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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840화 (837/1,567)

840화. 협의지문이 아직도 있었구나. (5)

저벅. 저벅. 저벅.

찰박.

새하얀 비단신이 피 웅덩이를 밟는다.

튀어 오른 핏방울에 꽃신이 얼룩지자 사내가 언짢은 기색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이래서 피가 싫다니까.”

떨떠름하게 발을 빼낸 사내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짜증이 번져 있던 얼굴에 이내 환희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붉은 색은 좋아하지.”

세상이 온통 붉게 변해 있다.

대지는 끝없이 흘러내린 피로 젖어 있고, 그 위로는 피투성이가 된 시체가 즐비하다. 게다가 전각을 활활 태우고 있는 불길이 치솟으니 검은 하늘마저 붉게 물들었다.

이곳에서 붉지 않은 것은 오직 사내뿐이었다.

“끄으……. 흐으으…….”

흰 장포로 전신을 감싼 사내, 장일소가 신음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쪽 팔과 다리가 잘린 한 남자가 제가 흘린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 위에서 꿈틀대며 신음하고 있다.

장일소가 천천히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 사내의 이마를 검지로 가볍게 밀었다.

“자……장일…….”

사내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미 죽어 가고 있는 이에게 두려울 것이 또 있을 리 없을 텐데도, 장일소와 시선을 마주치자 마치 지옥의 악귀라도 맞닥뜨린 듯이 공포에 질렸다.

“무서워?”

“흐……. 흐으…….”

“쯧쯧쯧. 그러게, 좋게 말할 때 말을 들었으면 됐을 텐데. 그럼 나도 괜히 힘을 빼지 않아도 되고, 너는 영광을 누려서 좋고.”

“…….”

“이런 작은 문파 하나 어떻게 되든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냥 내 밑으로 들어와 복락을 누리고 살았으면 됐을 일인데. 멍청하기는.”

사내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개가 되라 한 사패련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겨우 그 제안 한 번 거절했다고, 이런 참혹한 짓을 벌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모두 죽었다.

이 장원 안에 있던 건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살아남지 못했다.

어떠한 징조도 없이 몰려온 만인방의 악귀들이 이 장원 안에 있는 모두를 베고, 죽이고, 짓밟았다. 조금 전까지 그와 웃으며 대화하던 모두가 이 악귀들의 손에 죽어 나갔다.

“끄으…….”

귀면방(鬼面房)의 방주, 귀면흑호(鬼面黑狐) 모송(牟松)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왜…… 왜 이렇……. 왜…….”

“아아. 알지, 알아.”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딱히 크게 저항할 생각은 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

“몰려와서 그냥 위협만 했다면 언제든 무릎을 꿇었을 거다. 아니, 아니지. 그 전에 그 전에 조금 우대해 주겠다는 말이라도 해 줬으면 언제든 내 신발을 핥았을 거다. 그 말이 하고 싶은 거겠지?”

모송의 덜덜 떨리는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피에 젖은 중년인이 떨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어떻게 보아도 유쾌하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장일소는 그저 즐겁다는 듯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이 애석한 친구야. 생각을 좀 해 보게. 그건 네 입장이지. 내가 그 말을 일일이 들어주다가는 천하 모든 사파의 수장들을 만나 주다 시간을 다 보내게 될 텐데. 안 그런가?”

“…….”

“그보다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거든. 내가 알려 줄 테니 잘 들어 보라고.”

장일소가 모송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적당한 곳 하나를 처참하게 밟아 버리는 거지. 그리고 그 시체들을 조금도 치우지 않고 늘어놓는 거야. 그럼 시체가 채 다 썩기도 전에 금세 소문이 퍼지지 않겠어? 그 악랄한 장일소 놈의 제안을 거부했던 귀면방이 쥐새끼 한 마리 남기지 못하고 씨몰살을 당했다. 제안을 거부하는 다른 문파들도 같은 꼴이 될 거다.”

“으……. 으으…….”

모송의 몸이 눈에 보일 만큼 부들부들 떨렸다.

장일소가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였다.

“내가 이 말을 왜 해 주는지 아나?”

“……왜…… 왜……?”

곱게 치장된 장일소의 만면에 하얀 미소가 드리워졌다.

“고마워서 그래.”

“…….”

“나는 네게 딱히 악감정이 없어. 네가 특별히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니까. 내 입장에선, 그저 딱 적당한 곳에 적당한 크기의 문파가 있었을 뿐이거든.”

모송의 두 눈에서 증오와 고통, 슬픔이 뒤섞인 피눈물이 흘렀지만, 장일소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네 덕분에 일이 배는 더 쉬워질 거야. 그러니 편히 가게. 내 장사는 후하게……. 끄응. 아니지. 그건 좀 곤란하겠네. 네 시체는 여기서 썩어 가야 의미가 있는지라.”

“으……. 으아아아아악!”

결국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지 못한 모송이 물어뜯을 듯 장일소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당연히 실패로 돌아갔다. 기듯이 달려드는 모송의 얼굴을, 장일소가 태연히 움켜잡았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부술 듯 손에 힘을 주어 조였다.

“끄으……. 끄아아아…….”

모송이 하나 남은 손으로 장일소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장일소는 꿈쩍도 하지 않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옥죌 뿐이었다.

“이런, 이런.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좋게좋게 보내 주려 했는데.”

귀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장일소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아직 네가 왜 죽는 줄 모르는 모양인데.”

우득. 우드드득!

“끄……. 끄으으으…….”

모송의 눈에 핏발이 모조리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장일소의 팔을 미친 듯이 긁어 대고 발악했지만, 장일소는 간지럽지도 않은 듯 미동도 없었다.

“힘이 없는데 눈치까지 없으니 죽을죄란다. 나만 한 인간도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사는데, 약해 빠진 놈이 뭘 믿고? 약한 주제에 세상이 마음대로 돌아갈 거라 믿었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지.”

“끄으!”

퍽!

결국 짧은 신음과 함께 끔찍한 소리가 울렸고, 모송의 몸이 축 늘어졌다.

“쯧.”

자리에서 일어난 장일소는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듯 손을 털어 냈다.

“련주님.”

그런 그를 향해 호가명이 다가와 조용히 시립했다.

“정리가 끝났습니다.”

“흐음.”

장일소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조금 모자라다. 더 너저분하게 만들어 두지. 시체도 좀 더 여기저기 흩뿌려 놓고.”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장일소가 부드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다른 곳에 돈을 뿌려라.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하고, 앞으로 사패련이 관리하게 되면 이놈들이 패악을 부리던 시절과는 달라질 거라 말해 두거라.”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무지렁이들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을 텐데.”

“쯧쯧쯧. 가명아. 너는 꼭 잘 가다가 한 번씩 모자란 소리를 하는구나. 전쟁이란 적을 줄이고 아군을 늘려야 하는 법이란다. 안 그래도 적이 넘쳐나는데, 굳이 더 만들 필요는 없지 않니. 그게 하찮기 짝이 없는 이들이라 해도.”

장일소가 손사래를 치고 조용히 덧붙였다.

“돈 몇 푼에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란다.”

“하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장일소가 널린 시체들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 말했다.

“다른 놈들은 아직 움직이지 않느냐?”

“예, 지금은 관망하는 모양입니다.”

“머저리 같은 놈들.”

아마 지금쯤 신주오패의 수장들도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사패련에서 무슨 자리를 달라고 할지 주판알을 튕기느라 바빴겠지. 어디까지 처먹을 수 있는지 말이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 뻔한 수작이나 해 대니까 아직까지 이 강남에 처박혀서 흙이나 파먹고 있는 것이다.”

장일소가 제 입술을 매만졌다. 손끝에서 풍겨오는 피비린내가 그의 살심을 끌어 올렸다.

“그놈들도 배부른 돼지일 뿐이지.”

우리에 갇힌 가축은 제가 그날그날 처먹을 것만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래서는 영원히 우리 안에서 나올 수 없다.

늑대가 되기 위해서는 잡은 사냥감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사냥이 끝나는 그 순간부터 다음 사냥감을 생각하고, 노리고, 또 물어뜯어야 한다.

“련주님……. 귀면방이야 이렇게 처리했지만, 아무리 경고를 한다고 해도 모두가 련주님을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고 있다.”

장일소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모두가 따를 필요도 없다. 따르는 이는 짓밟고, 따르지 않는 이는 죽이면 돼.”

“……따르지 않는 이들 모두를 말입니까?”

“왜? 문제될 것이라도 있나?”

태연히 묻는 장일소를 보며 호가명은 입을 닫고 말았다.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은 오직 장일소밖에 없다.

그는 사패련의 련주이며, 또한 저 구파일방을 농락하고 그들로부터 굴욕적인 조약을 받아 낸 사파의 영웅이다. 천하의 모든 사파인들이 장일소를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업적을 바탕으로 몰아붙인다 해도 강남에 있는 사파들 중 적어도 절반 이상은 사패련에 복속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모조리 죽인다고?

“쯧쯧. 가명아. 얼굴에 생각이 다 보이는구나.”

“……죄송합니다. 련주님께서 하시는 생각을 제가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는지라.”

“늦든 빠르든 그리될 일이다. 미리 죽이나 훗날 죽이나 뭐가 다르겠느냐?”

“…….”

“무리를 해서라도 몰아붙여야 한다. 사파가 연합을 할 때마다 결과는 항상 같았지. 저 정파의 연합 앞에 항상 패배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정파는 연합을 할 수가 없어.”

장일소가 이를 드러냈다.

“강남불침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저들 사이에 불신이 심어졌다는 것.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고 서로를 탓하며, 또 한편으로는 증오하게 되었다는 것이지. 그런 상황에선 누군가의 깃발 아래 모여들 수 없을 테니까.”

“려, 련주님.”

“지금이 유일무이한 기회다. 이 한순간이 아니면 나 역시 이 강남 땅에 머무는 돼지가 될 뿐이지. 흘러내린 저들의 피가 말라붙기 전에, 상처에 딱지가 앉고 아물기 전에 강남을 정리하고 북상한다. 그렇게만 되면…….”

우드드득.

장일소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천하를 내 발아래에 두게 되겠지.”

호가명이 전율하며 그 자리에 부복했다.

“당연히 그리될 것입니다. 패군!”

“쯧. 얘도 참, 아부는.”

장일소가 휘휘 손을 저었다.

“그리 대단하게 볼 것 없다. 그도 잘됐을 때의 이야기지. 조금만 어긋난다면 그냥 욕심을 부리다가 뒈지는 얼간이가 될 뿐이다. 그럼 너도 결국 한심하게 죽을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으음?”

호가명이 빙그레 웃었다.

“련주님의 뜻에 함께하다 그리되는 것이니 웃으면서 죽을 수 있겠지요.”

“…….”

빤히 그를 바라보던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낯간지럽게.”

몸을 돌린 장일소가 다시 싸늘해진 목소리로 일갈했다.

“정리해라. 오늘 밤 내로 두어 곳은 더 쓸어 버려야 할 테니까.”

“예!”

장일소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사위는 던졌다.’

그 역시 완벽한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다. 이건 그 자신에 대한 시험이자, 운명에 대한 도전이다.

다만 하나는 확실히 안다.

모든 것을 안배하고 움직여야 할 때가 있고, 또 때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안개 속으로 발을 디뎌야 할 때가 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 한 발을 내디딜 의지다.

‘무엇도 나를 막을 수 없지.’

천하의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평화에 젖어 제 안위만을 살피는 머저리들로 꽉 찬 세상은 그를 막을 수 없다. 결코.

“다만…….”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면…….

장일소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이곳에선 보이지 않을 먼 곳.

그가 이를 드러내며 섬뜩하게 웃었다.

“하지만 너도 마찬가지다. 화산의 검귀 놈.”

작은 시냇물은 흘러흘러 강이 되고, 이제는 거친 격랑이 되었다. 이 흐름은 이제 세상 누구도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장일소 그조차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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