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8화. 협의지문이 아직도 있었구나. (3)
촤라라락!
산더미 같은 은자가 쌓였다.
눈앞에 돈이 쌓여 있으니 헤벌쭉 웃으며 좋아할 만한 일이었지만, 정작 그 은자를 앞에 둔 현종의 두 눈엔 뭐라 말할 수 없는 처연함이 가득했다.
“이히히힛.”
“…….”
“제가 장문인이라 싸게 드리는 거예요. 남들 같았으면 두 배는 더 받았을 텐데. 크으, 이게 사실 이러면 안 되거든요. 원래 아는 사이일수록 돈 거래는 확실해야 하는데, 난 마음이 너무 약해서 탈이라니까.”
청명이 쫑알대는 걸 듣던 현종이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선조시여.’
죄송합니다.
화산은 이제 제자가 장문인에게 고리대를 놓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종은 절망하여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빚과 고리대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 바로 현종이다. 한때 시달렸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뒷덜미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자 놈에게 돈을 빌리고 이자를 물어야 할 줄이야.
“보, 복리는 아니지?”
“약속 시일 내로 입금만 하시면 된다니까요? 그런데 왜 그런 걸 굳이 신경 쓰세요.”
저거도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혹시…… 그 시일을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
“에이. 제때 갚으실 건데 그게 뭔 의미가 있나요? 헤헤.”
현종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늑대 물리친 자리에 범이 들어온다더니, 빚쟁이들을 해결한 자리에 저 망둥이가 들어오네.
내 팔자야…….
하지만 그와 대부분의 팔자(?)를 함께한 현영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돈 거래는 확실해야 하는 법이지! 아암! 기특한 녀석 같으니라고.”
마음이 흡족한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는 현영을 보고 있으니, 저 턱주가리를 목 뒤까지 돌려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현종은 또 꺄르륵대며 웃는 청명을 노려보았다.
저 공명정대한 놈!
저 뒤탈 없고 계산 확실한 놈!
……어? 이거 칭찬인가?
그때 현영의 시선이 오검에게로 꽂혔다.
“너희!”
“예?”
“너희는 지금부터 석 달 동안 개인 지출 금지다. 녹봉 없다!”
“예? 왜, 왜요?”
조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 끝이 뒤집어졌다.
화산의 제자들은 수련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만큼, 딱히 돈이 나올 구석이 없다. 집안이 부유한 이들이야 집에서 보내 주는 돈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화산이 돈을 벌고 제자들에게 용돈 삼아 녹봉을 지급한 이후로 집안의 지원도 받지 않은 지 오래다.
그런데 갑자기 녹을 끊는다니!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그럼? 남의 돈으로 구휼하고 너희 돈은 너희가 다 쓰려 했느냐? 생색도 너희가 내고?”
“……어, 그건…….”
현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번다더니! 너희가 딱 그 짝이로구나! 협행을 하고 사람들에게 베풀고자 했다면 너희가 손해를 감수하는 면도 당연히 있어야지. 어디 챙길 것 다 챙겨 가며 남의 돈으로 기분만 내려 하느냐!”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쥐꼬리만 한 용돈을 뺏어 가시다니요! 차라리 벼룩의 간을 내먹으시지! 정말 피도 눈물도 없으시…….”
“이 새끼가?”
순간 눈이 획 돈 윤종이 주먹을 날려 조걸의 턱주가리를 돌려 버리려는 순간 무언가가 벼락처럼 먼저 날아들어 조걸을 걷어찼다.
“꺄울!”
“…….”
윤종이 제 눈앞으로 쭉 뻗어진 다리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버르장머리 없어. 혼나야 돼.”
그, 그렇죠. 사고.
그 말은 맞죠. 근데 그렇다고 사람을 다짜고짜 걷어차다니……. 사고도 많이 변하셨네요.
천천히 긴 다리를 접어 회수한 유이설이 다시 차분히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들었다.
그녀의 눈빛을 본 윤종도 움찔하여 재빨리 양팔을 바짝 귀에 붙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장로님.”
백천의 나직한 대답과 함께 다른 오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끄으응……. 이럴 거면 내가 얻어맞기 전에 대답을 하시지…….”
“대답하기도 전에 네가 미쳐 날뛴 거지.”
오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어쨌든 남의 돈으로 생색내려 했다는 말에 찔리는 바가 있었기에 크게 불만이 있는 기색은 아니었다.
무릇 베풂이란 제 것을 잘라 내어 주는 것이지 남의 것을 내어 주는 게 아니니까.
그때 현종이 살짝 복잡한 심경으로 앞에 놓인 은자를 옆으로 슬그머니 치웠다. 그리고 분위기를 정리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하튼 그래서…….”
어느새 방 안에는 화산의 중진들이 모여 있었다.
“현재 상황을 논의를 좀……. 그래, 논의를 좀 하자꾸나.”
“예, 장문인.”
이미 장문으로서의 체면은 멀리 날아가 버렸지만, 애초에 그리 대단한 체면도 아니었으니 상관이 없었다.
“모두 들었겠지만, 주변의 상황이 좋지 않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장강불침의 조약을 맺으면서 이 주변이 무주공산이 되어 버렸구나.”
현종이 시선을 주자 현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받았다.
“현재 장강 주변에 사파들이 말 그대로 들끓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평소 모습을 보이지 않던 마적 놈들까지 날뛰고 있다 합니다.”
“하여튼 후안무치한 도적놈들!”
“모조리 다 강에 처넣어 수장시켜 버려야 하는 건데!”
“이래서 도적들이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반응에, 현종은 살짝 어색한 얼굴로 방 한구석에 슬쩍 시선을 주었다. 점점 의기소침해지는 한 사람이 신경 쓰여서였다.
현종이 헛기침을 했다.
“……말을 좀 조심하고.”
“아…….”
구석에 쭈그러진 녹림왕을 그제야 눈치챈 이들이 살짝 미안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녹림왕님.”
“네, 암요. 도적이라고 다 같은 도적은 아니지요. 산 도적은 좀 나은 편이니까.”
“그래 봐야 도적 새끼지. 뭐가 다르다고.”
“청명이는 조용히 해라.”
하지만 현상은 임소병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태연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 보니 양민들의 피해가 극심합니다. 도적에게 시달리는 것도 문제지만, 상선이 제대로 돌지 못해서 노역을 하지 못하고, 고깃배를 몰던 이들 역시 강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궁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으음.”
잠깐 고민하던 현종이 백천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직접 보니 어떻더냐?”
“심각합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고 장강에서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때부터 이어져 온 일이라……. 조금 더 지나면 아사자가 속출할지도 모릅니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모든 일을 직접 봐서 아는 이들도 있겠으나, 문파란 위에서 아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나 화산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모두가 상황을 파악한 것을 확인한 현종이 말했다.
“은하상단에 청해 화산의 재산을 장강으로 옮겨 오고 있다. 곡식과 재물이 도착하는 대로 급한 불을 끌 터이니 모두 돕도록 하거라.”
“예, 장문인.”
그때 가만 듣고 있던 현영이 조금 언짢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구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안다.”
“장문인. 저도 도인입니다. 양민들을 구하기 위해 재산을 베푸는 일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습니다. 화산의 곳간이 영원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영원히 책임져 줄 수는 없습니다.”
현종이 그 말에 동의하며 주억거렸다. 세상일은 마음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현실적인 부분 역시 당연히 고려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정확한 의견을 내는 이가 한 명 있다. 현종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청명아. 어찌 생각하느냐?”
“음.”
청명이 손가락으로 뺨을 두어 번 톡톡 두드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파 놈들은 끈기가 없어서 난장도 오래 못 피워요. 지금이야 저러지만 곧 힘이 빠져 잠잠해질 거예요. 그러면 웬만한 것들은 곧 정상화가 되겠죠. 문제는 수로가 막혀서 인부들이 당장 일할 곳이 없다는 건데…….”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안 그래도 인력이 좀 부족했으니까, 저희가 인부를 고용하죠. 공짜 인력을 끌어와서 그냥 부려 먹으면 좋기야 하지만……. 뭐, 산적은 애초에 일하는 법을 모르는 놈들이라 계속 이런 식이면 문제가 생기기도 할 테고요.”
그러다 괜히 짜증이 솟은 청명이 임소병을 흘겼다.
“녹림왕이 좀 위엄이 있었으면 찍어 누를 수 있을 텐데.”
“……거 위엄이 없어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가볍게 한숨을 쉰 현종이 현영에게 말했다.
“그렇다 하니, 한동안은 재물을 풀자꾸나. 장강의 상황이 이리된 데에는 우리 화산의 책임도 있지 않느냐?”
“책임이 없었어도 쓰셨을 거면서.”
“허허. 네가 좀 이해해 주거라.”
현영은 삐쭉거렸지만, 더 이상 현종의 말에 반대하진 않았다.
주변의 소음이 조금 잦아들자 임소병이 헛기침하고는 슬그머니 말을 얹었다.
“장문인께서 이곳에 저를 두고 회의를 진행하신 것은 제 의견도 듣기 위함이셨을 테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냥 생각 없이 시작한 건데…….”
“…….”
“마, 말씀하시오.”
임소병이 살짝 주눅든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장강의 상인들이 구강으로 모여들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인부들을 좋은 값을 주어 고용하게 되면 인부들의 가족들까지 구강으로 모일 겁니다.”
“그렇겠지요.”
“그럼 여기가 도시가 됩니다.”
“으음? 도시?”
갑작스런 말에 현종이 눈을 끔뻑였다.
“그건 너무 과한 생각이 아니오?”
하지만 임소병은 미소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도시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면 그곳이 곧 도시지요. 저희가 구태여 무언갈 하지 않아도 모여든 사람들이 알아서 집을 지을 테고, 그 사람들을 보고 장사꾼이 모여들면 금세 도시가 만들어집니다.”
“으으음. 생각해 보니 그렇겠구려.”
촥!
임소병이 부채를 쫙 펴고는 제 눈 아래를 가렸다. 두 눈이 반짝였다.
“그럼 저희가 해야 할 것은, 그 도시를 확실하게 접수하여 천우맹의 영역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 모사(謀士)다운 모습을 보며 모두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때, 청명이 돌연 두 눈을 부라렸다.
“어디 싸가지 없이 장문인 앞에서 부채를 펴? 안 내려?”
“…….”
시무룩해진 임소병이 슬그머니 부채를 내리고 말을 이었다.
“도시는 자금이자 인망이 됩니다. 지금 화산과 천우맹, 그리고 녹림은 세상 다시없는 기회를 잡은 겁니다. 이 도시를 중심으로 장강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중원 전역에 천우맹의 위용을 떨칠 수 있습니다.”
“어디 은근슬쩍 녹림을 끼워 넣어? 뒈지려고!”
“아, 거 야박하게 굴지 말고 좀 끼워 주십시오! 천우맹 가입 신청도 했잖습니까?”
“왜? 가서 과거도 치지?”
“사실 제가 실제로 쳐 보긴 했는데…….”
현종이 한숨을 푹 내쉬며 얼굴을 감쌌다.
‘제발 회의 좀 하자, 이것들아.’
하나만 있어도 정신 사나운 것들이 왜 둘이나 붙어서는…….
현종은 말이 더 먼 곳으로 새기 전에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녹림왕께서는 우리 화산이……. 아니, 천우맹이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예?”
임소병이 빙그레 웃었다.
“장문인께서는 지금껏 하시던 대로 그저 행하시면 될 일입니다. 특별히 더 할 것은 없습니다.”
“……그걸로 되겠소이까?”
“예.”
임소병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중하게 말했다.
“이미 이곳에 모여든 이들은 화산의 이름을 기억하고 화산을 자신들의 보호자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자연히 화산에 소속감을 가지게 될 겁니……. 쿨럭! 쿨럭! 아오……. 잠시만.”
크게 기침을 몇 번 한 임소병이 뻘게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들이 화산을 자신들의 문파로 받아들인다면 화산의 것을 먼저 소비하고, 화산의 물건을 팔아 주려 하겠지요. 저들은 화산을 밀어주고, 화산은 그들을 지켜 주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착취……. 아니, 그…… 수금? 아, 아니……. 빌어먹을 이걸 뭐라고 하더라?”
화산의 제자들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 말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임소병을 흘겼다.
‘저 도적놈…….’
‘그래 봐야 산적이라는 소리가 이래서 나오는 거구나.’
‘저저 머릿속 돌아가는 꼬락서니 봐라, 저거. 청명이랑 똑같네.’
그 소리없는 비난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청명이 얼른 임소병을 돕고 나섰다.
“선순환! 선순환!”
“아, 그렇지! 선순환! 선순환이 이뤄지게 됩니다. 그럼 모두가 좋은 거지요. 하하하하.”
임소병이 밝게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뭔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원래 이렇게 쉬우면 안 되는 건데……. 생각하니 어이없네. 이게 이렇게 되는 거면 산적질을 왜 했지? 우리도 정파나 할걸. 그냥 착한 척만 하면 사람들이 알아서 돈을 가져다 바치는데……. 와, 이거 생각할수록 억울하네?”
“정신 줄 잡아야지.”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
어느새 불신의 눈이 쏟아지고 있단 걸 눈치챈 임소병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저희가 해야 할 일은 장강의 상권을 움켜쥐고 그 상권을 쫓아온 이들을 잘 다독여 보호하는 겁니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거늘.”
현종의 중얼거림에 임소병이 고소를 머금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은 저 사패련과 구파일방이 만들어 준 밥상이다. 그저 숟가락만 올리면 이 밥상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다.
장강에 도시를 만들고 거기에 사람을 밀어 넣고, 그걸 자신들의 영역에 집어넣는다? 이건 나라가 나서도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알아서 벌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저 사파 놈들이 어떻게 나올까인데…….”
임소병의 눈에 살짝 근심이 피어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장문인! 장문인 계십니까!”
“응?”
현종이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개방의 홍대광입니다! 꼭 아셔야 할 일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오, 홍 분타주. 어서 드시오.”
입구 쪽에 있던 이들이 문을 열어 주자 홍대광이 재빠른 걸음으로 안쪽으로 들어왔다.
바로 현종에게 예를 표한 홍대광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장문인……. 사패련이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현종의 낯빛이 굳어졌다.