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3화. 사람을 엿 먹여도 정도가 있지! (3)
쏴아아악.
곡식 쏟아지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린다.
손에 되를 든 조걸이 몰려든 이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충분히 있으니까 다투지 말고 줄을 서십시오! 모두에게 다 돌아가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증명하겠다는 듯 제 앞뒤에 놓인 곡식 자루들을 툭툭 두드렸다.
“자, 여기 있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무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눈물까지 쏟으며 거듭 감사해하는 노인을 보며 조걸이 빙그레 웃었다.
현영은 현종이 청명에게 고리대로 빌린 돈을 있는 대로 풀어 대량의 곡식을 구입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금 곤궁해진 장강의 양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중이다.
이곳뿐 아니라 화산의 제자들과 당가의 식솔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인근의 마을을 찾아 구휼했다.
“자자, 대세요.”
앞으로 다가온 사내가 내민 자루에 조걸이 곡식을 퍼 담던 그때였다.
“아이고,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어찌나 헌앙하신지.”
“하하하. 제가 좀 잘생기긴 했죠.”
“이렇게 비범하신 젊은 무사님이라니! 화산의 젊은 무사님들에 대한 소문이 요즘 장강에 파다합니다! 저 악적 중의 악적인 만인방의 장일소와 맞서 싸우신 분들이 있다고!”
조걸의 턱이 점점 더 올라갔다.
“하. 하. 하. 핫!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요. 물론 장일소도 대단하긴 했지만…….”
그 말에, 앞서 곡식을 받았던 노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혹시 무사님께서…….”
“윽, 으윽!”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닙니다. 장일소 놈에게 맞은 옆구리가 쑤셔서. 끄응……. 이게 쉽사리 낫질 않네요.”
“세, 세상에……. 그 대단한 분이…….”
노인의 얼굴에 감격이 물밀듯 차올랐다.
천하의 장일소와 검을 섞은 대단한 이가 이렇게 친히 곡식을 나눠 주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감격해 버린 것이다.
“그럼 혹……?”
“예?”
“무사님께서 그 천하에 이름 높은 화산검협?”
“…….”
“아닌가? 그럼 그…… 화산정검?”
“…….”
“……아닌가요? 아, 그럼 설마 빙…….”
“다 담았습니다. 다음 분.”
“저, 저기 무사님.”
“네?”
“……제 곡식이 다른 사람들보다 좀 적은 것 같은데.”
“똑같아요.”
“분명 좀 적은 것 같은…….”
“아뇨. 똑같다니……. 아아아악!”
별안간에 날아든 손바닥이 조걸의 뒤통수를 쫘악 후려치고 지나갔다.
“헛짓거리 하지 말고 제대로 담아라!”
“아, 왜 사형은 맨날 나만 구박합니까!”
“다른 사람은 구박 들을 만한 일을 안 하니 그렇겠지!”
“아니……!”
“어디 한마디만 더 해 봐라.”
윤종이 눈을 부라리자 풀이 죽은 조걸이 구시렁대면서도 곡식을 더 퍼 담기 시작했다.
“에헤야, 더러운 세상. 누구는 화산검협이고, 누구는 화산정검인데 나는 화산의 쫄따구라네.”
“입 다물고.”
그러자 조걸이 요상한 노래를 멈추고 입술을 꾹 말아 넣었다. 윤종은 피식 웃고는 곡식 퍼 주는 걸 거들었다.
“정말 이 감사함을 어찌 표해야 할지…….”
“아닙니다.”
윤종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 칼 든 무뢰배들 때문에 여러분이 고초를 겪고 계시니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그, 그게 어찌 화산의 잘못입니까! 다 저 썩어 빠진 구파일방 놈들과 찢어 죽일 사파 놈들 때문이지!”
“맞아!”
“화산은 다르지! 천우맹은 다르고말고!”
사방에서 동조하는 소리와 함성이 들려왔다.
곡식을 나눠 주는 자리이니만큼 무슨 공치사를 못 하겠냐마는 확실히 장강인들의 인심은 화산에게 기울고 있었다.
윤종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다만 지금 이곳 말고도 들러야 할 곳이 많으니, 조금 서둘러 주셨으면 합니다.”
“예, 도사님! 그리하겠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또 사뭇 다른 반응에 조걸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왜 나는 무사님이고 사형은 도사님입니까? 나도 도산데!”
“……걸아.”
“왜요?”
“네가 한 번만 더 입을 떼면 나도 저분들에게 도사님 소리를 못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조용히 하겠습니다.”
얼른 입을 꼭 다물고 곡식을 나눠 주는 조걸의 모습에 윤종이 슬쩍 웃고 허리를 폈다.
저 멀리 도도히 흐르는 장강과 그 너머 강남이 보였다.
‘보기에는 이렇게나 평화롭건만.’
하지만 겉보기에나 그럴 뿐, 저곳은 더 이상 평화롭다고 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 * *
“많기도 많구나.”
양민들을 구휼하고 돌아온 백천은 부두로 모여든 인파를 보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얼마 전에도 강을 건너려는 상인들이 넘쳐났지만, 며칠 사이에 그 수가 배는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보통 상인들이 이만큼 모이면 일반적으로는 싸움이 나거나 큰 혼란이 나야 정상인데, 이곳에서는 딱히 소란거리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제 순번이 임박한 상인들은 질서정연하게 차례를 기다렸고,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하는 이들은 능숙하게 천막을 치고 쉬면서 조용히 제 순번을 가늠했다.
돈이 걸린 일이라면 성질 급하기가 비할 데 없는 상인들이지만, 이곳에서만은 순한 양이나 다름없었다.
이유? 그야 아주 간단했다.
“거기?”
“예?”
“발 삐져나왔는데?”
“죄, 죄송합니다.”
“아니, 뭐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 지나가는 수레에 다칠 수도 있으니 주의하란 거요. 알아듣겠소?”
“예! 예! 걱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상인들을 관리하는 게 하나같이 어디서 호랑이 한 마리 정도는 맨손으로 찢어 죽이고 왔을 것처럼 생긴 산적 놈들이기 때문이다.
“저, 저기 그…… 호걸님?”
“호걸이 아니라 상단원(商團員)이요. 그래, 무슨 일이오?”
“저, 저기 짐을 싣는 이보다 저희가 먼저 왔는데…….”
“엥? 기다려 보쇼.”
순서를 확인해 보던 산적이 아차 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끄응. 미안하게 됐소. 이걸 어쩌나……. 보고를 하면 내가 맞아 뒈질 텐데. 으으…….”
산적의 얼굴이 희게 질리는 것을 본 상인이 움찔했다. 심지어는 두 눈에 핏발까지 서기 시작하니 상인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 아닙니다. 그, 그냥 말씀드려 본 겁니다. 저희가 기다렸다 실으면 되지요.”
“응? 그래도 되겠소?”
“아이고! 당연히 되지요! 하하. 저희는 남는 게 시간입니다.”
“고맙소. 내 꼭 보답하겠수다! 그럼 저 뒤로 가서 서시오. 내가 바로 다음 차례에 싣게 해 드릴 테니까!”
“아이고, 감사합니다!”
실수로 순서가 밀린 일이니 절대 감사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상인은 정말 감사하다는 듯 연신 허리를 굽혀 대고 있었다.
“…….”
그 양을 가만 보던 백천은 뭔가 말을 하려 입을 뻐끔대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서 보게 된 광경 역시 그리 즐겁진 않았다.
“그래서 어제 들어온 돈이 얼마라고 하셨소?”
“여기 장부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흐음.”
현영이 익숙하게 장부를 받아 들고 촥촥 넘겼다.
이것뿐이라면 그리 특별할 게 없다. 현영은 화산의 재경각주로서 매화도의 출결을 확인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니까.
……공손하게 장부를 넘기는 이가 녹림왕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흐으으음. 회계를 따로 공부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하. 기본 소양 아니겠습니까?”
“무척이나 정확합니다.”
“동전 한 문 틀리는 일 없을 것입니다. 지속적인 우호 관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와 정직이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간만에 믿을 만한 분께 일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다만…… 간간이 은하상단에서 와서 장부를 확인할 터이니 그 부분은 감안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언제든 환영입니다.”
“하하하. 듣던 대로 호걸이시군요.”
“하하하하. 재경각주님만 하겠습니까?”
임소병이 현영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 허허. 물론이지요. 허허허.”
옆에서 함께 그 광경을 보던 백상이 화들짝 놀라며 백천에게 말했다.
“사, 사형. 방금 저…… 저 손에…….”
“상아.”
“예?”
“입 닫아라.”
“…….”
백천도 똑똑히 보았다. 임소병의 손을 꽉 맞잡았다 놓은 현영의 손에 뭔가 묵직해 보이는 전낭이 생겨난 것을.
현영이 헛기침하며 전낭을 품에 갈무리하는 모습까지 확인한 백천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세상사가 다 그런 것이다. 세상사가.
어쨌든 활기차게 돌아가는 부두의 모습을 보던 백천의 눈이 살짝 어둑해졌다.
“슬슬…….”
“예?”
“준비를 해야겠구나.”
“무슨 준비요?”
백상이 되물었지만 백천은 그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 * *
늦은 밤.
손에 술 한 병을 달랑 든 청명이 방을 나섰다. 전각들에 아직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흐음.”
밝은 주변을 둘러보던 청명은 슬쩍 발길을 돌렸다.
편히 술을 마시기에 이곳은 너무 밝다.
그의 발길은 물가로 향했다. 우거진 갈대밭을 지나 한참을 걷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강변에 이르렀다.
쏴아아아.
강물이 출렁이며 연신 밀려들었다 물러난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청명은 손에 든 술을 들이켰다.
“음.”
잠시 후 조금 거칠게 술병을 내려놓은 청명의 얼굴이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자리에 벌렁 드러누우니 밤하늘의 한중간에 뜬 달이 훤히 보였다.
‘모르겠네.’
일은 잘 풀려 가고 있다. 화산은 명성을 얻었고, 실리를 얻었으며, 명분 또한 얻고 있다. 지금 장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천우맹은 확실히 자리를 잡을 것이다.
적어도 십 년은 더 걸렸어야 가능했을 일이 근 한 달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응당 기꺼워해야 한다. 청명이 바라마지 않던 일이니까.
하지만…….
“갑갑하네.”
어쩐지 가슴 한구석에 돌덩어리를 얹어 둔 것 같았다.
강남의 장일소가 하는 일들이 두렵고 부담스러워서?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스스로도 원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일소와 붙은 이후부터 이 이유 모를 갑갑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검은?”
“우와아아아아악!”
소스라치게 놀란 청명이 몸을 데굴데굴 굴려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는 격하게 몸을 일으켰다.
“…….”
“아오, 씨! 깜짝이야! 귀신이야? 어? 귀신이냐고?”
“……검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유이설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경계를 안 하고 있었다 해도 어떻게 지척까지 기척도 없이 접근……. 아, 맞다. 저 양반 원래 이랬지.
“검은 왜?”
“뽑아.”
“응?”
스르르르릉.
그 순간 유이설이 허리에 찬 매화검을 천천히 뽑아 청명을 겨누었다.
느닷없는 행동에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자는 거야?”
“비무.”
“……나랑?”
“응.”
유이설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그럴 기분 아니니까 나중에 상대해 줄게. 오늘은…….”
바로 그때였다.
파아아아아앗!
유이설의 검 끝에서 섬뜩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쏟아진 검기는 청명의 얼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
놀란 청명은 멍한 얼굴로 뺨을 훔쳤다. 손가락 끝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사고?”
“두 번은 없어.”
“…….”
청명은 ‘하!’ 하고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그리고 슬쩍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허리춤에 찬 암매검을 천천히 뽑았다.
“뭐 하자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질 않거든?”
“…….”
“혼쭐날 각오 해야 할 거야.”
“건방져.”
유이설의 눈이 한층 더 차게 식었다.
“사질 주제에.”
“오호? 그럼 어디 사고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확인해 보실…….”
유이설은 청명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땅을 박차며 날아들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섬뜩할 만큼 찬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