이 간다 해도 필요한 곳에 있는 진짜 검.”

그녀의 목소리에는 굳건한 의지가 단호하게 새겨진 것만 같았다.

“다음에는 저번 같은 일 없을 거야. 너는 내가 지켜. 나는 네 사고니까.”

그 말을 끝으로 유이설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미련 없이 청명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청명의 얼굴에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 만큼 복잡한 표정이 스쳤다.

한참 동안 그렇게 말없이 그녀가 멀어져 간 방향을 응시하다 입술을 짓깨물었다.

“……겁을 낸다고?”

내가?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헛웃음을 지어 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웃음 따윈 나오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데도 오늘따라 청문은 그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강물이 흐르며 강가를 스치는 소리, 나지막한 풀벌레 소리만 하염없이 들려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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