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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41화 (838/1,567)

841화. 사람을 엿 먹여도 정도가 있지! (1)

며칠 사이 십여 개의 문파가 불타올랐다.

중원에 사파지문은 수도 없이 많다. 걸핏하면 서로 싸워 대어 멸문하는 것이 일상이고, 승자가 패자를 집어삼키는 일이 허구한 날 벌어지는 사파의 세계에서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은 결코 그렇게 치부할 수가 없었다.

첫째. 멸문한 문파들은 단순히 무너진 정도에서 그친 게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생존자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고.

둘째. 그 문파들을 멸문시킨 이가 바로 그 장일소이기 때문이다.

패군 장일소. 만인방의 방주이자 사패련의 련주.

오랜 세월 서로 반목하던 사파를 단숨에 연합하고, 지난 백여 년간 강호를 지배해 왔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서 굴욕적인 조약을 이끌어 낸 이.

그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하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낸 이.

그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그 이름이 주는 공포 역시 과거와는 비할 바 없이 높아졌다.

바로 그 장일소가 직접 나서서 사파들을 멸문시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가 선언했던 사파일통이 결코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오로지 피에 젖은 죽음만이 남을 것이라는 사실.

강호가 화로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강남의 사파들은 선택을 강요받았다.

일전에 소림과 무당, 남궁세가가 그러했듯이 그들은 굴욕적인 생존과 멸문 중 하나를 택일해야 했다.

당연히 반발하려 했다. 따져 묻고 이를 드러내려 했다.

하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남기지 못하고 잿더미가 되어 버린 문파들을 본 이상 입을 다물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실감한 것이다. 장일소의 광기가 향하는 곳은 결코 정파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그저 짓밟고 불태우기 위해 존재한다.

정파들 역시 당혹감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전이었다면 바로 남진을 외쳤을 것이다. 저들이 힘을 모으기 전에 밟아 놓아야 큰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한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선봉에서 사파를 주살해야 할 이들이 강남으로 향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보이는 법이다.

장일소가 전면에 등장하고서야 사람들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해 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실감은 곧, 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손발을 잘라 버린 무당과 소림, 남궁세가에 대한 끔찍한 증오로 화했다.

심지어 구파일방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소림과 무당, 남궁을 중심으로 뭉쳐 연합체를 구성했다. 마교가 쳐들어왔을 때도 그러했고, 새외의 세력이 중원을 침략했을 때도 그러했다. 그러니 사파가 발호할 때 역시 마찬가지여야 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다. 자신의 문파를 살리기 위해 다른 문파들마저 엮어 제멋대로 불침 조약을 맺어 버린 네 문파에 대한 증오가 다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내부에서도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증오하니 모일 수 없고, 모일 수 없으니 대화할 수 없다. 대화할 수 없으니 연합할 수 없고, 연합할 수 없으니 대책이 마련되는 일 역시 없었다.

차라리 장일소가 북진을 선언하고 장강을 넘어 버렸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몇몇 문파가 독자적으로 체결한 조약 따위는 인정할 수 없다고 날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되었다면, 어쩌면 조약 자체가 무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저 제가 얻은 영역만을 확고히 할 뿐이었다.

제 집을 지키기 위해 불합리한 조약을 깨는 것은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남의 땅을 공격하기 위해 조약을 무시하는 것은 정파의 근간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러니 장일소가 먼저 장강을 넘지 않는 이상, 정파는 그가 차례차례 사파를 집어삼키며 강남을 일통하는 것을 그저 손가락 빨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대체 얼마나 앞을 내다보았단 말인가? 사파 놈이 제갈공명도 아닐진대, 거기까지 봤을 리가 있나! 그저 상황이 맞아떨어진 거겠지.”

“빌어먹을, 무당이 그런 개짓거리만 하지 않았어도!”

무력하게 사태를 지켜보던 이들은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세인들은 알고 있다. 차오른 힘은 반드시 쓰이기 마련이라는 것을. 지금은 전화가 저 강남만을 휩쓸고 있지만, 강남이 다 정리된다면 더 커진 그 힘은 반드시 북으로 향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패련이라는 이름의 칼이 예리하게 벼려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강남에서는 사패련이 사도일통의 기치를 걸고 전화(戰火)를 일으키고, 장강에서는 통제를 잃고 날뛰는 사파들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는다.

하나, 그 모든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그저 묵묵부답하고 있다.

그제야 모두가 실감했다.

마교와의 전쟁 이후 백여 년간 이어져 왔던 강호의 평화가 지금 이 순간 그 끝을 고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상은 지금 확연하게 난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난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인들의 이목을 끌어당긴 것은 구파와 사패련만이 아니었다.

* * *

“이 빌어먹을…….”

주루에 모여든 이들의 얼굴에 울화가 넘실거렸다.

쾅!

술을 마시던 이가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강 건너에서 사파 놈들이 저리 날뛰는데 그냥 구경이나 해야 한단 말인가?”

“……진정 좀 하게. 그래 봐야 말 그대로 강 건너의 일이 아닌가?”

“뭔 태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사내가 화를 못 이기고 버럭 소리쳤다.

“저 사파 놈들이 저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 보겠다고 저러고 있겠는가? 당연히 이곳을 치려고 저러고 있는 게 아닌가!”

“…….”

“이민족들이 군사를 모으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그때 쳐들어가서 방해를 해야 하는 법이야! 국경 밖의 일이라고 두고 보기만 하면 지옥을 보게 된단 말일세! 그런데 망할……!”

이곳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강남에 사는 이들이 당할 고초를 생각하면 남의 일인데도 막막하고 눈앞이 깜깜해진다.

“장강에서 온갖 사파 놈들이 날뛰는 것만 해도 지옥 같은데……. 이제는 사패련까지.”

“아, 그 일 말일세. 요새는 그래도 장강이 좀 잠잠하다는구먼.”

“응? 어떻게? 수로채 놈들이 장강을 떠나기라도 했나?”

“그게 아니라, 장강에 있는 천우맹이 날뛰는 사파 놈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고, 장강에 상로를 확보했다네.”

“뭐? 상로를?”

사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강의 사파들을 쓸어 버렸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장강에서 날뛰는 사파들은 애초에 어중이떠중이 같은 것들. 굳이 따지고 보면 마적이나 다름없는 것들이니까.

나서지 못하는 게 문제일 뿐, 나서기만 한다면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저 수로채가 점거한 장강에서 길을 확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수로채가 가만히 있는가?”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하네.”

“그, 그럴 리가 있나? 뭘 잘못 들은 거 아니고?”

“에헤이! 지금 장강에서는 소문이 파다하네. 장강의 상단이란 상단은 모조리 구강으로 모여들고 있네. 천우맹이 구강을 점거하고 사파 놈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더군.”

“……정파는 장강에 가지 못하는 거 아닌가?”

“그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지, 천우맹은 관계없잖은가?”

이 말은 굉장히 많은 의미를 가진다.

이제까지 정파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대표되었다. 정파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이 오직 그 열다섯 문파만은 아닐진대, 세상의 수많은 중소 문파들 역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라는 이름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인식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천우맹이 수로채……. 아니, 사패련을 상대한다고?”

“못 할 것도 없지! 생각해 보게. 그 천우맹에는 화산이 있고 당가가 있네. 그리고 새외의 쟁쟁한 문파들도 천우맹 소속이 아닌가?”

“……새외는 멀어서 도움이 안 될 텐데, 겨우 두 문파에 불과한 것 아닌가?”

“아닐세. 듣자 하니 저 녹림도 천우맹 소속은 아니지만 천우맹을 돕는다더구먼.”

“녹림이 왜?”

“쯧쯧! 그야 빤한 일이지. 녹림과 가장 사이가 안 좋은 곳이 바로 만인방 아닌가? 그 만인방이 사패련을 만들었으니 녹림은 사패련과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지. 그럼 사패련을 상대할 만한 쪽에 붙어야지!”

사패련을 상대할 만한 곳?

“천우맹이 그럴 만큼 대단한 곳이었나…….”

“못 들었는가? 이번 장강참변에서 만인방과 가장 치열하게 싸운 곳이 바로 화산 아닌가? 그 화산이 아니었다면 조약이고 나발이고 모조리 씨몰살을 당할 판이었다고 하네.”

“……그리 대단하다고?”

“그 화산에 당가, 그리고 녹림까지 더해지면 저 사패련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과한 평가 같은데?”

“쯧쯧, 이 친구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먼. 예전의 화산이 아닐세. 화산이 저 구강을 점거하고 장강 한중간의 섬을 제 영역으로 선포했는데도 수로채가 얼씬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몸을 사릴 때, 천우맹은 저 장강에서 사패련을 견제하고 양민들을 구휼하고 있네. 이들이 정파지, 이들이!”

하지만 그 말에도 의문이 풀리지 않은 누군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런데 정파라고 하기엔 좀……. 무슨 놈의 정파가 산적들을 이끌고 싸운단 말인가?”

“저저, 속 편한 소리 하는 것 보소. 이 양반아! 그 산적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지금 천우맹이 장강에서 양민들을 구할 수 있었겠는가? 저 사패련과 맞서 싸울 수 있었겠냐고!”

“…….”

“그놈의 명분, 명분! 잘난 명분과 체면을 논하던 놈들이 어찌 되었는가? 제 목숨 구하자고 힘없는 양민들을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저들은 체면이 상하는 것 따윈 신경 쓰지 않고 힘을 키워 양민들을 지키고 있네! 말해 보게. 무엇이 정(正)인가?”

“드,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네.”

“천우맹이 없었다면 장강은 지금 지옥이 되었을걸. 그들이 있어서 그나마 사람들이 장강을 떠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지.”

“허어…….”

사내의 말을 경청하던 이들이 다들 탄식했다.

“……정파라 자처하는 놈들은 다들 모리배인 줄 알았더니만.”

“그러게 말일세. 설마 저 위험한 장강 한중간에서 버티고 있는 이들이 있을 줄이야.”

그때 누군가가 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나는 도통 이해가 안 가는데. 정말 그 천우맹이, 정말 그 화산이 사패련과 맞서 싸운다는 건가? 그래 봐야 중소 문파일 뿐인데.”

“자네, 장강에 가서는 절대 그 말 하지 말게.”

“왜?”

“맞아 죽네.”

진지하게 조언한 이는 혀를 찼다.

“지금 장강 사람들에게는 화산이 천하제일문파일세. 그리고…… 그게 꼭 고마워서는 아닌 모양이더군.”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이건 심지어 강남에서 건너온 소식인데.”

“응?”

“그 장강참변에 참여했던 사파 놈들의 입에서 저간의 사정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는 모양일세.”

“그게 뭐 특별할 게 있는가?”

“다른 건 특별할 게 없지. 하나만 빼고.”

“뭐가?”

“전쟁 와중에 그 패군과 맞서 싸운 이가 누구인 줄 아는가? 그 장일소와 일 대 일로 겨루어 패군을 낭패 보게 한 이가 누군 줄 아느냔 말일세.”

“허도진인이거나…… 남궁가주 아니겠는가?”

“틀렸네.”

“응? 그럼 설마 청성인가?”

“아닐세! 내 말하지 않았는가, 화산이라고.”

“화산? 화산의 누가?”

“그 화산신룡이 패군과 맞섰다더군.”

그러자 말을 들은 이가 더 들을 것도 없단 듯 역정을 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나! 화산신룡은 고작 후기지수 아닌가! 후기지수가 그 패군과 맞섰다는 게 말이나 되나?”

“내가 이 말이 누구에게서 나왔다고 했는가?”

“그야…….”

반박하던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 이 소식은 강남의 사파에게서 흘러나온 소식이라 했다. 사패련은 이미 사파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직접 제 수장의 명성을 깎아내리지는 않았을 터.

“수적을 만났다 살아난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일세. 새로 열린 상로를 타고 강북으로 건너온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지. 그들이 모두 다 같은 말을 하고 있네.”

이야기를 듣던 이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이 궁금하여 숨까지 죽이게 되었다.

“그 화산신룡이 패군 장일소와 맞섰는데 거의 호각이었다더군. 화산신룡의 검이 하늘을 덮었고 의기가 절벽을 뒤흔들었다고. 그런데 승부를 가르려는 찰나에…… 허도진인이 화산신룡을 공격해 그 승부를 막았다지 않는가.”

“저, 저…… 찢어 죽일!”

“그러니 멋모르는 소리는 치우게나. 지금 천하에 사패련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는 문파가 있다면 그건 오직 하나, 화산뿐일세.”

사내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고, 믿기지 않는 마음에 그저 허허 웃었다.

“세상에, 화산이……. 그 화산신룡이…….”

“아, 그렇지. 이제는 화산신룡이 아닐세.”

“으응? 그건 또 무슨 소린가?”

“후기지수에게나 붙는 별호는 이제 그에게 안 어울리지. 새로운 별호가 붙었다네. 심지어 이건 그 전쟁에 참가한 사파 놈들이 붙인 별호라는 말이 있더구먼!”

“그, 그 별호가 뭔가?”

“그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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